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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지도부, ‘레임덕’ 상황인가

등록 2005-01-06 00:00 수정 2020-05-03 04:23

국보법 폐지안 놓고 개혁파와 실용파 혼전…4월 전당대회까지 책임 공방과 혼란 커질 듯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강력한 저항과 당내 각 계파들 사이의 이견과 갈등, 지도부의 무능과 김원기 국회의장의 비협조 등으로 2004년 한해 동안 줄기차게 공언해온 국가보안법안 연내 처리 약속을 실현하지 못하면서 극도의 혼돈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특히 ‘국가보안법 폐지안’ 처리를 위한 대야 협상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지도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여당에서 지도부 내부와 각 계파들 사이에 연내 처리 무산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 현상까지 드러나면서 여권 지도부가 사실상 ‘레임덕’ 상황에 빠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천 대표와 이 의장의 신경전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투톱 체제’를 형성하는 이부영 당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는 2004년 마지막 날인 12월31일 전날 의총에서 논란 끝에 좌절된 ‘한나라당과 보안법 절충안 합의안’의 실체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지난 12월30일 의원총회에서 이부영 당 의장과 문희상·유인태 등 당내 일부 중진들이 한나라당 지도부와 막후 협상을 통해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연내 보안법 대체입법 절충안’을 무력화했다. 이날 의총에서 “국보법 폐지는 법 논리 싸움이 아니라, 개혁세력의 대변자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의 한판 정치적 싸움”이라며 ‘폐지 당론 고수’를 주장한 유시민·임종인 의원 등 이른바 ‘개혁파 의원들’과 “한나라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절충해 털고 가자”며 ‘비공개 투표를 통한 당론 변경’을 요구한 이강래·류재건 의원 등 ‘중진 및 실용파 의원들’이 격돌하자, 천 대표는 ‘개혁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하루 뒤인 31일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의 대체입법 합의 파기’ 논란을 제기하자 이부영 의장쪽에서 천 대표에게 반격을 가했다. 천 대표는 “잠정 합의 자체가 없었다”면서 일부 당 중진의원들이 자신도 모르게 한나라당과 개별적인 접촉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의장은 천 대표를 두둔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자들에게 “김덕룡 원내대표에게 물어보라”면서“(천정배 대표와 김덕룡 대표)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사실상 천 대표의 주장에 의문 부호를 찍은 셈이다.

열린우리당 안에서는 이를 두고 지난 9월9일 ‘국보법 폐지’ 당론 확정 이후 당론 고수라는 ‘원칙론’에 기울었던 천 대표와 한나라당과의 ‘합리적 타협론’을 선호했던 이 의장 사이에 쌓여온 감정적 갈등과 이견이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국보법 완전 철폐를 주장했던 개혁파 의원들과 한나라당과 타협을 통한 합리적 개선을 요구해온 실용파 의원들도 자신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일시적 연대를 도모하는 듯한 양상이 엿보인다.

지도부 흔드는 핵심 당원들의 분노

당내 보수성향 의원 모임인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 소속 안영근 의원은 “천 대표가 이 의장을 비롯한 중진들과 온건파 의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한나라당과 국보법 절충 협상을 당 중진의 개별 접촉으로 규정한 천 대표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반면, 국보법 폐지 농성을 벌여온 유기홍 의원은 “연내 처리를 관철하지 못해 국민 앞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게 됐지만, 한나라당과 어정쩡한 타협안을 연내에 처리하는 것보다는 2월에 폐지 기회를 다시 엿보는 게 더 났다”고 말했다. 천 대표가 제시한 2월 임시국회에서 당론 관철 계획을 사실상 수용한 셈이다. 한나라당과 ‘정면승부’를 통해 국보법 연내 폐지 관철을 요구하며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김덕룡 원내대표와 4자회담을 통한 합의 처리를 도모하던 이부영 의장과 천 대표를 싸잡아 비판하며 ‘인책론’을 제기했던 개혁파 의원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상당히 변화된 태도다.

이와 관련해 핵심 당직을 맡은 개혁성향의 한 의원은 “한나라당의 결사반대, 김원기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거부 속에서 보안법 연내 폐기 당론 관철은 솔직히 불가능하다”면서 “폐지 소신을 갖고 있지만 연내 처리 무산에 따른 안팎의 비판에 부담을 느껴온 천 대표와 연내 폐지를 요구해온 개혁파 의원들 사이에 ‘2월 처리’라는 일종의 타협점이 마련된 셈”이라고 분석했다. 당 중진들과 한나라당 사이에 오간 ‘절충안’을 처리해 극단적인 당 내분 사태를 촉발하기보다는 2월 임시국회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 심정적 일치감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 대표와 개혁파 의원, 이부영 의장과 중진 및 실용파 의원들 사이에 이런 우호적 분위기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게 여당 안팎의 중론이다.

일단 국보법 연내 폐지를 주창해온 시민사회단체와 핵심 당원들 사이에 국보법 연내 처리 무산에 따른 지도부의 무능과 책임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고조될 가능성이 높고, 이들이 당 지도부를 계속 두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장 30일 밤 여의도에서 촛불집회를 마친 열린우리당 당원 200여명은 영등포 당사에서 긴급 토론회를 열고, 당 지도부에게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국가보안법 연내 철폐를 외쳐온 ‘중단 없는 개혁을 위한 당원연대’(중개련)의 박무 대표도 “열린우리당 핵심 지지층의 요구인 보안법 폐지 등 개혁과제를 실천하지 못한 것은 당 정체성에 대한 위반이며, 의지 이전에 지도력의 문제”라며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대표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파에 속한 한 의원도 “우리가 직접 천 대표 책임론을 제기하지 않더라도 당 바깥에서부터 벌써 저항의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면서 “우리도 무작정 침묵하거나 두둔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당대회를 노린 정치적 계산법

4월 전당대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이들 사이에 갈등과 경쟁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당권 장악을 노리는 당내의 각 계파나 차기 당권 주자들은 조만간 개혁입법 무산 책임의 논쟁을 매개로 현 지도부와 각을 세우면서 본격적인 권력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천·신·정 중심의 당권파와 경쟁관계에 있는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중심의 ‘재야파’ 중진 의원은 “당장 지도부를 물러나라고 말하기는 좀 이른 감이 있다”면서도 “정치적 상황을 보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4·15 총선 이전 시대와 그 이후가 다른데, 현 지도부는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권위주의 정권의 날치기와 같이 인식하는 등 너무 몸을 사렸다”며 지도부의 소심함을 지적했다.

