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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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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바탕 웃으면 현실이 보이네

등록 2003-10-10 00:00 수정 2020-05-03 04:23

계백과 김유신의 결전을 유쾌하게 버무린 … 구수한 사투리 속에서 현실 세계를 읽는다

(10월17일 개봉, 감독 이준익)이 퓨전 사극처럼 느껴지는 결정적 이유는 ‘거시기’와 ‘씨벌놈아’에 있을 것이다. 아니, ‘거시기’와 ‘씨벌놈아’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는 존재가치를 잃을 뻔했을 정도다. 신라와 백제가 당나라를 사이에 두고 결전을 벌인 황산벌 전투를 실감나게 재현한 막판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의 경합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계백(박중훈)이 아주 숙연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한다. “여그 황산벌 전투에서 우리의 전략전술적인 거시기는 뭐시기 헐 때꺼정 갑옷을 거시기한다.” 그의 작전지시를 엿들은 첩자가 김유신(정진영)에게 이를 그대로 옮기지만 ‘암호 해독’이 좀체 안 된다.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을 총지휘하는 소정방이 김유신의 진군을 재촉하지만 김유신은 신중하다. “계백이 갸는 무서운 애데이. 거시기의 정체를 파악할 때까진, 총공격은 절대 몬한다카이.”

‘거시기’의 정체를 그 누가 알랴

백제가 패할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까지 영화가 비껴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말싸움은 백제군의 승리다. 철옹성처럼 버티고 선 백제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신라군의 욕쟁이들이 지독스런 입담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슬슬 약이 오른 백제군이 보성 벌교의 토박이들을 차출해 대꾸를 시작한다. “…한 이 씨벌놈들아!”로 마무리되는 그들의 터진 입 앞에 버틸 장사가 없다.

토속내가 진동하는 사투리들의 충돌 앞에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자신의 일가족을 베어버리고 전쟁에 나선 계백의 옥쇄전은 박중훈의 얼굴에서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거두어갔지만, 그가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거시기’로 해치워버릴 때 ‘역시 박중훈이야’가 절로 나온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이 개그콘서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투리와 역사적 인물들이 유쾌한 놀이를 벌이는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블랙코미디라는 자의식을 잃지 않는다. 그건 “전쟁은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기야”라는 연개소문의 말을 빌려 황산벌 전투의 정치적·역사적 의미를 자리매김하는 방식에서나, 소정방이 신라를 능멸하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구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더 흥미로운 건 현실 정치와 대치 가능한 구도로 장군들을 배치한 대목이다.

의자왕은 서양 중세의 영주들처럼 자체 군사력을 갖춘 중신들의 반항에 골머리를 앓던 끝에 은밀히 계백을 부른다. 말 없이 술잔을 따라주던 의자왕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계백아, 니가 거시기 허야겄다.” 그 뒤 계백이 의자왕의 고민거리를 칼 한 자루로 말끔히 씻어내는 장면에선 현대사의 쿠데타 주역들이 충분히 연상된다.

계백의 ‘비장함’ 재해석 등 풍자 돋보여

계백에 대한 재해석은 그의 칼 앞에 스러져가는 아내(김선아)의 모진 저항에서 최고조를 이룬다. 역사교과서마저 칭송하던 계백의 결연한 의지는 피비릿내의 쾌감에 중독된, 거대한 마초의 무모한 욕망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나 무력의 적절한 활용에 탁월한 김유신은 현명한 위인이라기보다 여의도의 노회한 정치꾼을 적분 계산으로 풀어낸 듯한 캐릭터다.

가 코스모폴리탄적 감성으로 조선시대 후기를 재현한 모던한 사극이라면, 은 질박한 사기그릇에 코믹과 스펙터클, 그리고 옅으나 의미심장한 풍자를 비벼댄 역사물이다.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품위 있게 언급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이성욱 기자/ 씨네21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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