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동이 트지 않은 5월22일 새벽 4시. 주민들이 초고압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농성 중인 경남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 들머리 움막에 불이 들어온다. 움막에서 잠을 잔 할머니들이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친 할머니들의 표정에는 마치 전투를 앞둔 군인처럼 비장감이 넘친다. 각자 자신의 전투용품을 챙긴다. 태양을 가릴 모자, 마스크, 장갑, 등산화, 마지막으로 힘없는 자신들을 보호할 최후의 보루 똥물이 담긴 플라스틱병을 두세 개씩 앞치마에 담고 트럭 짐칸에 몸을 싣는다.
화악산 500여m에 위치한 127번 송전탑 건설현장. 할머니들은 건설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공사를 막기 위해 끈으로 서로 몸을 묶고 굴착기 주변을 둘러싼다. 아침 8시가 되자 경찰과 한국전력 직원들이 들어온다. 한전 직원 30여 명이 할머니들 주위를 에워싸고 주변에서는 인부들이 전기톱을 이용해 벌목을 한다. 한전 직원들은 20여 분씩 돌아가며 교대를 하지만 할머니들은 그늘도 없는 30℃가 넘는 뙤약볕 아래에서 농성을 이어간다. 점심은 주먹밥으로 때우고 보는 눈이 많아서 용변을 보기도 힘들다.
상황을 지켜보던 기자들과 국가인권위원회 직원들이 모두 빠져나간 오후 2시, 한전 직원들이 할머니들을 1명씩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할머니들은 준비한 똥물을 뿌리며 온몸으로 저항한다. 힘없는 할머니들은 속절없이 끌려나간다. 악에 받쳐 한전 직원들과 경찰을 향해 울부짖는다. 몸싸움을 하던 할머니들이 실신해 쓰러진다. 윗옷을 벗고 경찰과 한전 직원들에게 격렬하게 항의한다. 아수라장이다. 할머니, 한전 직원, 경찰이 뒤섞인 ‘전쟁’과 같은 상황이다. 한전 직원들과 경찰은 할머니 3명이 앰뷸런스에 실려 후송되고 나서야 철수한다. 급하게 도움을 주러 달려온 주민과 할머니들은 한전 직원들과 경찰이 빠져나가고 바람에 쓰레기만 날리는 공사현장에 허망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몸싸움에 지친 할머니들은 눈물도 나지 않는다.
한전은 대선 앞뒤로 중단됐던 송전탑 건설을 8개월 만에 재개했다. 밀양시 부북면·산동면·산외면·단장면 4개 면에 걸쳐 있는 7개의 송전탑 건설현장에서는 127번 송전탑과 같은 상황이 매일 일어난다. 70~80살에 이르는 주민들은 새벽 3~5시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을 오른다. 거의 산 정상에 위치한 송전탑 공사현장의 굴착기·자재들과 몸을 쇠사슬로 묶고 30℃에 이르는 뙤약볕 아래서 농성과 노숙을 벌이고 있다.
127번 송전탑으로 가는 산길을 지키고 있던 김길곤(82)씨는 “지난해 1월 이치우씨가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을 했다. 지금 마을 주민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모두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도가 높고 경사가 가파른 공사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할 것을 주민들은 걱정했다. 한옥순(66)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살인자입니까? 도둑입니까? 우리가 살던 곳에서 계속 살고 싶습니다. 목을 달아매고, 죽어서라도 막을 거예요.” 격렬한 대치가 이어지자 한전은 기자회견을 열어 태양광밸리 사업, 선로 인접 지역 주거환경 개선, 주택 이주 등과 같은 지원안을 발표했다. 정부와 한전은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3호기와 연결되는 밀양 송전탑 구간이 올해 겨울까지 완공되지 않으면 전력난과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계속 공사를 강행할 태세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는 ‘주민들은 보상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공사를 중단하고 협의체를 만들어 대화하자’ ‘주민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사고에 대한 공포감이 짙어진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무더위가 다른 해보다 일찍 시작된다는 올여름, 정부와 한전에 의해 ‘전쟁터’에 떠밀리고 있는 할머니들의 안전이 걱정된다.
밀양=사진·글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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