문희상·유인태 의원 등 ‘한나라당과의 타협’을 모색해온 중진그룹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 확보를 위해 개혁파의 원칙론을 ‘대안 없는 모험주의’로 비판하고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들 중진과 가까운 수도권의 한 의원은 “애초부터 열린우리당은 보안법 폐지안 관철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칙론’을 계속 고수할 것인지, 한나라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서 적절하게 타협할 것인지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며 “과연 누가 한나라당과의 절충을 통해 작은 실리라도 찾으려는 중진들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이 의원은 오히려 “개혁파들이 정말 보안법 폐지가 그토록 절박하다고 인식했다면 의원직 사퇴를 내걸고 단식농성을 하면서 한나라당과 맞섰어야지, 왜 당 지도부와 중진들과 각을 세웠겠냐”면서 “결국 내년 4월 전당대회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각 계파들의 정치적 계산이 더해지면서 필요 이상으로 문제가 확대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도기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홍역?

이런 여당의 내부 상황을 고려할 때 4월 전당대회 시기가 임박하고 각 계파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보안법 폐지 당론 관철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과 여권의 혼란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여당의 일각에서는 열린우리당의 혼란이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청와대 정무수석과 여당 원내총무가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한 대응 방침을 결정하고 의원들을 일사분란하게 몰고 가던 과거 당 운영 방식이 사라진 뒤, 이를 대체할 새로운 시스템이나 당내 이견을 종합할 정치적 권위를 가진 리더십이 출현하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홍역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실제 논란 끝에 지난 9월9일 ‘국보법 폐지’ 당론을 확정했지만, 여당 안에서는 이에 대해 공공연한 도전이 계속됐다. 실용파 의원들은 ‘폐지 당론’ 수용 방침을 밝히면서도 사실상 당 안팎에서 ‘대체입법’을 주장했다. 개혁파 의원들 역시 이부영 당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김덕룡 원내대표가 4자 회담을 통해 ‘쟁점 법안에 대한 합의 처리’ 원칙에 합의하자, 회담의 효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농성을 통한 실력 행사를 벌이는 등 당 지도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노 대통령 측근들의 각개약진

전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의 문희상 의원과 정무수석 출신 유인태 의원이 이부영 당 의장과 함께 한나라당과 보안법 연내 처리를 위한 협상안을 마련해 당에 이를 관철하려고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의 정치적 행보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노 대통령의 후원회장인 이기명씨와 ‘노사모’를 주도해온 명계남씨는 최근 “당원들이 나서 당을 바꿔야 한다”며 발언 수위를 점차 높이고 있다. 특히 최근 열린우리당 진성당원으로 가입한 이기명 회장은 노사모 회원들에게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호소하는 등 적극적인 정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여당 안팎에서는 유시민·김원웅 의원 등 개혁당 그룹과 차별화를 선언하며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통한 당 장악 계획을 추진 중인 노사모와 국민의 힘 중심의 ‘국민참여연대’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 회장은 이런 분석에 대해 “노 대통령이 지지하고, 내가 좋아하는 정당에 책임 있게 할 말을 하기 위해 당원으로 가입한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최근 열린우리당의 혼돈과 관련해 “원칙과 상식을 무시한 채 퇴행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한나라당을 상대로 적당한 타협과 밀실 협상이 정형화된 과거의 정치 패턴에 따라 조몰락거리며 일을 처리하려다 보니 문제가 생긴 것”이라며 “이런 식의 정치 패턴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 정치는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지도부의 태도에 강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노 대통령의 측근으로 천정배 의원의 원내대표 당선에 기여했던 염동연 의원은 아예 4월 전당대회를 통한 당 지도부 진출을 공언하고 있다. 염 의원은 특히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화해와 합당을 통한 2006년 지자체 선거와 2007년 대선 승리’를 내걸고 호남 지역 당원과 의원들을 공략하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염 의원 개인의 당 지도부 진입 의지가 반영된 것일 뿐 대통령의 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의정연구센터’를 만들어 경제 살리기 등 보수적 색채가 강한 행보를 보여온 이광재·서갑원·백원우 등 노무현 캠프 출신 소장파 의원들은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다. 서갑원 의원은 “국보법 폐지안 등에 대한 개인적 의견은 있지만 표현하는 게 적절치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4월 전당대회를 통한 당 지도부 구성 등에 대해 스탠스를 정한 게 없다”면서 “집단적 결의 없이 개인적 소신과 친소 관계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백원우 의원도 “최근 안희정씨 출소 이후 우리가 정치적 행동에 나서고 당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지만, 다 낭설일 뿐”이라며 “정무적인 문제에 관한 한 입을 닫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안희정씨 역시 당분간 정치나 권력 운용 등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고, 국내의 한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안씨와 가까운 한 인사는 “일각에서 외국 유학 권유도 있었지만, 안씨가 아이들의 교육과 가족의 사생활, 개인의 활동 전망 등과 밀접하게 관련된 만큼 국내에 머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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