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으로 인한 에어컨 사용량 급증→전기요금 폭탄 논란→누진제 폐지 여론 형성→정부 여름철 전기요금 한시적 인하→누진제 개편 또는 중장기 대책 검토.’
재난을 방불케 한 올여름 폭염 속에 누진제 논란은 지난 2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됐다. 폭염에 에어컨 사용량이 급증하며 누진제에 따른 전기요금 상승을 우려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정부는 8월7일 누진 구간 완화로 7~8월 전기요금 한시적 인하를 선언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무더위로 인한 ‘누진제 민심’을 의식해 2015년과 2016년 7~9월 전기요금을 한시적으로 내린 바 있다. 요금 할인율도 박근혜 정부는 가구당 평균 19.4%, 문재인 정부는 가구당 평균 19.5%로 비슷하다. 전기요금 한시적 인하를 발표한 뒤 “찔끔 인하”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도 판박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요금 폭탄’ 맞은 가구 1.4% </font></font>문제는 기후변화로 올해 같은 폭염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큰데 누진제 논란이 요금 할인이라는 ‘땜질 처방’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한시적 요금 인하가 한국전력(한전)과 정부 재정 부담으로 연결되고 이는 다시 국민 부담으로 귀결되는 ‘불편한 진실’은 은폐된다. 당장 올여름 전기요금 할인에 들어가는 2761억원은 정부 재난 예산이나 한전에서 일부를 부담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누진제 논란은 전력산업이 대부분 민영화된 외국과 달리 국가가 사실상 가격을 통제하며 7~8월을 제외한 시기에 비교적 싸게 전기를 이용하는 현실도 가린다.
한전의 8월1~12일 검침 자료를 보면, 지난해 여름보다 올해 여름 전기요금이 늘어난 가구는 874만 가구 가운데 659만 가구(75.5%)로 나타났다. 24만 가구(2.8%)는 전기요금에 변화가 없었고, 190만 가구(21.8%)는 지난해보다 줄었다. 8월1일이 검침일인 경우 7월1∼31일, 8월12일이 검침일인 경우 7월12일∼8월11일 전기사용량에 따른 요금이 나온다. 즉, 검침 자료엔 7월 말~8월 초 폭염에 따른 전기사용량 증가가 상당 부분 포함된 것이다. 전기요금이 늘어난 가구는 얼마를 더 부담했을까? 평균 1만7258원(전력산업기반 기금·부가세 제외)이었다.
그럼 소셜미디어와 언론에 소개된 ‘요금 폭탄’ 맞은 가구는 얼마나 될까? 한전 검침 자료에 따르면 요금이 지난해보다 10만원 이상 오른 가구는 1.4%(11만9897가구)였다. 여기에 정부 요금 인하 대책에 따라 가구별로 5802~1만9040원씩 할인받을 경우 실제 부담액은 낮아질 수 있다. 한전의 검침 자료만 놓고 보면 ‘전기요금 폭탄’을 맞은 가구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는 2016년 누진제 개편으로 300㎾ 이상 전기를 쓰는 가구의 전기요금 부담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누진제는 2005년 이후 6단계 11.7배수를 유지하다 2016년 여름 전기요금 폭탄 여론이 들끓자 같은 해 12월 3단계 3배수로 완화됐다. 한전은 도시에 사는 4인 가구(월평균 전력사용량 350㎾h)가 소비전력 1.8㎾ 스탠드형 에어컨을 하루 3.5시간(2015년 에너지경제연구원 조사 가구당 하루 평균 에어컨 사용 시간) 켤 경우 월 전기요금이 에어컨 사용 전보다 6만3천원 늘어난다고 밝혔다. 누진제 개편 전에는 에어컨 사용에 따라 10만8천원을 부담해야 하지만 누진제 개편으로 4만5천원의 부담이 줄어든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누진제 폐지의 역설</font></font>물론 1974년 오일쇼크로 유가가 급등하자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겠다는 취지로 탄생한 누진제가 44년이 지난 현재 그대로 유지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먼저 2017년 기준 가정용 전기사용량이 전체 사용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3.5%에 불과해, 에너지 절약을 위한 수요 관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전 통계를 보면 2016년 가정용 전력사용량은 약 68TWh로 집계되는데, 누진제 3단계 개편 뒤인 2017년에는 68.5TWh로 사용량은 0.8% 증가에 그쳤다. 누진제가 완화됐다고 전기 사용이 급격하게 치솟지는 않은 것이다.
