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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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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기업 진로’ 가능한가

등록 2003-09-25 00:00 수정 2020-05-03 04:23

‘진로살리기 국민운동’ 이 국민기업화 추진 공식 선언…법정관리 소송이 가장 큰 장벽

부도난 대우자동차 매각 작업이 한창이던 지난 2001년 2월 ‘대우차 국민기업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최각규 전 부총리 등이 주도한 대우차 국민기업추진위원회는 당시 ‘300인 발기인 대회’까지 열고 대우차를 ‘국민기업’으로 회생시키는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시중은행에 대우차 주식신탁예금 계좌를 만들어 일반 국민을 상대로 1조원의 기금을 조성한 뒤 별도의 ‘클린 컴퍼니’를 세워 주식을 나눠준다는 야심찬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채 대우차 처리가 GM(제너럴모터스) 인수로 결론나면서 끝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국 사회에 ‘국민기업’이란 말이 본격 등장한 것은 사실 그 이전인 1997년이었다. 기아자동차 부도사태 당시 ‘기아 살리기 범국민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은 “기아는 재벌 사기업과 달리 ‘국민기업’이다. 온 국민이 나서서 기아를 살리자”고 주장했다. 기아는 오너 없는 전문경영인 체제인데다 소유가 비교적 분산돼 있기 때문에 국민기업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 운동 역시 일부의 주장에 그쳤을 뿐, 폭넓은 국민적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800억원 국민주 공모

그리고 2003년, 부도난 국내 간판 소주업체 (주)진로의 회생방안을 놓고 국민기업화론이 다시 등장했다. ‘진로살리기 국민운동’(이하 국민운동)이 최근 진로의 국민기업화 추진을 공식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국민운동은 최학래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정구영 전 검찰총장, 김형태 변호사 등 12명의 상임위원이 이끌고 있으며, 국회와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16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물론 상법에 국민기업이란 개념은 따로 없다. 국민운동이 제시한 ‘국민기업 진로’ 창업 방안은 크게 세 가지로 △국민주 공모와 국내 투자자를 통한 기업자본 모금 △감독이사회 구성을 통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기업이익의 20% 사회 환원을 통한 국민기업화다. 단순히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기업”이란 뜻의 정서상의 국민기업이 아니라 기업 소유지배구조를 탈바꿈시킨다는 것이다. 국민운동 이광렬 사무국장은 “진로 국민기업화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국민기업 모델을 만드는 실험적인 시도”라고 말했다. 과연 진로는 국내 ‘국민기업 1호’로 회생할 수 있을까?

진로 국민기업화의 뼈대는 국민주 공모에 있다. 국민운동은 기존 진로주식을 모두 소각한 뒤 진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반 국민을 상대로 국민주를 공모해 800억원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운동쪽은 “지난 5월 골드만삭스가 진로에 대해 전격적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부터 진로를 외국 투기자본으로부터 살려야 한다는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며 “국민들을 상대로 진로주식 1주, 10주씩 갖기 운동을 벌이면 폭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는 술 제조업체인인 만큼 기업 이익 중 일부를 사회에 돌려주겠다는 구상도 국민기업화 모델의 한 축이다.

국민운동쪽은 특히 소비자와 시민사회단체 등 이해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감독이사회와 감사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해 사회적 기업으로서 진로의 경영투명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기존 진로 경영진이 이사회를 장악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지배구조 개편은 옛 진로 경영진(장진호 전 회장 체제)의 진퇴 문제와 직접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다. 국민운동쪽은 일단 ‘부실기업주’인 장 전 회장이 경영권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을 전제로 국민기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민운동쪽은 장 전 회장이 자신이 보유한 진로 주식지분 8.1%를 포기하고 국민운동쪽에 위임했다고 밝혔다. 장 전 회장한테 넘겨받은 대주주 지분을 바탕으로 앞으로 국민운동쪽이 진로 회생작업을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진로의 경영 정상화를 꾀하고 국민기업화를 추진하려면 일단 1조9천억원에 달하는 채무를 청산해야 한다. 국민운동쪽은 진로가 갖고 있는 각종 자산을 팔고 국민주 공모를 거치면 모든 채무를 일시에 변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민운동은 △진로재팬 매각(6천억원) △석수사업 매각(600억원) △진로발렌타인스 지분 매각(900억원) △진로의 추후 현금보유 예상액(3천억원) 등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채무상환 계획을 제시했다. 여기에다 국민주식(800억원)과 국내 투자자들로부터의 펀딩(1700억원)을 통해 2500억원을 추가로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이렇게 조달한 자금으로 채무를 한꺼번에 갚고 국민기업으로 새 출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 전 회장과의 관계 어떻게 하나

