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997년 1월 처음으로 ‘흥부의 정신’을 찾아 남원을 향한 이래 2019년 4월27-28일까지 모두 20차례에 걸쳐 ‘흥부기행’의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이 기행의 기획자들은 한동안 흥부형 인간상보다 오히려 놀부형 인간상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다가, 우리 사회의 천민자본주의적 추세에 대한 반성에서 흥부를 재긍정 재해석하는 회귀 과정을 거치며 진정한 흥부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 해마다 4월 봄이면 흥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찾는 흥부의 제비처럼 전국 각지에서 60~100여명의 뜻있는 분들이 이 도정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렇게 연인원 1,700여분에 이르는 놀라운 뜻과 정성이 모아지고 발효돼 해마다 흥부처럼 착하면서 흥부처럼 대박을 일구는 방방곡곡의 농가나 기업을 찾아가 흥부의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흥부’는 더없이 이기적이고 비인간화하고 위태로워지고만 있는 것 같은 21세기 이 땅에서 새로운 ‘빛’이요, ‘희망’이요, ‘사상’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산마저 2번씩 바뀔 수 있는 22년 긴 시간의 응축 속에서, 1700여 영혼의 뜻과 정성 그리고 고뇌 속에서, ‘흥부’와 ‘흥부정신’의 놀라운 통찰력과 가르침, 인류를 향해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흥부’ ‘흥부정신’은 더없는 생명평화의 정신입니다
흥부는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제비새끼들을 구하기 위해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자기 몸을 던져 그 생명들을 구해냈습니다. 흥부는 제비새끼들의 생명을 구하되, 폭력이나 파괴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가해자인 뱀조차 죽이지 않고 다른 개활지로 이동시켜 그 나름의 삶을 이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둘째, ‘흥부’ ‘흥부정신’은 더없는 은혜에의 보답, 보은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제비 가족은 이듬해 먼 강남으로부터 은혜의 씨앗을 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선은 더 큰 선으로 되돌아오는 선의 선순환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대상이 제비이고, 그 대상에 사랑을 다하면 보답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보은의 선순환이 아름다운 사회를 가져올 것입니다
셋째, ‘흥부’‘흥부정신’은 더없는 ‘혁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비들의 집결지 저 멀리 바다 건너 강남에서 시작해 동북아와 삼천리강산을 돌아 날아온 보은의 박씨는 기적의 대박을 가져오는 이노베이션 과정을 극적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경제의 혁신 지향성을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사회에서 모든 기업이 대박을 지향하고 있으며, 대박을 얻는 혁신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넷째, ‘흥부’‘흥부정신’은 ‘나눔’과 ‘사회적 책임’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씨(이노베이션)의 기적으로 부유하게 된 흥부는 곧바로 그 부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줍니다. 심지어 그 대박(이노베이션)의 방법론까지도 놀부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착한 사람, 선을 실천하는 이타심이 결국은 대박을 가져오고, 그 결실을 다른 사람들과 다시 나누는 ‘희망의 기적’은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착함’이란 말과 ‘대박’이라는 말을 가장 널리 퍼져나가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사회가 신흥부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전라도로부터 강원도까지, 서울로부터 부산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업과 농장, 공방, 공부터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21세기 이 땅에서 흥부의 마음을 실천하려는 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 귀한 결실을 공유하면서 이 사실을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번째 흥부기행을 맞아 우리가 그동안 배우고 깨달은 바를 시간적으로는 우리 후대 세대를 향해, 공간적으로는 전 세계의 인류를 위해, 계승하고 확산시켜야 한다는 작지만 소중한 마음의 다짐을 해보려 합니다.
첫째, 우리는 이기심과 분절적 논리체계에 바탕해 우리 사회와 인류 사회의 생명(생태계)과 평화를 더없이 위협하는 놀부적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이타심과 통합적 평화·생명(생태계)을 지향하는 ‘흥부’ ‘흥부정신’의 계승과 발전, 세계 차원의 확산을 위해 노력한다.
둘째, 우리는 ‘흥부’ ‘흥부정신’의 계승과 발전, 세계 차원의 확산을 위해 ‘흥부’ ‘흥부정신’의 디지털화가 매우 유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적극 노력한다.
셋째, 우리는 이 2가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흥부기행’의 형식과 내용을 한층 고도화하고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노력한다. 아울러 착한 정신이 대박으로 연결되는 사회적 제도적 인프라의 구축을 촉구해 나가기로 한다.
