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루사에 삶터를 잃었던 옥계면 사람들… 땜질 복구에 애간장 타면서도 희망의 씨앗 뿌려
“1936년 영동지방에 대홍수가 있었다. 강릉에서만 1천여명이 숨지고, 30만평 이상의 농경지가 유실됐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정부 지원도 없고, 중장비나 자원봉사자 도움도 없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땅을 다시 일으켰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생존에 대한 의지, 더불어 사는 지혜, 울력과 같은 협동이 살아 있는 농업에 기반한 사회였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67호 김대진의 ‘홍수 이후’ 중에서)
7월10일 오전 강릉 가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빗줄기는 원주를 지나 태백 준령으로 다가서면서 더욱 거세졌다. 지난해 8월31일 강원도 강릉 지방을 관통한 태풍 ‘루사’가 무려 897.5mm의 폭우를 토해냈던 기억이 불길하게 머리를 스쳤다. 요행히도 대관령을 지나 강릉 시내로 들어서면서 빗발이 조금씩 가늘어졌다.

복구공사 한창임에도 수해 위험 높아져
수마가 지나간 뒤 한동안 거리 곳곳에서 굉음을 내던 복구차량과 중장비는 도심에서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였다. 황톳빛으로 물들어 있던 강릉시 포남동과 노암동 일대도 말끔하게 정돈된 채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겼다. 하지만 시내를 빠져나와 수해 직후 1주일 가까이 고립됐던 옥계면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서는 여전히 복구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해 직후 농민들의 가장 큰 걱정은 생존의 터전인 논밭이었다. 강원 영동지역의 농경지 8천ha 가운데 56%에 해당하는 5천ha가 침수·유실됐고, 하천가 농지에는 30cm에서 1m 두께로 토사와 자갈 등이 쌓였다. 농지 복구를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흙이 필요했다. 대자연의 분노로부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들은 또다시 어리석음을 반복했다. 객토를 위한 토사를 마련한다며 멀쩡한 산을 깎아내린 것이다.
‘땜질복구’로 인한 폐해는 하천 복구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환경운동연합이 강릉 사천천과 연곡천, 양양 남대천 등 3개 하천 수해 복구현장을 둘러본 뒤 지난 7월6일 내놓은 ‘영동지역 수해복구사업 현장조사 보고서’를 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조사대상 지역 가운데 10여곳에서 도로확장 등을 이유로 하천 폭을 좁히는 공사가 진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폭우가 내리면, 하천 범람으로 인한 수해 위험은 오히려 높아졌다.
옥계면 낙풍2리 들머리에서 만난 이순녀(47)·노문혁(52)씨 부부는 ‘밥 먹다 말고 숟가락 들고’ 대피했던 악몽 같던 지난해를 떠올리며 몸서리부터 쳐댔다. “저기 저 2평 남짓한 산불방지 초소에서 수해 직후 보름 남짓 동안 2가구 4명이 함께 지냈다. 오죽하면 앉아서 잠을 잤겠나.” 노씨가 길 곁에 염치 없이 서 있는 컨테이너를 가리키며 쓴웃음을 짓는다. 수해로 무너져내린 집터에 새집을 지었지만, 비가 와 물이 불어난 집 앞 도랑을 쳐다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수심이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겨우내 쉼 없이 복구작업을 벌였던 들녘은 푸르름으로 가득했다. 흙더미에 덮인 채 벼 이삭조차 보이지 않던 논에서는 어느새 성큼 자란 나락이 잠시 비가 멈춘 사이 얼굴을 내민 햇살을 반기고 있었다. 주민 박낙복(68)씨는 “(수해를 당했을 때는) 여기서 계속 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늦지 않게 모내기를 할 수 있었다”며 연신 바쁜 일손을 놀렸다. 그렇게 삶은 지속되고 있었다.
