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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 확실히 구시대적”

등록 2004-11-12 00:00 수정 2020-05-03 04:23

원희룡 최고위원의 한나라당 진단… 개혁 프로그램 밀리고 보수파 목소리만 커진 상황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4대 입법’ ‘좌파 논쟁’ ‘이해찬 총리 발언’을 둘러싸고 여야가 거칠게 다투던 끝에 정기국회가 파행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은 집권세력다운 국정운영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동시에 한나라당은 ‘상생의 정치’ ‘정책경쟁의 정치’로 거듭나겠다던 박근혜 대표 체제 출범 초기의 캐치프레이즈가 실종되고, 어느덧 ‘도로 한나라당’이 된 모습이다.

전쟁보다 ‘민생 선회’외쳤지만

이런 가운데 은 11월6일 원희룡 한나라당 최고위원(40)을 만났다. 그는 7·19 전당대회에서 박 대표에 이어 2위 득표로 지도부에 올랐다. 강한 개혁 성향을 토대로 “한나라당을 바꾸는 변화의 엔진”을 자임함으로써 당당하게 선택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원희룡과 소장파들은 도대체 뭘 했나?”라는 질문을 받을 만한 게 그가 처한 상황이다.

그는 첫 질문으로 지난 석달 반 동안 한나라당의 ‘변화 실적’을 묻자 “변화했다고 볼 수 없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야당의 무모한 강경 대결 정치, 대안과 비전보다는 (정부여당의 실책에 따른) 반사이익에 치중하는 정치를 바꾸겠다고 당시 다짐했다”며 “그러나 소장파들의 개혁 프로그램은 뒷전으로 밀리고 보수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진 매우 안 좋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일차적으로 “박 대표가 (애초의 개혁과 변화 비전을) 구체화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했던 탓”으로 지적했다.

잠시 되돌아보자. 여권은 한나라당의 전당대회 직후 △과거사 진상 규명 △정수장학회 문제 등을 제기했다. 이에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 논쟁’으로 맞대응함에 따라 지난 7, 8월 정국은 때 아닌 이념 논쟁으로 흘렀다.

이 과정에서 원 의원을 비롯한 ‘수요모임’(회장 정병국, 남경필·박형준·김희정·이성권 등 개혁 성향 의원 20명)은 “털 것은 빨리 털어버리자”는 입장을 취했다. 원 의원은 “정수장학회 이사장(박 대표) 자리를 이돈명 변호사 같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성을 지닌 인사에게 넘김으로써 민주화운동을 하다 억압받은 인사의 자녀 장학사업도 함께 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며 “박 대표로선 산업화·민주화 세력의 화해에 몸을 던지는 의미를 갖게 된다고 봤다”고 밝혔다.

그 무렵 그와 정병국 의원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운영이사로도 참여했다. “한나라당이 남북 관계에서 전향적으로 나가야 할 터인데 당내 보수파 때문에 당 전체가 움직이기 어렵다면 우리라도…”(원 의원)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무렵에는 △신용불량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여부 △중소기업 살리기 △내수 침체 등의 이슈도 줄줄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에 원 의원을 비롯한 소장파는 “여권이 제기하는 이념성 쟁점에 그때그때 대응하더라도 이와 별개로 경제·민생 이슈와 관련한 정책토론회, 현장 방문 등의 경제 프로그램을 활발히 가동하자”고 당내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원 의원의 표현에 따르면 “한나라당 내 경제 전문가들은 (고작해야) 정부의 경제정책이 좌파라고 비난하는 성명서 내기, 외교안보 전문가는 정책 내용의 타당성 논쟁이 아니라 현 정부가 마치 당장 북한과 내통해 나라를 팔아먹을 듯한 기세로…” 주로 정치 공세를 벌였다.

“행정수도 졸속 찬성한 적 없다”

그러던 끝에 당내에서 소장파는 어느덧 소수로 몰렸으며 강경보수파가 주도권을 회복해갔다. 또 애초 ‘비판적 지지’ 관계로 출발한 소장파와 박 대표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원 의원은 국가 정체성 논쟁을 한창 벌이던 박 대표에게 “그러한 논쟁은 정치를 후퇴시키는 후진 기어”라며 수위 조절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표는 ‘국가 정체성을 따지는 것은 정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원 의원은 “싫은 이야기를 자꾸 하니까 박 대표가 좋아하지 않더라”고 말했다.

