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민노당에 칼바람이 분다?

등록 2004-06-11 00:00 수정 2020-05-03 04:23

비당권파 전국연합 계열이 최고위원회 장악… 대대적 인사개편 속 원내-원외 따로 갈 가능성도

허종식 기자/ 한겨레 정치부 jongs@hani.co.kr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지난 6월6일 열린 당대회에서 판갈이됐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가 펴졌습니까”라고 물어 인기를 끌었던 권영길 대표 체제가 2000년 1월30일 창당 이후 4년5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광고

그러나 그냥 지도부가 바뀌었다고 하기보다 완전히 판갈이됐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지금까지 비당권파였던 전국연합(범NL) 계열이 당 최고 집행기구인 최고위원회를 거의 장악했기 때문이다. 기존 정당으로 치면 주류가 모두 물러나고 비주류가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차지한 셈이다. 당 대회장이었던 서울 리틀엔젤스회관에서는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너무 한쪽으로 쏠렸다. 너무 심했다”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민노당 최고위원회는 당 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의원단 대표와 여성 부문 4명, 남성 3명, 노동·농민 부문 각각 1명 등 모두 13명으로 구성되는데, 이번 선거 결과 8~9명이 전국연합 계열이거나 이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광고

13명 중 8~9명… 너무 쏠렸다?

기존의 당권파는 김혜경(59) 대표와 천영세(61) 부대표 정도다. 당권파인 범좌파(범PD 계열)는 김종철(34) 당 대변인이 유일하게 경선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민노당 안에서는 지난 대통령 선거, 총선 등을 거치면서 당권 장악 필요성을 느낀 전국연합 계열이 이번 선거에서 총력전을 편 반면, 당권파는 느슨하게 선거전에 나선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선거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권파이던 진보정당추진위 등 범좌파의 몰락은 확연히 눈에 띈다.

광고

우선 김혜경 대표는 민노당의 3대 축인 민주노총, 전국연합, 진보정당추진위 등 각 의견그룹한테 고른 지지를 받았다. 각 정파들은 대표 대결을 서로 피했다. 김 대표를 관리형 대표로 서로 인정한 셈이다. 김 대표는 권영길 전 대표, 천영세·노회찬 의원 등과 함께 그동안 당 지도부로 활동해왔다. 김 대표는 당내에서 빈민운동의 대모로 불린다. 또 포용력이 있어 당직·공직 금지로 분리된 당 지도부와 의원단의 중재에도 제격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당내 의견그룹의 힘겨루기는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선거 등에서 불을 뿜었다.

“민노당이 국민·수권 정당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국연합 계열은 김창현 울산시지부장과 이용대 경기도지부장을 사무총장과 정책위의장 후보로 밀었다. 반면, 노동자·농민 중심의 당 계급성에 무게를 더 두는 진보정당추진위 등 범좌파 그룹은 김기수 대구시지부장을 사무총장에, 정책위의장에는 주대환 경남 마산갑지구당 위원장을 후보를 출전시켜 치열한 맞대결을 벌였다.

투표 결과는, 일단 전국연합 계열의 완승이었다. 김창현 신임 사무총장은 전체 투표자 가운데 57.01%인 9481표를 얻어, 6825표(41.04·%)를 얻은 김기수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렸다. 정책위의장 선거도 이용대 후보가 6686표(40.21%)를 득표해 1위, 4882표를 얻은 주대환 후보가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과반 득표자가 없어 오는 12~16일 결선 투표로 승부가 연장됐다.

4명을 뽑는 여성 부문 최고위원 선거에서는 전국연합 계열과 민주노총 국민파 등이 지지하는 것으로 당 홈페이지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김미희(38) 성남 수정지구당 위원장, 이정미(38) 이라크 파병 본부장, 유선희(38) 서울청년단체협의회 의장, 박인숙(39) 민노총 여성위원장이 모두 뽑혔다. 3명을 뽑는 남성 부문도 전국연합쪽에서 지원한 최규엽(51) 자주통일위원장, 이영희(42) 민노총 초대 부위원장이 당선됐고, 김성진 인천연대 공동대표는 아깝게 떨어졌다. 반면, 김종철 당 대변인이 가까스로 턱걸이했다.

