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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 · 노회찬을 배제하라?

등록 2004-05-14 00:00 수정 2020-05-03 04:23

당직 · 공직 겸직 금지한 민주노동당의 상식파괴… ‘풀뿌리 정당’으로 가는 길엔 장애물 수두룩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민주노동당은 5월6일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향후 민주노동당 정치를 점쳐볼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과거 우리나라 정당에서 시도된 적이 없는 낯선 방식이다. 그래서 신선하기는 하지만, 지난 4·15 총선에서 13% 정당득표율(227만4천여표)로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의 성장에 촉진제가 될지 장애물이 될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공직·당직 겸직 금지 조항이다. 권영길 대표나 노회찬 사무총장 등을 비롯한 10명의 당선자가 민주노동당 지도부에서 배제되고 새로운 인물들로 새 지도부를 구성하게 된다는 얘기다. 당선자 10명은 의원단을 구성하고 이 중 1명만 의원단 대표 자격으로 지도부(최고위원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

“의원의 당 아닌 당원의 당 만들겠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대통령이 여당의 총재직을 맡아 당을 좌지우지했고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정당의 지도부가 국회의원들로 채워져온 관례에 비춰보면, 민주노동당의 이번 결정은 파격적이며 일반인들의 상식과도 거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선 민주노동당이 어떤 이유에서 겸직을 금지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국회의원들의 당이 아닌 당원의 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단순히 진보적인 주장을 하는 ‘전문정치인의 동아리’가 아니라 풀뿌리 민중이 정치의 주인이 되도록 정치의 형식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내활동과 언론의 주목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국회의원이 당직까지 겸할 경우엔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국회의원이 의정활동에 주력하도록 효율성을 고려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이유다.

이런 결정에 대해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엔 “민주노동당답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다수였지만, “지나치게 원칙적”이라는 비판의 글도 눈에 띄었다. “한심한 결정”이라고 비판한 이는, ‘노회찬식 어법’을 빌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을 임대 계약기간이 다 되었다고 해체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했다. 파리에 에펠탑이 사라지면 무슨 재미로 파리에 가고 싶겠느냐”고 말했다.

중앙위원회에서 이같이 결정할 당시 당 대표에 한해서는 겸직을 허용하자는 수정안이 근소한 차이로 부결될 정도로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주노동당쪽은 결정 이후 원칙을 지켰다는 데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권영길 대표의 빈자리를 누가 메우느냐가 관심사다. 민주노동당은 과거 원외정당일 때와는 달리 현실적인 힘을 갖게 된 만큼 민주노총과 전농 등 당내 일정한 지분이 있는 여러 세력들의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선출직 대의원과 부문별(노동·농민·빈민·학생 등) 대의원의 비율, 부문별 대의원 내의 구성 비율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념적 스펙트럼 면에서 보면 다른 정당들에 비해 그 폭은 적지만, 노선상의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격렬한 양상을 띤다. 당 지도부와 의원단의 원활한 관계 유지는 물론, 민주노총·전농 등 여러 세력들을 통합·조정해야할 새 대표의 역할은 더욱 커졌지만, ‘포스트 권’ 체제를 끌어갈 새 대표로 부상하고 있는 주자는 뚜렷하지 않은 실정이다.

중앙위원회 결정 가운데 눈여겨볼 또 하나의 대목은 의원단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의원단은 최고위원회의 방침에 따라 원내활동을 집행한다”고 규정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원내정당을 지향하는 반면, 민주노동당은 의원 개개인의 능력과 소신보다는 당의 방침을 우선하는 중앙당 중심을 분명히 한 것이다.

독일 녹색당 내부갈등의 교훈

이는 1983년 독일 녹색당이 원내에 처음 진출했던 당시 당원·지도부(Basis)와 의원단(Fraktion)의 관계를 참조한 것인데, 운영 방식에 따라서는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최고위원회와 의원단의 현실 진단과 정책 방향에 차이가 없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반대의 경우엔 사정이 달라진다. 지도부와 의원단간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한다고 해도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극과 극을 오가는 혼란을 반복할 수도 있다.

녹색당의 경우 당 지도부에 해당하는 연방운영위원회가 의정활동에 대한 결의안 통과권을 가지면서 연방운영위와 의원단 두 기관의 갈등이 지속되다 1980년대 후반 ‘정당 결의를 집행하는 방식은 의원단의 재량’이라는 쪽으로 결론지어졌다. 당시 성폭력에 관한 최소형량을 어떻게 하느냐를 두고 의견 차이가 발생했는데, 중앙당은 2년을 결정해 의원단에 이를 관철시킬 것을 통보했지만 의원단 내 다수의원들이 이를 거부하고 사민당(SPD)과의 협력 관계를 고려해 최소형량 1년이라는 현실적인 타협안을 고수했던 것이다. 원외활동과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근본주의자’ 당원들이 언론을 통해 “의원단은 더 이상 당원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실을 만큼 갈등은 극에 달했다. 2002년 선거 이후 녹색당이 사민당과의 연정에 참여하자 근본주의자 당원들은 당을 떠나 시민사회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우리와는 정치환경이 다르고 20여년 전의 독일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참조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종철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당시 녹색당 지도부는 이른바 생활정치인들로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르고 민주노동당 의원단은 원내활동에서 상당한 자율권을 갖게 될 것”이라며 “결국 당이 어떤 식의 의사결정구조를 갖느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정치를 하느냐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민주노동당의 핵심 당원과 지지자들이 이러한 의사결정구조를 바람직한 결정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지난 총선에서 지역구 투표와 정당투표를 달리했던 상당수의 ‘관망적 지지자’들에게도 호응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5월6일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것은 부문별 대의원 비율 문제였다. 중앙당은 현재 30%인 민주노총의 비율을 20%로 줄이고 3%인 전농의 비율을 10%로 올리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30:15안과 20:10안 모두 부결됐다. 결국 당 지도부에 결정을 위임했지만 정기 당대회를 불과 20여일 앞두고도 대의원을 확정짓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또 13명의 최고위원중 대표·사무총장·정책위원장·의원단대표와 노동과 농민쪽의 부문별 최고위원 6명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의 최고위원(여성 4명과 일반 3명)을 1인7표제 방식으로 결정한 것도 논란거리다. 당원의 40% 가량을 점하고 있는 민주노총 당원들이 조직투표를 할 경우 7명 모두를 ‘독식’할 수 있는 제도적 폐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전체 당원·지지자와 당 지도부의 정치적 의사가 엇갈린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당정치의 본래 의미에 충실한 구조이기는 하지만, 아직 튼튼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에서는 왜곡될 소지도 있는 셈이다.

“김석준 교수 · 권영길 대표가 중책” 관측 우세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시스템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고는 있지만, 당분간은 당 대표와 의원단 대표 등 주요 인사들의 정치적 역량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당 안팎에서는 지난 2002년 부산시장에 출마해 17% 가량 득표했던 김석준 부산대 교수와 권영길 대표가 중책을 맡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우세하다. 당 대표는 5월24일 이후 인터넷 등을 이용해 당권이 있는 당원 2만6천여명의 투표에 의해 5월29일 당 대회에서 발표된다. 의원단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선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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