원 의원은 신행정수도 문제도 “외교안보 기관의 이전을 재검토하고 애초 상정한 예산 규모에서 추진한다”는 전제로, 행정수도 이전 조건부 찬성론에 섰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이 16대 국회에서 행정수도추진특별법에 찬성할 때 총선 충청표를 계산해 졸속으로 찬성했기 때문에 반성하고 번복한다고 지도부는 말한다”며 “그러나 나는 16대 국회 표결 당시부터 졸속으로 찬성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16대 국회 표결 당시의 취지대로 정부가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라고 주문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칙론에 그가 섰던 셈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소속 의원 121명 가운데 같은 견해는 그를 포함해 소장파 5명에 불과했다. 더욱이 수도권과 한나라당 지지자를 중심으로 비등한 행정수도 반대여론 때문에 그는 지역구(서울 양천갑)에서도 궁지에 몰렸다. 그는 “16대 국회 때도 소신껏 찬성 투표한 만큼 이번에도 소신을 유지하는 게 당연했다”며 “(정 그게 문제가 되면) 의원직 그만두면 될 것”이라는 ‘배짱’으로 버텼다고 했다.

그를 비롯한 수요모임 의원들은 국가보안법의 대폭적인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현행 보안법 2조 정부참칭 등 핵심 독소 조항 삭제를 적극 검토하되, 북한 공작원 활동을 규제하려면 현행법의 몇 가지 요소는 남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원 의원은 “열린우리당은 보안법 폐지 뒤 형법 보완 안으로도 공작원 활동을 규제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무리한 법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주류는 보안법의 일부 자구만 고치는 소폭 수정을 검토 중이다. 따라서 소장파들의 대폭 개정론은 주류의 그것과 현격히 다르며, 오히려 취지에선 인권단체와 비슷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원 의원이 텔레비전 토론에서 보안법과 관련해 전향적 발언을 한 것을 두고, 당내 보수파인 김용갑 의원은 “최고위원을 사퇴하든지 당을 떠나라”고 쏘아붙였다. 이에 원 의원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며 갈등을 관리해가는 게 선진 시스템”이라며 “생각이 다르다고 적으로 구분해 밀어붙이고 이에 서러우며 더럽다고 입을 닫아버리는 게 군사문화의 잔재”라고 논박했다.

“좌파 논쟁 제기 중단” 제안

그를 비롯한 소장파 20여명은 소폭 수정으로 당론이 정해지더라도, 자신들의 보안법 개정안을 독자적으로 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다. 원 의원은 “우리 사회에 기존 보안법에 따른 상처가 큰데도 ‘손톱만 깎고 가자’는 정도의 당론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박 대표에게 직접 그리고 당내 전반을 향해 “좌파 논쟁 제기를 중단하자”고도 제안했다. 그는 “좌파 공세는 상대방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는 증오와 대결의 정치”라며 “국민들을 배부르게 한다면 좌파면 어떻고 우파면 어떤가? 정책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박 대표의 최근 연이은 ‘좌파 문제제기’를 두고 “박 대표가 한계를 못 벗어난다. 확실히 아웃 오브 데이트(구시대적)”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원 의원도 한나라당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긴 어려울 것 같다. 7·19 전당대회에서 그를 ‘2위 최고위원’으로 뽑아준 ‘당심’이, 소수파 리더 또는 당내 트러블 메이커에나 머물라는 뜻은 아니었던 탓이다.

원 의원도 “당을 변화시키는 엔진이 되겠다고 약속한 만큼 오늘의 현실에 나도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내 비판자 또는 문제제기자 수준이 아니라 좀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했어야 한다고 자성한다”며 “박 대표와 한나라당에 의사소통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한번 이야기해 안 되면 열번, 공식 회의에서 안 되면 인간적 차원에서 다시 설득한다는 자세로 더욱 열심히 뛰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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