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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리는 지엠 쫓기 바쁜 정부

자동차 제조사 지엠(GM), 한국지엠 분할로 철수 로드맵?

한국지엠에 대한 산업은행 권한 축소 가능성
등록 2018-11-06 19:47 수정 2020-05-03 04:29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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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엠(GM)이 예상보다 빨리 움직였다.”

지난 10월19일 한국지엠 이사회에서 대주주인 지엠이 한국지엠의 회사 분할 안건을 일방 통과시키자, 적잖은 자동차업계와 정부·산업은행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반응이다. 지엠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다. 이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많은 이가 한국지엠의 생산법인과 연구법인 분리를 지엠의 ‘철수’ 로드맵의 하나로 본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지엠의 철수를 ‘당연한 미래’로 내다본다는 점이다. 카허 카젬 한국지엠 사장은 “철수 계획이 없다”(10월2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고 했고,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도 “지엠이 10년간 한국 땅에서 생산한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10월26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이라고 했지만, 시장과 정부 관계자들은 ‘조용히’ 철수를 내다보고 있다.

최근 연구개발 법인이 분리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지난 2월 전북 군산공장 폐쇄 뒤 벌어진 약 석 달간의 협상 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엠은 군산공장 폐쇄로 칼바람 같은 위기감을 조성해놓고 한국 정부·산업은행과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과정에선 지엠홀딩스가 한국지엠에 빌려준 차입금 28억달러(약 3조원)가 무기로 활용됐다. 2월22일 지엠은 그달 말일이 만기였던 차입금 7220억원을 만기 연장하는 대신 인천 부평공장을 담보로 잡겠다며 이사회 소집을 요구해 2대 주주(지분율 17.01%)인 산업은행을 발칵 뒤집어놨다. 4월 말엔 임금·단체 협상을 마무리짓지 않으면 차입금을 회수하고 한국지엠을 법정관리에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사실상 임금 삭감안에 노조의 서명을 받아냈다. 시간은 언제나 지엠 편이었고, 정부와 노조는 조금이라도 피를 덜 보기 위한 협상에 끌려가듯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지엠 편, 끌려다니는 정부·노조

이렇게 진행되던 협상의 막바지였던 4월 말, 지엠은 연구개발 신설 법인 구상을 산업은행에 밝혔다고 한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10월22일 국회 정무위 국감장에서 “한국지엠이 4월 말 연구개발(R&D) 법인을 분리하겠다는 의사를 제시했다”고 처음 밝혔다. 지엠이 산업은행과 5월18일 체결한 기본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새로운 구조조정 방안을 들고나왔다며 비판했던 많은 이들에겐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지엠이 연구개발 법인 분리를 새롭게 꺼내들어 산업은행의 뒤통수를 친 것인 줄 알았건만, 산업은행은 진작부터 이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엠과 산은 간 협상 과정을 잘 아는 한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지엠은 기본계약서에 담긴 유상증자는 물론 처음부터 연구개발 신설 법인, 노동비용 축소가 한 세트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주 지분율 비례로 유상증자를 하자며 산은에서 7억5천만달러(약 8천억원)의 출자를 끌어내고, 노조로부터는 희망퇴직과 임금 삭감에 동의를 끌어내는 한편, 연구개발과 생산법인을 분리해 지엠 본사 입맛에 맞는 한국지엠 구조 개편을 하는 것이 협상 총지휘자인 배리 엥글 지엠 해외사업부문(GMI) 사장의 구상이었을 거란 설명이다.

배리 엥글 사장이 법인 분리 얘기를 꺼냈을 때, 이동걸 회장은 굉장히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 회장은 국감장에서 “회사의 경영 판단에 해당할 수 있는 잠재적인 사안을 모두 구체적으로 계약에 넣고 금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저희가 논의사항이 아니라고 거절해서 기본계약서에는 포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엠이 법인 분리를 꺼낸 시점은 산업은행이 차입금에 쫓기고 법정관리 압박을 받으며 숨넘어가듯 협상을 하던 때다. 산업은행으로선 어렵게 몇 고비를 지나온 협상 말미에 지엠이 법인 분리를 꺼내들자 완전히 새로운 협상을 다시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을 법하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지엠이 법인 분리를 이렇게 일찍 시도할 줄 몰랐다. 일러도 내년쯤일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엠 법인 분리, 왜 하필 지금?

지엠은 왜 이렇게 속도를 내고 있을까. 석 달간의 긴 협상 끝에 산은으로부터 7억5천만달러 출자를 이끌어냈다. 그 가운데 약 절반인 3억7500만달러를 산업은행이 6월 우선주 형식으로 출자를 마쳤다. 연말이면 나머지 출자금이 한국지엠에 투입된다. 철수 가능성을 무기로 한국 시장을 한바탕 흔들어놨던 터라 떨어진 소비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적잖은 노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왜 지금 시점에 법인 분리를 발표해 다시 철수설에 불을 지폈을까.

먼저 한국지엠에 대해 산업은행이 가지고 있던 각종 권한이 법인 분리로 위축될 수 있다. 산업은행은 한국지엠의 2대 주주로서 비토권(거부권)과 주주감사권, 이사추천권(전체 이사 10명 중 산은 추천 3명) 등을 가지고 있다. 지엠과 산업은행은 2002년 지엠의 대우자동차 인수 과정에서 한국지엠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17개 특별 결의사항을 정하고, 이 사항들에 대해 주주총회에서 85%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는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2대 주주인 산업은행의 지분율이 17%에 불과하지만 주요 사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이 주주 간 계약에 따라서다.

