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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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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반미의 나라인가

등록 2004-06-04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 칸영화제 수상을 계기로 살펴본 프랑스의 미국 비판 문화</font>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제57회 프랑스 칸영화제가 5월23일 막을 내렸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황금종려상의 영광이 미국의 부시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한 다큐멘터리인, 마이클 무어 감독의 에 돌아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예술성을 중시하는 칸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작품이 최고상을 수상한 것이나, 그것이 안티부시성 영화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런 탓에 ‘반미의 나라, 프랑스’라는 이미지가 다시 굳어지고 있다. 하지만 9명의 심사위원들 가운데 심사위원장인 타란티노를 비롯해 미국인은 4명이고 프랑스인은 단 한명뿐이었다.

‘물레 사건’으로 파문 일어

시상식이 끝난 뒤 세계 유수의 언론들은 ‘프랑스 영화제’와 ‘반미성 영화 수상’의 관계에 주목했다. 지난해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도 미국 사회의 일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려낸 영화였다. 게다가 올해는 영화제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다큐멘터리가 큰 상을 수상했다는 점 등이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칸영화제가 국제 정세와 맞물려 파문을 일으킨 적은 여러 차례 있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유혈 충돌이 한창이던 2002년 봄, 프랑스 전역에 중동의 평화와 반아리엘 샤론 총리를 외치는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그 여파가 칸영화제에도 미쳤다. 미국 유대인협회는 ‘반유대인의 나라, 프랑스’를 운운하며 영화제 보이콧을 논했다. 할리우드 투자자들이 대부분 유대인이라 이들이 영화제에 불참할 경우 심사위원이나 작품 선정을 비롯해 영화제의 정상적인 개최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보이콧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해 황금종려상은 나치 정권 아래 한 폴란드 음악가의 참상을 그린 폴란스키 감독의 에 돌아가 무성한 뒷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정말 반미의 나라일까. 2004년 1월 ‘물레 사건’이 일어났다. 물레라는 프랑스 청년이 도미니카공화국에 여행을 갔다가 프랑스로 되돌아오는 비행기(아메리칸 에어라인)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비행 중에 물레가 화장실에 오래 머문 탓으로 승무원의 심한 감시를 받았다. 물레는 농담조로 “설마, 내가 화장실에 폭탄을 숨겨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발언 뒤 물레는 비행시간 내내 더 심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화가 난 그는 파리행으로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중간 기착지인 뉴욕에 내리면서 승무원에게 또 한번 농담을 던졌다.

“제기랄! 그게 안 터졌군.” 이 말이 화근이었다. 그는 곧장 출동한 뉴욕 경찰에 의해 잡혔고 감옥으로 이송됐다. 죄명은 이른바 ‘폭탄 허위 경보’. 미국에서는 최고 4년형까지 받을 수 있는 죄다. 이 사건은 곧장 뉴욕주재 프랑스 대사관에 알려졌고, 프랑스 외무부는 자국민이 해외에서 겪은 부당한 일이므로 사건의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프랑스-미국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일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물레는 현지에서 3주간이나 압류됐다가, 자국 외무부의 노력에 힘입어 재판에서 ‘허위경보’가 아닌 ‘비정상적인 처신’으로 600달러의 벌금만을 치르고 풀려났다. 파란만장한 휴가를 보내고 파리공항에 도착한 물레는 기자들 앞에서 ‘젊은 나라’ 미국을 떠나 ‘늙은 나라’ 프랑스에 도착한 안도감을 눈물을 머금은 채 피력했다. 외무부는 “국적에 상관없이 9·11 사태 이후 안전 문제에 민감해진 미국의 심한 견제일 뿐”이라고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물레의 변호사는 “미국 내 퍼져 있는 반프랑스 정서를 보여주는 양국간 외교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외무부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물레는 “생전에 다시는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다”며 치를 떨었다.

‘안티 미국’ 저서 크게 인기

“프랑스가 반미의 나라인가”라는 물음에 단정적으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프랑스에서 ‘미국처럼’이라는 표현은 냉소적이며 비판적인 뜻을 담고 있다. 거리로 나선 시위대의 구호 가운데는 “미국 같은 미래를 원치 않는다”도 있다. 미국처럼 인간보다는 자본에 중점을 두는 개혁에 반대하는 목소리다. 물레 사건에 미국과 프랑스간 미묘한 알력이 작용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 여파가 더 컸던 것은 이 사건이 이라크 사태 이후 일어났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평소 미국을 적대시하는 나라라고 알려진 프랑스는 9·11 테러와 아프간 및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과 외교나 언론 영역에서 적잖은 불편함을 겪어왔다. 부시 정권이 들어선 이후 프랑스의 출판가에는 ‘안티 미국’이나 ‘안티 부시’는 물론이고, 미국의 쇠퇴나 몰락의 운을 띄우는 책들이 부쩍 늘어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미국 사회나 정치에 대한 분석이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는 셈이다. 2003년 5월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들 가운데는 (SACRES FRANCAIS, 저자 테드 스탠저)이 있다. 출간되자마자 판매율 순위 30위 안에 든 책이다. 이 책은 전직 특파원이자 지금은 프랑스에 남아 생활하는 미국인 테드 스탠저가 프랑스에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프랑스인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제목에서 ‘대단한’이라는 단어는 찬양이 아니라 약간의 비아냥을 내포한다. 이라크 사태로 프랑스가 대외적으로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던 시기에 한 미국인이 프랑스인들의 이런저런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도대체 미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은 얼마나 세상을 다르게 보기에 이렇듯 의견이 다른가”라는 상대적인 관점으로 이해해보자는 취지에서 책을 썼다. 그의 메시지는 이렇다. “이 책을 모국어가 아닌 까다로운 프랑스어로 프랑스에서 출간한 이유는 미국인들과는 달리 프랑스인들에겐 자아비판을 즐기는 성향이 있다.” 사실 프랑스 출판가에는 미국의 몰락뿐 아니라, 프랑스의 쇠퇴와 몰락을 논하는 책들도 즐비하다. 그만큼 ‘고발’ 또는 ‘앙가주망’ 정신은 프랑스 지식인 문화에 널리 뿌리박혀 있다. 따라서 ‘프랑스가 반미의 나라냐’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없으며, 단지 두 나라의 문화가 아주 다르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예술의 표출방법, 앙가주망

“은 그 정치성 때문이 아니라, 예술성으로 평가받은 것”이라고 심사위원장 타란티노는 시상식 품평회에서 밝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 정치성 때문에 미국 현지에서는 배포가 금지된 상태에서 칸영화제에 출품되어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이제 그 명성으로 영화배급처를 찾는 일이 수월해지고, 그 덕에 미국인들도 접하게 될 것이며, 그 여파가 올 11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무어는 기원하고 있다. 이번 일로 “예술성의 극치를 강조해오던 칸영화제도 앙가주망을 외치는가”라는 반문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앙가주망’은 자본도, 전쟁도, 테러도 세계화되는 21세기에 예술이 도달한 또 하나의 표출방법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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