“대규모 당직 인사 불가피” 시각 우세

김 대변인은 “내가 당선된 것은 조직적인 표보다는 당 대변인으로 방송, 신문 등을 통해 많이 알려진 인지도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민주노총 안에도 중앙파, 국민파, 현장파 등의 다양한 의견그룹이 있다.

노동 부문 최고위원인 이용식(50) 민노총 정치위원장, 농민 부문인 하연호(51) 김제·완주 지구당위원장은 찬반 투표로 뽑혔다. 따라서 이번 최고위원 선거에서 당권파는 김종철 당 대변인 1명만 당선되는 참패를 당한 셈이다. 중앙당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 인물 다수가 최고위원에 뽑힌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선거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서울 여의도 민도당사에서는 “중앙당 인사에 칼바람이 불 것이다. 소수파를 배려하기 위해 도입한 최고위원제의 의미가 없어졌다”며 당의 앞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반면, 노선이 같은 팀이 책임을 지고 당을 운영해 2년 뒤에 평가를 받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처지와 노선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른 것이다.

또 당 지도부의 세력 판도가 바뀌면서 민노당은 앞으로 당의 노선 등을 둘러싸고 상당한 내부 갈등도 예상된다. 당 조직 등을 장악한 전국연합 계열쪽에서는 이라크 파병 반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포함한 미국 문제 등을 우선 순위로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의원단과의 갈등 요소다. 당 정책 등을 입법하는 과정에서 지도부와 의원단의 갈등도 예상된다. 민노당은 당 중심이어서 입법 우선 순위 등을 놓고 당 지도부와 의원단의 견해가 갈릴 경우 원내와 원외가 각각 따로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권영길 전 대표는 “의원단과 지도부가 연석회의를 정기적으로 열어 현안 등을 협의해 결정할 것”이라며 “의원단 대표가 당 지도부 회의에 참석하고 당 대표가 의원단 회의에 들어오는 등 수시로 만나 서로 의견을 교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전국연합 계열이 당을 장악한 것과 관련해 “특정 정파가 많다고 해서 그쪽으로 휩쓸려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너무 걱정 말라”고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전국연합 계열과 범좌파는 노선이 달라 언제든지 갈등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내부적으로 전국연합쪽은 수권정당이 되려면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보다는 민족자주당 등이 더 현실적이라는 주장까지 할 정도이고, 범좌파는 당이 북유럽식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는 등 당 노선을 놓고 늘 갈등해왔다.

조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 가능성도 있다. 새 지도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창당 이후 비당권파인 전국연합 계열이 처음으로 당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대폭적인 당직 인사가 불가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민노당 중앙당사에서는 벌써 “칼바람이 불 것”이라는 말이 나돈다.

김혜경 대표의 합리적 중재력 기대

다만, 민노당 관계자들은 김 새 대표와 사무총장이 정치력을 발휘하면 당내 논쟁은 가열되더라도 당은 큰 어려움 없이 갈 것이라는 전망도 하고 있다. 즉 전국연합, 진보정당추진위, 민주노총 등 민노당의 주요 정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김 새 대표가 합리적인 정치력을 발휘하면 모두 분열을 원치 않는 만큼 승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김창현 신임 사무총장도 당의 분열을 의식한 듯 “힘을 가진 쪽이 양보해야 한다”며 “전국연합 계열이 지도부의 다수를 차지한 만큼 통합의 정치력을 발휘하겠으니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김배곤 부대변인은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민노당은 공직·당직 금지로 원내와 원외로 나뉘어져 당을 운영해야 하는 커다란 정치 실험과 함께 한국 진보정당의 새로운 유형을 창출해나가야 할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이번에 뽑힌 지도부는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둔 2006년 3월 임기가 만료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