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청와대에 빚 받으러 가다

등록 2004-12-23 00:00 수정 2020-05-03 04:23

다시 ‘43억원 빚 변제’ 촉구 나선 민주당… 열린우리당선 갚으려 했으나 실무자 반대로 불발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지난 12월16일 청와대 앞에서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색적인 피켓이 등장했다. ‘청와대는 메리 크리스마스, 민주당은 성냥팔이 소녀’ ‘대통령님, 빚 갚고 편히 주무세요’….

한화갑 대표와 손봉숙·이상렬 의원 등 민주당원 300명이 지난 2002년 대선 때 민주당이 떠안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빚 43억원을 여권이 변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실무자들 “빚의 1/10도 인정 어렵다”

지난 9월24일에 이어 두 번째 열린 시위를 지켜본 청와대 관계자들은 곤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우리도 그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빚을 해결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쪽은 감정이 상당히 격앙됐다. 장전형 대변인은 “열린우리당과 청와대가 대선 빚을 갚아주겠다고 해 잔뜩 기대를 했는데 이게 뭐냐”며 “결국 우리가 속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화갑 대표도 최근 목포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과거 민주당 대표경선 자금 수사를 미끼로 나를 회유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쓰러진다 해도 그 운명을 베개 삼아 당을 지킬 것이다”라며 여권을 강하게 비난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이 자신을 협박·회유해 민주당을 붕괴시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우호적 분위기가 흐르던 양쪽의 감정이 다시 뒤틀린 것은 지난 11월10일부터 추진돼온 대선 빛 변제를 통한 화해 전략이 여권 내부의 반발로 위기를 맞은 것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핵심부의 교감 속에 여권이 전격 추진돼온 ‘대선 빚 변제 프러포즈’는 최근 성사 단계까지 왔었다. 열린우리당쪽 협상 창구인 정세균 의원(국회 예결위원장)과 민주당 정책위의장인 김효석 의원이 막후협상을 통해 민주당이 요구하는 대선 빚 가운데 상당액을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에 빌려주되 이를 갚지 않는 ‘대여금 제공’ 방식으로 처리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어렵게 마련한 타협안은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당 살림을 책임진 최용규 사무처장과 사무처 실무자들이 타협안 수용을 거부한 것이다.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정세균·김효석 두 의원 사이에 합의한 대여금 제공 방식의 변제 계획을 받아든 최용규 사무처장과 몇몇 당직자들이 ‘별개의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에 돈을 제공할 수는 없다’면서 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고, 당 지도부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민주당이 변제를 요구한 43억원의 대선 빚을 실사한 실무자들 가운데는 10분의 1도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고 덧붙였다.

우리당쪽의 이런 해명에 대해 민주당은 강한 배신감을 토로한다.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우리도 열린우리당과 화해에 대한 당 안팎의 반발 등 부담이 컸지만 50년 정통 민주세력의 한 뿌리라는 생각을 갖고 상당한 양보안을 냈다”면서 “사무처의 반발 때문에 양쪽의 합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게 제대로 된 정당이냐. 결국 민주당을 흔들려는 한편의 사기극 아니냐”고 말했다.

강한 화해의지 여전하지만…

민주당은 열린우리당과 협상에서 전체 빚 가운데 절반인 20억원을 몇 차례에 나눠 갚는 방안 등 몇 가지 절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전남도의회(의장 김철신) 의원 40명이 12월14일 성명을 내 “민주당과 우리당의 통합론은 민주당을 와해하려는 음모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반발했지만, 이를 무마하며 12월16일 청와대 앞 시위에 앞서 “시위 계획을 철회할 최소한의 계획이라도 제시해달라”고 여권 핵심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내부 반발에 부닥친 여권 핵심부는 민주당에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했고, 민주당의 분노는 다시 폭발했다.

여권은 빚 변제 계획이 완전히 물건너간 게 아니라며 여전히 강한 화해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정세균 의원은 “연말까지 변제 계획을 밝히겠다”는 뜻을 민주당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한 핵심 인사도 “당 실무선에서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정한 대여금 변제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다”면서도 “언론 등 제3자가 공개적으로 감시·검증하는 합리적인 변제 방법을 곧 찾겠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