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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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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불어 배 떨어지면 농민 책임?

재난지원금 도입된 해 최고 3억원, 깎이다가 지금은 5천만원
보험 방식 도입으로 농어민이 재해 피해의 책임을 지게 돼
등록 2012-09-11 20:25 수정 2020-05-03 04:26

올해도 태풍 ‘볼라벤’과 ‘덴빈’이 물러나자 정치인들은 농·어업 현장으로 달려갔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지난 9월6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전남 신안과 진도를,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는 앞서 9월1일 전북 정읍을 찾아 농·어업인들을 위로했다. 이들의 다짐은 한결같다. ‘신속한 피해 복구’와 ‘최대한의 지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늘 그랬듯, 이번에도 약속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입으로는 천재지변을 당한 농·어업인들을 걱정하면서도, 실제 정책은 피해 복구와 영농 재기의 책임을 상당 부분 농·어업인에게 물리고 있는 탓이다.

구호에서 지원으로, 보조금에서 보험으로
태풍·홍수·지진 등 자연재해로 삶의 터전이 뿌리 뽑힌 농·어업인들에 대한 정부의 기본 지원은 재난지원금이다. ‘재난구호 및 재난복구비용 부담기준 등에 관한 규정’은 자연재해로 사망·실종·부상을 당한 이들이나 주택을 잃은 이재민 외에 농·어업인에게도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땅과 바다에 기대 살아가는 농·어업인은 다른 업종과 달리 자연재해로 자산은 물론 미래 소득까지 모두 잃게 돼 생계가 갑자기 곤란해질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파괴된 농·어업 시설을 복구한 뒤 다시 농수산물을 생산하는 데까지 쓰이는 귀한 종잣돈이 재난지원금인 것이다. 그러나 그 최고 한도는 세대당 5천만원이다.

28일 오후 전남 나주 금천면 신가리 배밭에서 김막내(77)씨가 태풍으로 떨어진 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나주/박종식 기자

28일 오후 전남 나주 금천면 신가리 배밭에서 김막내(77)씨가 태풍으로 떨어진 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나주/박종식 기자

재난지원금은 처음 도입된 2006년만 해도 최고 한도가 3억원이었다. 각 부처에 흩어져 있던 각종 자연재해 지원금을 한데 모으니 규모가 꽤 컸다. 그런데 이듬해 2억원으로 줄어든 뒤 2010년에는 5천만원으로 대폭 깎였다. 정부가 재난지원금 도입을 계기로 자연재해 복구 지원체계를 손질하며 대책의 초점을 ‘구호’에서 ‘지원’으로 바꾼 결과다. 피해 복구의 주체가 정부에서 피해를 당한 농·어업인으로 바뀐 것이다.

정부 몫 줄이기의 방식은 보험의 확대다. 정부는 자연재해 피해에 대한 일괄적인 금전 보상을 줄이고 농어업재해보험과 풍수해보험 등 정책보험을 확대하기로 했다. 자연재해 복구대책에 민영 손해보험의 ‘실손보상 원칙’을 적용해 농·어업인의 손실에 비례해 보상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험 방식’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의 책임을 농·어업인이 지게 하려는 의도가 더 크다. 보험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피보험자가 보험료를 내야 할 뿐 아니라 피해가 발생하면 본인도 일정 부분 책임을 지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재해보험에 가입한 농·어업인이 보험금을 지급받으면 정부가 주는 재난지원금을 중복으로 받을 수 없도록 하는 조처도 정부는 잊지 않았다.

보상받으려면 농수산물 꼼짝 없이 내버려둬야

농·어업인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정부가 보험료의 절반(농작물은 지방자체단체가 평균 25% 추가 지원)을 대주고 가입 대상도 계속 늘려왔지만 보험 가입은 저조하다. 농작물재해보험의 평균 가입률은 14.5%, 양식수산물은 11.4%에 불과하다. 가입률이 낮은 데는 보험제도 시행 기간이 짧은 탓도 있지만, 보험금이 손실을 보전할 정도로 충분하지 못한데다 보험금 지급 방식이 까다로운 이유가 더 크다.

보험에 가입하면 자연재해가 왔을 때 품목에 따라 평균적으로 피해액의 80%를 보험금으로 받을 수 있다. 나머지는 농·어업인이 부담해야 하는 몫이다. 그나마 농·어업인이 추정한 피해액은 보험회사가 손해액을 결정하고 보험금을 산정하는 ‘손해사정’ 과정에 그대로 반영되기 어렵다. 가장 큰 난관은 현장 보존 원칙이다. 농·어업인이 보험회사에 피해를 증명하려면 보험회사의 손해사정사가 피해를 조사할 때까지 현장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1~2일 안에 손해사정이 끝날 수도 있지만 오랫 동안 현장을 방치해야 하는 경우도 적잖다. 특히 이번 불라벤 피해 지역은 워낙 광범위해 농작물재해보험을 전담하고 있는 NH농협손해보험이 1차 현장조사를 하는 데만 열흘 가까이 걸렸다. 상당수 농·어업인들이 이 기간에도 자식처럼 키운 농수산물 중 살려낼 만한 것을 골라내고 피해 현장을 치워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매년 꼬박꼬박 수십만~수백만원의 보험료를 내고도 손해에 크게 못 미치는 보험금을 받는 대신 차라리 보험에 가입하지 않고 재난지원금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농·어민이 많은 까닭이다.

그래도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축에 든다. 농작물 35개, 가축 16개, 양식수산물 11개 품목을 기르는 농어가를 제외하고는 보험 가입 대상이 아니다. 전남 구례에서 참나물·취나물 등 나물을 재배하는 김봉용(47)씨의 말이다. “이번에 작업장이 통째로 날아가고 비닐하우스가 훼손됐다. 3천만원 정도의 피해가 날 것 같다. 그런데 나물 종류는 보험 가입이 안 돼서 포기하고 있다. 그나마 나는 피해가 적은 편인데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피해가 큰 인근 농가들이 걱정이다.”

마지막 카드는 ‘빚’

재난지원금이나 보험금으로 복구비와 경영자금이 모자라는 농·어업인들에게 정부가 내미는 마지막 카드는 ‘빚’이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지난 8월31일 발표한 ‘태풍 피해 농어가 지원 방안’에도 융자 지원안만 한가득이다. 이미 대출한 빚이 있다면 상환 기한을 1년 연기해주거나, 추가 경영자금이 필요하면 3% 금리로 대출해주는 방식이다. 정부가 재정 투입을 최대한 줄이고 농·어업인들의 자금을 동원해 엄청난 피해를 복구하려는 꼼수나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들어 각종 보조사업이 축소된데다 해마다 자연재해까지 반복된 탓에 농가당 평균 빚이 2603만원(어가당 3786만원)에 이른다.

전남 진도에서 어류 종묘를 배양하는 조영화(46)씨는 이번 태풍으로 출하를 앞둔 치어 190만마리를 전부 잃었다. 시설 피해까지 합치면 피해액은 4억8천만원에 이른다. 그는 꼭 1년 전에도 태풍 ‘무이파’로 270만 마리의 치어가 폐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가 지난해 받은 보상은 재난지원금 5천만원과 융자 지원 6400만원이 전부였다. 여기에 1억원의 빚을 더 내 겨우 다시 일어섰지만 희망은 1년 만에 사라졌다. “지난해 빚이 5억원으로 늘어 이자만 1년 동안 2천만원 가까이 냈다. 다시 빚을 낼 생각을 하니 죽고만 싶다. 살아야 하는데 살 수가 없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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