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에 마모된 어머니의 '믿지 못할' 젊은 시절에 보내는 편지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생활부 dmsgud@hani.co.kr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여성으로서 자의식이 싹틀 무렵 딸들은 ‘무성’(無性)의 종족이라 여겨지는 엄마를 향해 외친다. 그러나 그 어떤 딸도 엄마가 살아온 삶을 온전히 알 수 없으며 실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수줍음을 잃어버린 중년의 억센 여성에게도 머뭇거리는 스무살 시절이나 두근거리는 첫사랑이 있었을 거라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로 데뷔한 박흥식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는 있어도 있지 않은, 존재했을지라도 믿어지지 않는 어머니의 스무살 시절에 보내는 따뜻한 포옹의 편지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믿어지는 우렁찬 목소리에 늘 거친 욕을 달고 살며, 500원짜리 동전 하나 때문에 머리채를 휘어잡고 드잡이를 하는 목욕탕 때밀이 엄마 연순(고두심)이 딸 나영(전도연)은 너무 혐오스럽다.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다”거나 “절대로 가족을 만들지 않겠다”는 나영의 말은 속 좁은 소녀의 징징거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억센 엄마와 주검처럼 무기력한 아버지를 잠시 떠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나영의 뉴질랜드 교육연수를 코앞에 두고 아버지는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채 집을 나간다. 어수선한 마음의 나영이 비행기를 내린 곳은 뉴질랜드가 아닌 한국의 오래된 시골마을. 여기서부터 영화는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며 나영은 스무살 시절의 연순과 스물셋의 풋풋한 총각 진국(박해일)이 나누는 은근한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
에서 현실과 판타지, 현재와 과거는 어둠과 빛처럼 극명하게 대비된다. 수치심이나 교양이라고는 전혀 없는 엄마와 유령처럼 멍하니 텔레비전 앞에서 담배만 피우는 아버지. 단절이라는 말조차 고상하게만 느껴지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 이 지경이라면 자식은 무슨 악연으로 두 사람은 결혼을 했는지 무책임하게 아이는 왜 ‘싸질러’ 낳았는지, 왜 이혼을 하지 않는지 나영처럼 답답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조실부모하고 어렵사리 동생을 키우던 스무살 엄마가 우체부 진국 앞에서 머뭇거릴 때, 순한 청년이었던 아빠(진국)가 공책과 연필을 엄마(연순)에게 안기면서 한글 선생이 되기를 자처할 때 나영은 부모의 빛나던 20대 시절을 찾아낸다. 이 발견을 통해 나영은 마모되고 바랜 이십여년의 세월을 긍정하게 되고, 그 결과와는 무관한 삶의 힘을 낙관하게 된다.
물론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 엄마는 여전히 아픈 아빠를 타박하고 욕과 침을 동시에 내뱉는다. 그러나 과거에서 돌아온 나영은 전과 다르게 엄마가 보여주는 그악스러움의 행간을 읽는다. 의 미덕은 판타지를 통해 현실의 가짜 화해를 만들거나 애써 구원의 암시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전도연과 박해일, 그리고 중견배우 고두심의 연기 같지 않은 연기 호흡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이 영화의 진심을 더욱 돈독하게 함은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꽃다운 청춘과 거칠고 앙상한 중년을 단순 대비하면서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투로 과거와 현실을 쉽게 봉합하려는 점은 지나치게 소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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