‘높은 산 깊은 계곡’으로 이름난 옥계면 북동리 주민 79가구 200여명도 지난 열달 남짓 동안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 마을 청년들이 발빠르게 주민들을 대피시켜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가옥 14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마가 휩쓸고 지나간 뒤 황무지로 변해버린 삶의 터전을 바라보며 노인들은 “왜 나를 살려냈느냐”고 눈물을 찍어냈다. 마을회관 앞에 삼삼오오 모여든 주민들은 넋을 놓은 채 복구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을 청년회가 나서 급한 집부터 잠자리를 마련하고 가재도구 정리를 시작했다. 1주일 만에 끊긴 수도관을 이어 물 공급이 재개되면서 복구작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체념하고 있던 노인들도 힘을 내고 복구작업에 매달렸다.” 북동리 박인재(42) 이장은 “수해복구 과정을 통해 오히려 주민들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씀이 커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흩어졌던 이웃들 한자리에 보금자리 마련

골짜기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이웃들을 한자리로 모이게 한 것도 수마가 숨겨놓고 간 선물이었다. 한동네 주민이면서도 멀게는 4~5km씩 떨어져 살다보니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던 오랜 이웃들이 새로 집을 지으면서 지척에 모여 살게 된 것이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컨테이너에서 보내고 지난 4월 새 터전으로 이사한 박정선(63)씨는 “농업기반공사 땅을 불하받아 4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살게 됐다. 예전에는 한달에 몇 차례씩 인사말이나 주고받던 이웃을 이제는 문만 열면 볼 수 있다. 이게 진짜 사는 재미 아니겠느냐”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수마를 딛고 일어선 농민들은 내친 김에 미뤄왔던 ‘생태농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지난 6월16일 옥계면 장맥이뜰 장영규(56)씨 등의 논에서는 인근 주민들이 모여 ‘오리넣기’ 행사를 벌였다. ‘땅심을 지켜야 사람이 산다’는 교훈을 지난 수해를 통해 새삼 깨달은 탓이다. 장씨는 “농약을 쓰는 대신 어린 오리를 논에 풀어놓으면, 잡초 제거뿐 아니라 병충해 예방에도 좋다. 또 오리가 배설하는 분뇨는 벼 생육에 좋은 자양분이 된다”고 자랑이다.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피해보상이 진행되면서 ‘돈’이 오가자 산골마을 농심이 흔들리기도 했다. 이웃의 피해복구에 발벗고 나섰던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없자, ‘수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봤다’는 말이 마을 주변에 떠돌았다. 농토 복구 과정에서 새롭게 측량작업이 벌어지면서, 땅의 경계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피해보상으로 쌓인 앙금 품앗이로 털어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 주민들은 서서히 공동체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아가고 있다. 박 이장은 “얼마 전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두릅 작목반이 묘목 5천주를 심는 날, 마을 주민 모두 손에 손에 삽과 괭이를 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일당을 받고 일손을 돕는 일이 많았는데, 올해는 품앗이를 해주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재작년부터 준비해 지난해 특화작물로 하기로 하고 100평짜리 비닐하우스 5개 동을 세웠다가 홍수로 모두 떠내려갔던 표고 공동 작목반도 다시 시작했다. 마을 청년회 회원 20여명이 100평짜리 비닐하우스 10개 동을 다시 세웠다. 내년 봄 본격적으로 출하가 이뤄지면, 수익금의 일부는 따로 떼어 마을 어린이 장학금도 주고 독거노인 돕는 일에도 쓰기로 했다.
강릉지역 10여개 민간단체가 참여한 ‘수해지원을 위한 시민·사회·종교단체 협의회’를 통해 수해지원의 사각지대를 찾아 지원활동을 펼쳤던 목영주 강릉 한살림 생활협동조합 이사장은 말한다. “수해를 계기로 잊혀졌던 농촌의 공동체 문화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위기를 함께 헤쳐나오며 울력의 소중함이 다시 농민들 가슴에 새겨졌고, 같이 일해야만 산다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 몸으로 느낀 탓이다.” 큰물 진 뒤 열달여, 옥계면 사람들이 희망의 싹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다.
옥계=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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