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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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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튀고, 굶고 자고…

등록 2006-02-24 00:00 수정 2020-05-03 04:24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공장을 계속 가동하라!” 모두 잠든 2월16일 새벽, 서울 지하철 을지로역 구내에 갑자기 수백 명의 남녀 노숙자(?)들이 몰려들었다. 한쪽에서는 큰 주먹을 쥐고 토론을 벌이고, 다른 쪽에서는 소주 추렴으로 겨울 찬바람을 이기고, 또 다른 구석에서는 몇몇이 스티로폼을 깔고 아무렇게나 엎드려 자고 있다. 경북 구미에서 올라온 오리온전기 노동자들의 집단 노숙투쟁이다. 이들은 왜 그 흔한 천막도 치지 않고 하룻밤 노숙자가 되어 겨울투쟁을 벌이는 것일까?

오리온전기의 노동자 1300여 명은 회사가 느닷없이 문을 닫아 모두 실업자 신세로 내몰리고 말았다. 한때 대우그룹의 알짜 계열사였던 오리온전기는 부도 이후 미국계 투자회사인 매틀린패터슨에 인수됐다. 당시 이 펀드는 ‘공장 정상화를 위한 신규투자’와 ‘향후 3년간 고용보장’을 약속하고 대신 헐값에 공장을 사들였다. 그러나 모든 합의와 약속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매틀린패터슨은 알짜 사업부문을 죄다 팔아먹고, 브라운관 사업부문도 홍콩에 있는 ‘오션링크’에 팔아버렸다. 노동자들한테 돌아온 건 ‘법인 해산’ 통보뿐이었다. 회사를 살리려고 종업원 3분의 2가 퇴출되는 등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었는데, 정부와 채권단이 ‘먹튀 자본’에 회사를 판 결과 생존의 벼랑에 내몰리고 만 것이다. 지하의 어두운 밤, ‘광장으로 나가는 곳’이란 노란색 표지판이 선명하다. ‘먹튀’ 투기자본 앞에 노동자들의 출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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