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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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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으로 도배한 삶

학교, 결혼, 사업까지 한 편의 사기극 연상케하는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의 인생…
은행돈 쉼없이 빼돌리고 밀항 시도하다 덜미
등록 2012-05-16 18:11 수정 2020-05-03 04:26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은 겉모습만으로는 다른 기업의 사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내 수련회에서 장기자랑을 하는 모습.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은 겉모습만으로는 다른 기업의 사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내 수련회에서 장기자랑을 하는 모습.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고 나면 엉뚱한 궁금증이 인다. 조금 전 통화한 그는 일상을 어떻게 보낼까. 쓸데없는 잡념이 꼬리를 문다. 그는 ‘퇴근’한 뒤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뭐라고 가르칠까. ‘잘 속여라’ 따위를 가르칠까. 집의 가훈은 ‘많이 훔치자’거나 ‘거짓말을 잘하자’일까. 그걸 잘 못하는 아들은 아빠한테 혼날까. 상상은 적인 설정까지 이어지다가 멈추곤 한다.

서울대 법대생으로 모두를 속여

그의 삶을 보면 이런 공상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김찬경(55) 미래저축은행 회장의 얘기다. 검찰과 언론을 통해 소개되는 그의 인생을 종합하면, 학교에서 결혼, 사업에 이르기까지 기상천외한 거짓말로 도배가 돼 있다. 그의 ‘사기극’적인 인생은 20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8년 김 회장은 군 복무 기간 중에 서울대 법대생 한 명과 마주친다. 그는 “나도 검정고시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뒤 바로 입대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의 학력은 중졸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명문대와 연이 만들어졌다. 그는 제대한 뒤 서울대 법대 복학생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빼어난 언변과 넉살이 발휘됐다. 법학과 복학생 모임인 ‘법우회’의 대표까지 맡았다.

충북 음성 꽃동네에 기부액을 전달하는 모습.

충북 음성 꽃동네에 기부액을 전달하는 모습.

그는 주로 후배뻘인 79학번 법대생과 허물없이 지냈다. 그는 후배들 사이에서 ‘찬경이 형’으로 통했다.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수업은 물론 MT나 미팅도 학생들과 함께했다. 명문대 간호대 학생과 결혼도 했다. 결혼식에는 당시 법대 학장이던 황아무개 교수가 주례를 섰고, 법대 학생들도 참석했다. 신부도 물론 그의 거짓 학력에 속았다. 문제는 1983년에 터졌다. 졸업앨범 제작 과정에서 그의 실체가 탄로났다. 당시 는 1983년 2월17일치 11면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서울대 법대에서 4년 동안의 공부를 끝내고 졸업 직전 가짜 학생으로 들통난 金찬경씨(28)… 서클 대표를 맡고, 검정고시 동기회장을 맡는가 하면, 가정교사했던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았고, 장래가 촉망되는 법학도임을 가장, 장가까지 간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철면피가 아니냐는 것이 학생들이 반응. …일부 법대생들은 극성을 피워 金씨가 사법시험 1차 시험에서 평균 26점을 따낸 것을 알

제주도 은행 지점 개막식에 참여한 김찬경 회장.

제주도 은행 지점 개막식에 참여한 김찬경 회장.

주례를 선 황아무개 교수는 이 사건 이후 제자의 주례를 서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의 부인은 최근 변호사를 통해 “결혼하고 나서 30년 동안 묻어놓고 용서한 걸 끄집어내서 괴롭게 만드느냐”고 언론에 전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2년 뒤 다시 가짜 학력을 들고 등장했다. 1985년 당시 대우그룹에 지원해 합격했다. 당시 대우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졸업생에 한해 면접으로만 입사시험을 치렀다. 엉성한 인사 시스템을 그는 타넘고 들어갔지만, 회사의 학력 조회 과정에서 다시 걸렸다. 그는 입사 3개월 만에 해고됐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모습. 미래저축은행 제공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모습. 미래저축은행 제공

은행돈 빼돌려 은닉 재산 2500억원 넘어

그 뒤 10여 년 동안 그의 행적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건설 사업을 벌였던 정황만 보인다. 최근 금융감독원의 발표를 보면, 김 회장은 1999년 9월 태산건설의 대주주로서 회사의 채무에 대해 대한주택보증과 함께 연대보증을 섰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건설회사의 오너로 성장했다는 말이다. 그즈음 그는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그는 제주도에 기반을 둔 한국상호신용금고를 1999년에 인수했다. 2000년에 ‘미래’로 상호를 바꾼 뒤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2002년 예산저축은행, 2005년 삼환저축은행을 인수했다. 2005년부터는 서울 강남에 지점을 개설해 영업망을 넓혔고, 2009년에는 한일저축은행을 인수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은 화근이 됐다. 2010년 6월 말 9.34%이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1년 만에 -10.17%로 하락했다. 부실의 주요 원인은 김 회장 자신이었다. 검찰의 수사 발표 내용을 보면, 그가 은행돈을 빼돌려 은닉한 재산만 2500억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수사망에 걸려든 액수만 뽑은 것이다. 그를 둘러싼 혐의는 연이어 터져나온다. 지난 4월8일 그가 도둑맞았다고 신고한 56억원도 결국 은행돈을 빼돌리려는 자작극으로 검찰은 추정했다. 김 회장은 미술대 학생인 자신의 딸의 그림을 거액에 매입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빼돌린 혐의도 받고 있다. 부인 명의의 해산물 뷔페 사업에 은행돈 100억원을 불법 대출해준 혐의도 뒤따른다.

그는 지난 5월3일 저축은행 영업정지 조처를 앞두고 임원들을 모아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확률은 반반보다 낮아 힘들어 보이지만, 제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회삿돈 200억원을 빼내 중국으로 밀항을 하려다 경찰에 덜미가 잡혔다. 미래저축은행의 사훈은 ‘생각을 바꾸자’다. 정말, 평범한 생각으로는 그의 행적을 이해하기 힘들다.



저축은행 업계 사주들의 전횡 원인
규제 풀며 감독 손 놓은 정부 탓
미래저축은행은 김찬경 회장의 호주머니였다. 필요할 때마다 뭉텅이 돈을 빼다 썼다.
이런 상황이 미래저축은행만의 이야기일까.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금융감독원의 조사 내용을 보면, 지난 5월6일 영업정지된 한국저축은행의 윤현수 회장도 일본 오이타현에 골프장을 차명으로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회장이 필리핀 세부 리조트 건설사업에 2천억원을 대출하는 과정에도 불법의 혐의가 있다고 검찰은 의심하고 있다.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도 은행돈 5천억원을 자신이 운영하는 선박 운용업체에 투자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찬경 회장의 전횡이 딱히 저축은행 업계에서 예외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일부 저축은행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원인이 무엇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저축은행 사주들의 도덕적인 해이에 있지만, 더 큰 원인은 정부에 있다. 정부가 금융권에 대한 규제를 풀어주며 감독에는 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6년 8월 정부가 저축은행의 대출한도 80억원의 규제를 완화한 조처는 저축은행들의 고삐를 풀어줬다. 저축은행들은 부동산 사업에 대규모 대출을 하며 스스로 부실을 키웠다. 금융감독원의 관료들에게 저축은행은 퇴직 이후 찾아가는 ‘안정적인’ 일터가 됐다. 관리·감독의 사각지대에서 저축은행 가운데 일부는 정치권의 비자금 출처 구실을 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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