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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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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감겨온 장터 미용실

김제 원평장에서 45년째 영업 ‘서울 미용실’… 호박·오이로 요금 내는 할머니들의 사랑방
등록 2009-09-17 14:45 수정 2020-05-03 04:25
닷새마다 장이 서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장평리의 45년 된 ‘서울 미용실’은 할머니들의 쉼터이자 사랑방이다. 나란히 앉아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떠들다 보면 눈 깜짝할 새 장날의 하루가 다 간다.

닷새마다 장이 서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장평리의 45년 된 ‘서울 미용실’은 할머니들의 쉼터이자 사랑방이다. 나란히 앉아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떠들다 보면 눈 깜짝할 새 장날의 하루가 다 간다.

허리가 아직도 꼿꼿해서 부러움을 사는 80대 할머니가 한마디 한다.

“허리가 꼬부라지면 차라리 안 아프다던디?”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받는다.

“허이고, 안 아픈 사람은 좋겄네? 난 아파 죽겄는디. 어제도 꼬치 따다 허리 아파 죽겄어서 얼매 못혔어.”

“근데 올해는 꼬치 꼭대기가 잘 따지데. 요로케 잡고 훽 하니까 쏙 하고 빠지더만….”

머리 풀기를 기다리던 다른 할머니가 고추 농사로 화제를 돌리자 이내 실내는 농사 얘기로 돌아간다.

미용실 출입구를 열고 들어가는 할머니.

미용실 출입구를 열고 들어가는 할머니.

자신이 지은 농산물로 요금의 일부를 내는 할머니.

자신이 지은 농산물로 요금의 일부를 내는 할머니.

4일과 9일 닷새마다 열리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장. 원평시장 한가운데 주단 가게와 나란히 서 있는 미용실에는 간판도 없다. 그냥 허름한 이층집의 1층 한 귀퉁이를 차지한 출입문 유리창에 적힌 ‘서울 미용실’이란 페인트 글자가 이 집이 미용실임을 알게 하는 전부다.

이곳에서 45년 동안 미용실을 운영해온 박계순(67)씨도 어느덧 할머니가 됐다. 주인과 손님이 같이 늙어간다. 미용실 이름이 왜 서울 미용실인지 물어보자 정확한 이유가 없단다. 그냥 예전에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일하던 미용실이 ‘서울 미용실’이어서 딱히 다른 이름이 생각이 안 나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시에서 정해준 가격표를 붙여놓긴 했지만, 할머니들이 주는 대로 받는다. 돈이 없으면 호박이나 오이 등으로도 받기도 한다. 할머니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박씨의 노하우는 머리를 최대한 뽀글뽀글하게 말아주는 것. 물론 쉽게 안 풀리기 때문에 할머니들이 좋아한단다.

한창 바쁜 시간에 커트 손님은 직접 머리를 감기도 한다.

한창 바쁜 시간에 커트 손님은 직접 머리를 감기도 한다.

완성된 머리를 보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완성된 머리를 보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원평장을 찾은 할머니들에게 이 미용실은 참새들이 찾는 방앗간과 같다. 장터에 와서 제일 먼저 병원 예약을 하고는 머리를 하든 안 하든 곧바로 이곳을 들른다. 이른바 원평장터의 할머니 쉼터인 셈이다. 모처럼 파마를 한 할머니가 수건을 뒤집어쓴 채 병원도 가고 생선 가게도 간다. 장터를 돌고 나면 다시 미용실에 들러 중화제를 바른 뒤 마무리를 한다.

얼마나 얘기가 돌고 돌았을까? 느닷없는 아들 자랑이 이어지더니 이윽고 상대방이 한 머리에 대한 품평을 한다.

“아따 예쁘게 됐네. 이이는 나이를 먹덜 안 혀. 나가서 영감 하나 사도 되겄구만.”

눙치는 말이 나오자 거울을 보던 할머니가 싫지 않은 듯 대꾸를 한다.

“아, 영감 사서 어따 쓰게? 시상 구찮하게.”

말이 끝나자마자 까르륵 하는 웃음보가 터진다. 닷새마다 모이는 할머니들의 사랑방엔 즐거움이 가득하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주는 주인 박계순씨.

머리에 수건을 둘러주는 주인 박계순씨.

김제=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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