그러나 실현 가능성을 점치기는 아직 어렵다. 국민운동쪽은 수백명에 이르는 개인과 법인한테서 총 4743억원에 이르는 투자의향서를 이미 접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투자의향서 가운데 2천억원 정도는 지난 97년 부도사태 이후 장 전 회장 등 옛 진로 경영진쪽이 필사적으로 자구 노력을 진행하면서 주변사람들한테 받아놓은 물량이다. 게다가 국민운동 발기인 가운데 예전부터 장 전 회장쪽과 인연을 맺고 있던 사람도 상당수 포함돼 있는 것을 알려진다. 장 전 회장과의 연결고리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지가 국민기업화 추진 과정에서 핵심 문제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광렬 사무국장은 “투자의향서를 낸 사람 가운데 실제로 국민기업화가 본격 추진되면 투자를 거부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며 “장 전 회장과 직접 관련된 성격의 투자자는 국민운동쪽이 일부러 배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운동쪽이 진로를 국민기업 형태로 바꾸는 작업을 마음대로 추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진로를 둘러싼 다수의 이해관계자들(법원·채권자·진로 임직원 등)이 안팎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골드만삭스를 비롯해 국내외 채권자들과 법원의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업계에서는 “장 회장의 지분은 채권은행에 담보로 제공돼 있기 때문에 재산권 행사가 불가능하다”며 “국민운동쪽이 무슨 권리로 국민주를 발행하고 자산매각 작업에 나설 수 있겠느냐”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국민운동쪽은 “지금은 비록 장 전 회장의 지분 8%가 휴짓조각이지만 채무 변제가 이행되면 이 지분이 되살아난다”며 “진로가 자체 보유한 주식 48%와 장 전 회장의 지분 8%를 합치고, 상장 폐지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갖고 아직까지 진로 주식을 들고 있는 소액주주들을 한데 모으면 경영 의사결정(자산 매각·국민주 공모 등)을 주도하면서 정상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로 임직원들은 말 아껴

하지만 ?로의 국민기업화로 가는 길에서 맞닥뜨릴 가장 변수는 이달 안에 내려질 법원의 법정관리 항고심 결정이다. 국내 화의(부도기업을 파산시키지 않고 채권자들의 동의 아래 채무변제계획안에 따라 회생을 도모하는 제도)기업 1호인 진로는 지난 5월 최대 채권자인 골드만삭스가 법정관리를 신청해 화의가 전격 취소됐으며, 이에 반발한 진로가 항고를 제기해놓은 상태다. 만약 법원이 법정관리를 철회하고 진로가 화의절차로 돌아간다면 국민기업화 운동이 힘을 받게 된다. 화의 상태에서는 채무자가 자기 재산에 대한 관리처분권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정관리가 그대로 지속된다면 국민기업화 추진은 당장 커다란 벽에 부닥치고 만다. 법정관리 상태에서는 장 전 회장 등 기존 경영진의 지분이 소각되고 경영권이 박탈되면서 진로 처리가 법원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그 뒤 ‘회생형 법정관리’ 또는 ‘청산형 법정관리’로 갈 수도 있고, 골드만삭스가 보유 채권을 출자전환해 최대주주로 부상한 뒤 제3자 매각에 나설 가능성도 높다. 국민운동쪽이 운동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운동쪽이 이번에 국민기업화 방안을 재판부에 전격 제출하고 기자 설명회를 연 것은 법정관리 철회를 위한 여론몰이 성격이 짙다.

국민운동쪽의 의욕과 달리, 정작 진로 임직원들은 국민기업화 방안에 대해 말을 극도로 아끼고 있다. 진로 홍보팀의 전영태 차장은 “저쪽(국민운동)이 시민운동 차원에서 국민기업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인데, 여러 민감한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공식 입장을 밝히기는 어렵다”며 언급을 회피했다. 장 전 회장의 거취 문제가 걸려 있는데다 국민기업화 외에도 진로 회생을 위한 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도기업이지만 ‘참이슬’의 대활약에 힘입어 국내 소주시장의 54%를 점유하면서 해마다 1천억원대의 영업이익을 내고 있는 진로. 이런 막강한 브랜드 파워를 보유한 기업이기 때문에 굳이 국민기업이 아니라도 회생할 길이 있다는 것일까?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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