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31일 경기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를 찾았다. 집집마다 노란색 천에 빨간 글씨로 ‘훈련장 반대’가 쓰인 깃발이 나부끼고 ‘주민 죽이는 훈련장 확장계획 즉각 중단하라’ ‘두 여중생 죽인 무건리 훈련장 확장이 웬 말이냐’ 등의 펼침막도 눈에 들어온다. 무건리 훈련장은 경기 파주시 법원읍 무건리·직천리·오현리·비암리 일대 703만 평 규모의 군사훈련장으로, 2009년까지 오현1·2리 땅 400만여 평을 추가 매입해 훈련장 규모를 1100만 평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이날 밤 오현리 삼거리에는 50여 개의 촛불이 밝혀졌다. ‘무건리 훈련장 확장 반대를 위한 주민 촛불문화제’ 31번째 밤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부터 여중생까지 함께 나와 촛불을 들었다. 첫 연사로 나선 주병준 무건리 훈련장 확장저지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위원장은 “가슴이 벅차다”며 “무건리에 150가구 400여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목숨을 다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서울에서 석 달 넘게 밝혀지고 있는 촛불이 그러하듯 이들에게도 촛불은 ‘생존’의 문제다.
전통적인 시골마을인 오현리의 주된 생계수단은 농사와 낙농이다. 주민들이 원하는 건 대단치 않다. 깨끗한 자연 그대로인 오현리에서 사는 거다. 주민 대부분 3대 이상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들이다. 21살에 이곳으로 시집온 구영순(72)씨는 “훈련장을 왜 이렇게 한없이 넓히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50년 넘게 농사짓고 살았는데 이런 꼴을 보니 답답하고 불안하고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오현리에서 약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무건리 훈련장에서는 1년 중 180일 동안 군 훈련이 이뤄지고 있다. 이 중 미군이 사용하는 날이 91일로 한국군보다 이틀이 많다. 이웃 효촌리에 살던 여중생 미선·효순이는 2002년 6월 이곳에서 훈련 받다 귀대하던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
무건리 훈련장의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방부는 직천리 79세대 300여 명과 무건리 150세대 550여 명을 쫓아내고, 86년 550만 평 규모의 훈련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96년 또다시 확장계획을 내놨다. 이 계획은 지난 10년간 지지부진했으나 지난해부터 국방부의 부지 매입이 본격화하면서 주민들과의 대립도 심해졌다.
국방부는 이미 매입한 오현리 땅들을 포클레인으로 뒤엎어 주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해놨다. 홍기호(50) 오현2리 이장은 “농사하다 보면 빚을 지게 마련이고 어쩔 수 없이 땅을 파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라며 “국방부가 계획적으로 여기 땅 조금 사고 저기 땅 조금 사며 주민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현리는 그동안 훈련장 부지로 묶이면서 각종 인·허가 및 재산권 행사가 규제돼왔고, 그로 인해 이 지역의 공시지가가 주변과 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민들이 국방부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다른 곳에 가서 농토를 살 돈조차 마련할 수 없는 실정이다. 주민들이 진정 원하는 건 주한미군 철수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무건리 훈련장의 원상회복이 아니다. 단지 그 훈련장이 확장되는 것을 반대할 뿐이다.
이런 가운데 경기도는 9월4일 발행된 관보에 국방부 장관이 요청한 ‘무건리 훈련장’ 확장사업 실시계획 승인고시를 실었다. 이번 고시로 국방부는 오현리 일대 6833㎡에 대한 토지 수용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공대위는 이날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건리 훈련장 확장 실시계획 승인 및 고시는 국방부가 무건리 훈련장 주변 오현리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겠다는 선전포고”라며 “주민 동의 없는 훈련장 확장 계획을 즉각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주병준 위원장은 “주민들이 죽을 각오로 임하고 있다”며 “각자의 이름을 새긴 묘비를 가슴에 품고 있다”고 말했다.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무건리=사진·글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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