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1월1일 국제경제에 화려하게 데뷔한 유럽연합(EU)의 단일화폐 유로가 큰 위험에 직면했다. 유로화를 채택한 17개 유로존 회원국(Eurozone) 가운데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이 지난해부터 차례로 구제금융을 받았다. 세 나라는 고강도 긴축재정과 복지삭감 등 대규모 구조조정 정책을 실행하고 있으나 개혁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다. 이런 가운데 유로존 3·4위의 경제대국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국채 금리가 8월 초 한때 6%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경제위기가 번져갈 가능성도 높아졌다. 일단 유럽중앙은행(ECB)이 두 나라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해 양국의 국채 금리는 5%대로 떨어졌지만, 이런 긴급 처방의 ‘약효’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일부에서 우려하는 대로 유로존은 붕괴될까? 필자는 현재로선 유로존 붕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스페인과 이탈리아마저 구제금융을 받는다면 붕괴 가능성은 높아질 수 있다.
중앙은행 있지만 재무부 없어
일단 유로존 출범 때부터 지적돼온 ‘태생적 한계’는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의 분리다. 독일이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등 유로존 회원국들은 자국 화폐를 폐기하고 단일화폐인 ‘유로’를 채택했다. 따라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ECB가 유로존의 금리를 결정한다. 반면에 세금을 거두고 지출하는 재정정책은 유로존 회원국 각자의 고유 정책권한이다. 긴밀한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정책이 따로 행사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유로존 회원국은 안정성장조약에 따라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제재를 받지만 사후 교정에 불과하고 그나마 이런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는 유로존 내부 국가들끼리 구제금융 제공이 금지됐다는 점이다. 미국처럼 연방정부라면 캘리포니아주가 자연재해로 큰 어려움을 겪을 때 연방정부가 자동적으로 주정부를 지원해준다. 그러나 불완전한 연방정부인 유로존은 이런 지원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유로존 경제의 27% 정도를 차지하는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구제금융 제공 금지를 명시적으로 요구해왔다. 독일은 자칫 경제적으로 취약한 일부 회원국들의 구제금융 신청과 자국의 부담 가중을 우려했다.
그러나 유로존이 지난해 5월 그리스에 110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이런 규칙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경제위기가 심각해졌을 때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는 그리스의 잘못이다. 우리는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갔지만 결국 독일이 전체 구제금융의 약 4분의 1을 부담하게 되었다. 또 유로존 회원국들은 구제금융을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경제력 규모대로 추렴한 4400억유로 규모의 유럽금융안정기금(EFSF)을 지난해 5월 만들었다.
이른바 ‘구제금융 3국’ 모두 EU에 가입한 뒤 공동 농업정책과 지역정책을 통해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유로화 채택 이전에 이들 국가는 독일과 비교해 금리가 높아 많은 외국자본이 들어와 있었다. 유로를 채택한 뒤 금리가 전반적으로 낮아져 임금이나 물가 상승률이 높아졌지만 수출경쟁력은 떨어졌다. 유로를 통화로 선택해서 상품의 수출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제위기로 외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이들 국가는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3국이 유로존과 EU에서 탈퇴할 경우 이제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들 3개국이 유로에 지고 있는 막대한 채무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3개국이 다시 도입할 통화가 유로에 대해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유로존 탈퇴는 정치·경제적으로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독일의 선택이 주목되는 이유
독일이나 프랑스 등 핵심 국가들이 별도의 유로존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 독일은 유럽 통합을 통해 호전적인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국제무대에 복귀해 경제부흥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 통합은 평화 교란자로서 독일을 제어하는 데 큰 기여를 해온, 유럽 대륙에서 전쟁 방지라는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한 ‘평화 프로젝트’다. 만약 독일이 자국의 부담을 줄이려고 유로존 위기 해결에 소극적인 나머지 유로존이 붕괴된다면, 이 책임의 상당 부분을 독일이 질 수밖에 없다. 과연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역사책에 유로존, 나아가 EU의 붕괴를 이끈 인물로 기억되기를 원할까?
앞으로 유로존의 위기는 최소한 2~3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CB가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를 오랫동안 매입할 수는 없다. 만약 ECB가 양국의 국채 매입을 중단하고 두 나라의 국채 금리가 다시 6%를 넘어 계속 치솟는다면 유로존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럴 때 위기 해결 방안의 하나로 제안된 것이 유로존의 단일 채권인 ‘유로본드’(Eurobond)다. 현재 유로존의 17개 회원국은 각자 독자적으로 채권을 발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포기하고 유로존 단위의 단일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 유로본드의 구상이다. 이는 유로존 국가들의 재정 분야를 통합하는, 획기적인 조처다.
물론 유로본드를 발행할 경우 독일은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현재 독일 정부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2.3% 선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채 금리는 5.5% 내외다. 참고로, 투자자들이 한 나라의 경제 상황을 좋지 않게 볼수록 국채 금리는 높아진다. 독일 처지에서는 유로본드를 발행할 경우 금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유로본드의 도입이 독일에도 유리하다. 유로본드 도입은 유로존 전체가 하나의 채권을 발행해 다른 회원국의 채무를 공동으로 지급보증해주는 셈이 된다. 독일 등이 지금처럼 계속해서 구제금융을 줄 필요가 없게 된다. 현재 위기가 지속되는 이유도 경제 기초가 취약한 국가의 채무 상환 가능성이 낮다고 투자자들이 여기기 때문이다.
막판 타협의 전통 되살릴 듯
유럽 통합의 역사는 위기 극복의 역사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쟁점에 대해 회원국 수반들이 막판에 극적으로 타협을 이룬 예가 많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경제위기 전염이 가시화되면 이런 결단의 순간은 더 빨리 다가올 것이다. 문제는 정책 결정과 실행의 타이밍이다. 유로존 지도자들이 막상 결정을 내리고 실행한다 해도 이미 시장이 과민 반응해서 대책이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 있다. 시장 참여자들은 위기가 아닌데도 위기라고 여겨 과민하게 반응해 일시에 자금을 빼내가서 위기를 자초하기도 한다.
EU는 중국에 이어 우리한테 제2의 수출시장이다. 또 국내 주식 및 채권시장에 들어온 외국계 자금 가운데 절반이 유럽계다. EU와 유로존 위기가 악화되면 이런 자금의 유출 가능성은 높아진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면밀한 모니터링 작업과 함께 치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안병억 연세-SERI EU센터 초빙연구원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건희’ 정권 탄핵, 윤 임기 채울 자격 없어”…대학생 용산 집회
외신 “김건희, 윤 대통령의 시한폭탄…정권 생존 위태로울 수도”
[단독] “명태균, 용산 지시 받아 ‘비선 여의도연구원’ 구상”
“반장도 못하면 그만둬요”…윤 탄핵 집회 초등학생의 일침
이라크까지 떠나간 ‘세월호 잠수사’ 한재명의 안타까운 죽음
[단독] 강혜경 “명태균, 사익 채우려 김영선 고리로 국회입법 시도”
“전쟁이 온다” [신영전 칼럼]
해리스 오차범위 내 ‘우위’…‘신뢰도 1위’ NYT 마지막 조사 결과
“보이저, 일어나!”…동면하던 ‘보이저 1호’ 43년 만에 깨웠다
한동훈 어딨나?…윤 대통령 ‘공천개입’ 육성 공개 뒤 안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