우리는 착한 마음을 안고 첫 걸음을 떼신 분들로부터 시작한 흥부기행이 IMF사태와 신자유주의의 심화를 거치며 일궈낸 소중한 성과가 앞으로 북한-몽골을 거쳐 카자흐스탄까지, 21세기 최고의 컨텐츠로서, 인류의 후손들에게 계승될 최상의 정신가치의 하나로, 펴져나갈 것을 믿습니다.
2019년 4월 28일
흥부기행 참가자 일동
생텍쥐페리의 에 심취한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 도대체 어디를 가야 어린 왕자를 느끼고 눈물 한 방울 지을 수 있을까? 세르반테스의 라면? 스페인 라만차까지 내려가 늙은 나귀 등에 타올라 긴 막대창이라도 들고 안내자가 이끄는 대로 저 멀리 풍차를 향해 걸어가야 할까?
제비, 뱀, 박, 가난한 사람을 끌어안는여기 21세기 대한민국, 민중의 허구 속에 창조돼 민중과 함께 오랜 세월 호흡하고 우리의 유전자처럼 자리잡은 한 주인공을 깊이 느끼고 배우기 위해 22년 동안 스무 차례 단체기행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다. ‘흥부기행’. 속 흥부를 찾는 제비처럼 ‘흥부’, 더 정확히는 ‘흥부의 정신’을 찾아나서기에 스스로를 ‘제비’라 이르는 이들은 어떤 때는 50여 명, 어떤 때는 100명을 웃돌아 어느덧 연인원 1700명을 넘어섰다.
흥부기행을 이렇게 발전시킨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하고 유한대학 총장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 석좌교수로 있는 김영호 교수다. 김 교수는 1997년 3월20일치 제149호 표지이야기 ‘21세기 인간상, 흥부야 나와라!’ 제목의 기고문에서 흥부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흥부적 인간상이 21세기를 주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설화에서 나타난 흥부의 인간상이 20세기 후반 근대주의에 대한 회의와 비판의 연장선에서 바람직한 미래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통찰한 것이다.
“흥부는 제비도 끌어안고 뱀도 끌어안고 박도 끌어안고 모든 이질적인 요소를 끌어안고 결합시키면서 혁신을 연출한 뒤, 다시 가난한 사람도 포용하고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간 놀부형 인간도 포용하고 모든 것을 나누어준다. 그는 남의 부를 이전받아 자신의 부를 늘리는 제로섬게임(zero sum game)의 승자가 아니라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포지티브섬게임(positive sum game)의 승자이며, 그러한 포지티브섬의 결과를 공동체 구성원과 함께 나눠 가지면서 화해의 공동체를 이룩해나간다.”
이런 내용을 담은 표지이야기는 그 뒤 흥부기행 참여자를 크게 늘리는 계기로 작용한다.
여행과 교육이 합쳐진 기행흥부기행은 어떻게 20여 년 동안 독특하고 설득력 있는 기행으로 자리잡게 되었을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흥부기행은 무엇보다 생물과도 같이 스스로 성장하고 진화하는 ‘시대정신 조응형 발전’을 이어오고 있다. 둘째, 자본주의와 기술의 변신과 발전이 날로 빨라지는 가운데 세계경제와 경제 시스템의 화두에 대해 세계적인 경제 발전 이론가인 김영호 교수가 시의적절하게 예리한 통찰과 이론적 뒷받침으로 기행의 설득력을 높였다. 셋째, 고품격 특강 방식을 잘 활용해 인문학적 상상력과 경세론적 화두를 모두 아우르는 데 성공했다. 넷째, 흥부의 마음으로 회사, 농장, 공방, 배움터를 이끄는 사람들을 찾아 배우고 호흡하는 살아 있는 교육 기회를 유효적절하게 결합했다.
지난 4월27~28일 제20차 흥부기행도 이런 특장점의 연장선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번 기행단의 주제는 남북 평화 화해의 신기원을 연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평화생명 기행’으로 잡았다.
주요 무대는 한국DMZ평화생명동산과 만해마을. 참가자들은 첫날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평화생명동산에서 머물며,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의 특강과 문국현 뉴패러다임인스티튜트 대표의 ‘세계화 4.0-혁신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 특강을 듣고, 이기영 교수-임진택 명창-오지윤 명창으로 이어지는 공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튿날 만해마을에서는 한용운님의 독립운동과 그 연장선에서 나온 문학에 대해 토론한 뒤 ‘만해의 길’을 함께 걷는 행사로 기행 주제를 이어갔다. 이런 행사의 앞뒤로 박수근미술관-인제산촌민속박물관-박인환문학관-전통주 양조장 ‘예술’ 등을 견학하는 기회도 가졌다.