시선 쏠리는 연말 비용분담협정
한국지엠(GM) 노조를 비롯한 금속노조 인천지부 노동자들이 10월10일 인천시청 앞에서 한국지엠의 법인 분할 방안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겨레

한국지엠(GM) 노조를 비롯한 금속노조 인천지부 노동자들이 10월10일 인천시청 앞에서 한국지엠의 법인 분할 방안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겨레

그런데 신설된 법인에도 이런 결정적 권한이 승계되는 것인지가 불투명하다. 이동걸 회장은 국감장에서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승계 여부를 지엠에 확인해보았느냐”고 묻자 “(주주 간 지분 비율) 83 대 17로 기계적으로 (연구법인과 생산법인을) 분할한다고 하면 승계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고 답했다.

노사 단체협약도 마찬가지다. 같은 자리에서 최종 한국지엠 부사장은 “단협이 신설 법인에도 승계되느냐”고 추 의원이 묻자 “단체협약에 명시된 근로조건은 그대로 적용된다”고 했다. 이는 연구개발 법인으로 갈 노동자 약 3천 명에 대해 현재 정해진 근로조건은 지켜주겠지만 단협은 승계되지 않음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추 의원이 다시 “향후 (지엠이 체류를 약속한) 10년 고용 보장을 약속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최 부사장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각종 노동조건과 노조활동에 대한 권리가 담기는 단협이 없는 노조는 식물과도 같다.

법인 분리가 중요한 이유는, 지엠과 한국지엠 간의 비용분담협정(CSA)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용분담협정은 본사와 자회사 간 연구개발 비용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개발기술 소유권을 어디에 귀속할 것인지를 정한 협정문이다. 지엠은 전세계 자회사들과 비용분담협정을 맺었는데, 한국지엠과의 협정에만 담긴 독특한 내용이 있다. 지엠이 철수하더라도 한국지엠과 공동 개발한 기술에 대해 한국지엠이 무상 사용권을 가진다는 것, 비용분담률에 따라 한국지엠이 로열티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는 2010년 지엠과 산업은행이 오랜 협상을 한 끝에 생긴 소중한 권리로, 당시 산은은 ‘지엠이 철수하더라도 한국지엠이 독자 생존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됐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이 권리들이 신설 법인과 존속 법인에 모두 승계되는지가 불투명하다. 이 회장은 “승계돼야 한다. 승계되지 않으면 주주로서 권한이 침해된다”면서도 이 역시 “지엠 쪽에 확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더욱이 최종 한국지엠 부사장은 10월22일 국감장에서 “비용분담협정이 올해 말에 만료될 예정으로 현재 개정을 위한 협상 중”이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지엠이 왜 서둘러 법인 분리를 밀어붙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법인 분리를 마침으로써 비용분담협정에서 지엠이 상당히 유리해진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들에는 보장하지 않았던 무상사용권과 로열티 수령권을 박탈할 절호의 기회가 지엠에 생겼다는 설명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엠은 철수할 것’이라는 말은 틀렸을 수 있다. ‘지엠은 한국에 계속 투자할 이유를 쉼없이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현 상황에 더 잘 들어맞는다. 지난 2월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 결정도 단순한 구조조정만을 뜻하지 않았다. 군산공장 폐쇄는 이후 벌어진 지엠과 산업은행의 협상에서 강력한 ‘레버리지’(지렛대) 역할을 했다. 경남 창원공장과 부평공장 등도 축소할 수 있으니 ‘협상장에 선물 보따리를 들고나오라’는 명확한 신호를 보낸 셈이다. 연구법인 분리와 관련해서도 카허 카젬 한국지엠 사장은 10월30일 국감에서 “한국지엠이 보다 견고한 입지를 갖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지엠 본사에서 더 좋은 연구개발 프로젝트나 경쟁력 있는 신차 생산 프로젝트를 받으려면 법인을 분리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철수 그 후’ 전략 짜야

그렇다면 지엠은 이제 5월 쓴 기본계약서에 따라 10년간 한국에 체류할까. 아니, 그 이전에 5월 기본계약서에 서명을 앞두고 노조와 합의한 2022년 창원공장으로의 신차 크로스오버유틸리티(CUV)를 정말 투입할까. 지엠은 많은 나라에서 중요한 정치권 일정을 앞두고 새 협상판을 벌였다. 지난 군산공장 폐쇄 뒤 협상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엠이 한국 정부를 시험에 들게 한 것이라는 평이 많았다. 창원공장은 2022년 투입으로 약속된 신차가 들어오지 않으면 생산할 물량이 ‘0’이 된다.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한판 협상이 새로 벌어질 수 있다. 자동차기업의 경쟁력은 근본적으로 경쟁력 있는 신차나 연구 프로젝트가 얼마큼 실행되느냐에 달렸고, 이 모든 권한은 지엠 손에 있다. 이번 협상만 어떻게 넘겨보자는 ‘폭탄 돌리기’는 그만하고 진짜 ‘독자 생존’ 방안을 만들 때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최하얀 기자 ch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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