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 피는 꽃’을 앵글에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성남훈씨

허물어지고 갈라진 건물벽을 등에 지고 까칠한 얼굴의 아이들이 뛰어논다. 그 가운데 맨 앞의 한 아이가 자랑스럽게 카메라를 향해 내미는 것은 허연 헝겊뭉치. 자세히 보니 조각조각 이어진 육각형의 모서리가 없어져버릴 정도로 낡고 바람 빠진 축구공이다. 축구공 하나의 움직임으로 반도 전체가 신열에 들뜬 이곳의 붉은 물결과, 낡은 축구공 하나로 폐허의 바람을 가르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의 모습이 가깝고도 멀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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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상흔을 짊어진 어린이와 여성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성남훈(39)씨가 앵글에 담은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의 눈빛에는 피로와 슬픔, 호기심과 희망이 공존한다. 무너진 흙벽에서 떨어져나온 벽돌을 의자삼아 무릎 위에 공책을 펴고 있는 여자아이들의 얼굴에서도 긴 겨울 자락 끝에 삐죽 나온 봄 같은 기운이 서려 있다. 7월6일까지 경기도 수원시 경기문화재단 전시실에서 열리는 성씨의 사진전 ‘아프가니스탄에 피는 꽃’에서 만난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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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중순부터 한달 정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록한 것들입니다. 한창 전쟁 중일 때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곳이지요. 특히 요즘처럼 모든 이들이 다른 것에 열광하고 있을 때 우리가 분노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확인해보자는 의미에서 전시를 기획하게 됐습니다.”
성씨의 작품들에는 전사들이나 잔혹한 전쟁의 현장보다 여성이나 어린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렌즈를 빨아들이는 것은 피와 눈물이 얼룩진 곳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는 주변인들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측은하고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상처나 끔찍한 기억은 어차피 이들이 지고 가야 할 운명 같은 거죠. 그 큰 짐을 이들이 어떻게 지고 나가는가를 들여다보려고 했습니다. 반가웠던 것은 어린아이들일수록 학구열이 높았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에너지가 반짝이는 걸 느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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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훈씨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터전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어릴 때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좌절됐고, 대학 때는 연극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또 좌절했지요. 졸업하고 아무런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사진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프랑스어의 스펠링 하나도 모른 채 파리로 떠났지요.” 대학시절에는 오히려 사회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았던 그는 자신이 파리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주변인의 삶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이후 파리의 다리밑에서 천막을 치고 사는 루마니아 집시들, 내전으로 부모와 형제를 잃은 코소보와 르완다 난민들, 손가락과 얼굴을 잃고 격리돼 살아가는 한국 소록도의 나병 환자들 등 전 세계 15개 지역의 고통받는 사람들이 그의 필름에 자신들의 삶을 새겼다. 이 가운데 파리의 사진학교 ‘이카르 포토’에 재학 중이던 1992년 찍은 루마니아 집시 사진은 그의 프로젝트 첫 작품으로 그해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르 살롱’전 사진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93년 졸업 뒤에는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분야 사진가 집단인 통신사 ‘라포’의 소속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등의 유력지에 기고해오고 있다.

전시 준비가 한창인 요즘도 그는 한국의 월드컵 관련 사진을 매일 한장씩 에 기고한다. 그의 프로젝트 사진들이 그렇듯 성씨가 찍은 월드컵 관련 사진들은 경기장이나 운동선수들의 근육들을 담는 게 아니다. 월드컵 주변 사람들의 삶과 표정을 담는다. 지난 프랑스의 2차 경기 때 그는 부산 자갈치시장에 있었다. 그가 결국 담아낸 건 퇴장당한 뒤 입을 댓발 내밀고 경기장에서 나오는 앙리와 브라운관을 사이로 같은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고 있는 도마 위의 생선이었다. 한국의 3차전에서는 광화문에 나온 두 부부를 찍었다. 박지성이 골을 넣은 뒤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부인에게 키스를 퍼붓는 남편의 얼굴이었다. “사진 찍고 물어보니 결혼생활 12년에 남편에게 이런 키스를 받은 건 10년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한국의 문화와 월드컵 열기 같은 게 재미있게 부딪치는 모습이었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향한 10년의 집념

“제게 사진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무엇을 찾아가거나 칼날 같은 결론을 내릴 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지도 못하고요. 돌아다니고 사람들 만나면서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전지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살떨리는 긴장을 해야 하고 지진이 났던 인도의 구자라트 지역에 갔을 때는 메고 있던 카메라 하나를 제외한 모든 장비가 포클레인 바퀴 아래서 부서졌지만 그는 박살난 장비 일체를 비닐에 담아 집안을 장식할 만큼 낙관적인 사람이다.
10년 프로젝트의 완결편으로 탈북자 문제에 접근해볼 생각이었지만 포기했다. “탈북자들의 신변이 위험해지는 걸 무릅쓰고 저 좋자고 사진 한장 건지면 뭐하겠어요.” 대신 캄보디아 지역을 다녀오기로 했다. 내년쯤에는 ‘소외된 사람들’ 프로젝트를 마무리짓는, 그리고 그의 사진 인생에서 가장 큰 중간매듭을 묶는 대규모 전시와 작품집도 준비 중이다. “그 다음에는 동양의 정신을 담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인데 그 역시 추상적인 사진들이 아니라 일상과 묶여 있는 어떤 것을 담아보려고 합니다.” 이번 전시 ‘아프가니스탄의 꽃’은 수원뿐 아니라 대구·전주·서울 등 전국 4개 도시를 순회할 계획이며 서울 전시는 9·11테러 1주년을 기념할 때쯤 만날 수 있다(문의 031-231-8544).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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