첫날 특강과 공연은 예상한 것보다 더 진지하고 무거웠다. 현재 남북 평화 논의가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와 세계경제에 무겁게 드리워지는 모순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짙게 반영됐기 때문이리라. 정 이사장은 무엇보다 “지금 휴전선 일대에 남북에 걸쳐 평화생명특구로 설정할 수 있는 지역이 약 1억1천만 평에 이른다”고 전제한 뒤 “만일 남북이 제대로 한반도생태공동체의 기초를 세우지 않으면 설사 통일이 빨리 되더라도 한반도는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준사막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의 논조에 따르면 남북대화 진전으로 교류가 활성화되고 제조업에 새로운 발전 기회가 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조차 생태적 관점에서는 조급하고 위험한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동해가 지나친 남획과 중국으로 어업권을 매각함에 따라 석화 현상이 더없이 심각해지는 등 사실상 죽어간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문국현 대표 역시 20년 동안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가하고 있다면서, 한국이 창밖에 온 4차 산업혁명을 제대로 준비하고 대응하지 못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통찰했다. 독일이 통일의 후유증으로 마치 ‘유럽의 병자’처럼 이르던 2010년 에너지 효율을 고도로 높이고, 제조업에 디지털을 결합해 생산 효율을 높여 불량률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인더스트리4.0을 법제화해 대성공을 거두는 동안, 한국은 무지와 소극적 방어주의에 매몰돼 중대한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비판했다. 또한 중국 샤오미가 프로슈머(생산자와 소비자를 합친 말) 2천만 명이라는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생산자-소비자 공동 생산으로 게임 법칙을 바꾸는 동안, 한국의 정보기술(IT) 산업은 제품 생산에만 매몰돼 지속적으로 경쟁력이 추락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흥부상 정립을 위하여흥부기행도 그 고민의 연장선에서 어깨가 무겁다. 현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그 문제를 치유·수정하는 대안 모델로서 흥부 정신을 발전시키고 확산해야 한다는 과제에서 비켜나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일까. 20차 흥부기행을 마무리하며 참가자들은 ‘흥부기행 20년의 약속’이라는 다짐을 공표했다. 만일 흥부기행이 대안 모델로서 새로운 흥부상 정립에 성공한다면 세계는 앞으로 서구의 발전과 여러모로 맥을 같이하는 ‘노벨’을 기념하는 상 대신, ‘흥부’를 기리는 새로운 상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흥부자본주의’는 21세기의 대안인가
‘SR시스터스’가 희망을 안겨주리
김 교수는 먼저 세계가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 그리고 탄소경제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그 대안을 찾는 노력을 본격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지속가능발전(ESSD), 사회책임(SR), 저탄소 등이 바로 이런 새로운 대안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평범한 민중이 엮어낸 흥부상에서 이런 대안의 성격을 풍부하게 찾아낼 수 있다고 김 교수는 설파한다. 흥부 설화에 담긴 생명에의 사랑, 평화주의, 혁신의 중요성, 나눔, 사회적책임 등이 그러하다.
특히 설화 속 박씨가 일으켜내는 ‘부의 기적’과 관련해 새로운 해석을 가하면서 흥부상은 중대한 질적 변환을 일으키게 된다. 박씨는 이전까지는 신비주의적 우연의 횡재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 변천상을 반영해, 국제무역이라든가 돌에서 엄청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반도체 같은 기술혁신 등으로 그 재해석은 발전한다. 무엇보다 박씨의 기적은 단발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스템의 엄청난 대격변을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착한 사람이 잘되어야 한다”는 광범한 대중의 오랜 소망(박씨)을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시스템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그 답을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사회책임투자(SRI), 사회책임소비(SRC), 사회책임노동(SRL), 사회책임교육(SRS), 그리고 사회책임을 다하는 기업과 조직에 세제 혜택을 주거나 우선적으로 조달하는 사회책임정부(SRG) 등”이라고 제시한다. 그가 ‘SR시스터스’라고 이름 붙인 이 시스템이 바로 이기적 자본주의의 폐해를 치유하고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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