가정의 전력 사용 형태도 피크시간대(최대 전력 사용 시간대)에 부담을 크게 주지 않는다. 여름철 전력 수급은 하루 중 전력 소비가 최대로 치솟는 오후 5시(피크시간대)에 안정적 전력을 공급하고 전력 소비를 줄이는 데 달렸는데, 가정의 전력 소비는 주로 퇴근 뒤인 저녁 7시 이후부터 늘어난다. 에너지 절약을 유도한다며 가정용 전기요금에만 누진제가 적용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한전이 산업용·가정용 등 용도별 전기 생산 원가를 공개하지 않아 소비자의 불신을 사다보니 전력을 많이 쓸수록 요금이 배로 늘어나는 현행 요금체계가 불합리하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누진제 개편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누진제 완화나 폐지시 전기사용량이 적은 가구가 일정 부분 전기요금이 오르고 전기사용량이 많은 가구의 요금이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진제 개편 뒤 이를 분석한 에너지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너지 수급 브리프’, 2016년 12월)는 “한 달에 250~300㎾h를 사용하는 가구의 전기요금 변화가 없으나 200㎾ 이하를 사용하는 가구에서는 요금이 상승했다(정부 보조로 실제 상승은 안 됨)”고 분석했다. 당시 누진제 개편으로 350㎾h를 쓰는 4인 가구의 경우 약 7800원 요금 부담이 줄었다. 8월20일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누진제를 폐지할 경우 1400만 가구의 전기요금 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고 누진제 개편에 신중한 견해를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2017년 평균 가정용 전력 판매 단가인 1㎾h당 108.5원을 모든 가정에 적용할 경우 1단계(942만 가구), 2단계 일부 가구(450만 가구)의 전기요금이 지금보다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누진제는 200㎾h 이하인 1구간에 1㎾h당 93.3원, 2구간(201∼400㎾h)에 187.9원, 3구간(400㎾h 초과)에는 280.6원을 부과한다. 누진제를 폐지하면 저렴한 요금을 쓰는 소비자들의 요금이 오르고, 비싼 요금을 쓰는 소비자들의 요금은 내릴 수밖에 없다. 전기를 많이 쓰는 2~3구간 930만 가구의 요금은 거꾸로 내려갈 수 있다. 이에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현재 누진제는 복지적 측면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누진제 논란은 ‘시장형 공기업’인 한전과 정부가 전기요금 가격을 사실상 통제해 여름철을 제외한 기간에 비교적 저렴한 요금으로 전기를 쓸 수 있다는 현실을 가리기도 한다. 7월 말 영국 기업에너지산업전략부(BEIS)가 발간한 ‘국제 산업용·가정용 에너지 가격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2017년 기준 ㎾h당 8.47펜스(약 125원)였다. 이는 조사 대상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8개 회원국 가운데 최저인 캐나다(8.46펜스)와 비슷한 수준이다. 독일은 26.68펜스, 일본은 16.55펜스(2016년 기준), 미국은 10.01펜스로 집계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국 가정용 전기요금 일본의 반값</font></font>저렴한 전기요금을 유지하는 것은 한전의 적자와 궁극적으로 정부 재정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는 결국 나중에 소비자나 납세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 당장 이번 전기요금 한시 인하 재원 2761억원에 대해 산업통상자원부는 “한전의 경영 여건을 감안해, 이번 한시 지원 대책에 필요한 비용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정부 재정을 통해 최대한 한전과 분담하는 방안을 강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한전은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다자녀·다가구, 출산가구, 복지시설 등 사회적 배려계층 296만 가구에 연간 4831억원 규모의 전기요금 복지할인 제도를 운용했는데, 올여름 전기요금 할인 재원이 이 돈의 절반에 해당한다.
한전은 올해 상반기 연결 기준 8147억원의 영업 적자를 냈다. 원자력발전소의 정비 기간이 길어지며 발전 단가가 높은 석탄·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 이용률이 높아졌고, 국제 유가 상승으로 원가 부담이 커진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2010년부터 발전 연료 국제 가격 등락이 요금에 반영되는 연료비 연동제가 논의됐지만, 전기요금과 물가 상승을 이유로 도입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한전은 “현재 가정용 전기요금은 원가 이하로 공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2011년 한전 일부 주주들이 “정부가 전기요금을 올리지 못하게 해 손해를 입었다”며 한전 사장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석광훈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2008년 이명박 정부는 한전 적자가 심화되자 6700억원의 공적자금(전기요금 안정화 자금)을 지원했다. 전기요금 가격통제로 소비자나 납세자가 나중에 훨씬 큰 비용을 치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누진제 개편 논의는 저소득층 에너지 복지를 확대하면서 전기요금 체계가 다양한 가구 형태와 전력 소비 형태에 맞게 세분화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합리적인 요금체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현재 누진제는 전기사용량에 초점을 맞춰 일률적으로 3단계가 적용되는데, 가구 구성원이 많을수록 전기사용량이 늘어나는 것과 전기사용량이 적은 고소득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에서는 냉난방 기기 사용을 고려해 계절별로 누진 구간을 달리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또한 산업용 전기요금처럼 가정용 전기요금도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누진제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장기 제도 개선 방안으로 계절별·시간대별 요금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를 위해 소비자가 전기사용량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지능형 전력계량인프라(AMI) 보급도 추진할 예정이다. 석광훈 위원은 “중국과 일본의 스마트계량기 보급률이 각각 70%, 50%에 이른다. 4인 가구 기준 월평균 통신비 21만원을 내는 국민들에게 한시적으로 2만원을 할인해주기보다 합리적 요금체계를 빨리 구축하는 게 필요하지 않겠냐”고 지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전 적자 결국 국고로 막아야</font></font>산업용 경부하 요금의 현실화 필요성도 제기된다. 2017년 기준 산업용 전력요금(한전 판매 단가)은 1㎾h당 107원으로 가정용 요금 109원과 비슷하다. 하지만 24시간 공장을 가동하는 대기업들은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사용하는 전기의 경우 낮 시간대 요금의 절반에 가까운 경부하 요금(여름철 기준 53.7~61.6원)을 적용받고 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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