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은 많은 노력을 해왔으며 (벌금이 부과되지 않아도) 재정적자는 적절히 관리될 것입니다. …유로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2007년 11월 비 내리는 어느 늦은 오후 벨기에 브뤼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서 필자는 유럽 공무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3년 연속 국내총생산(GDP) 대비 3%를 넘는 재정적자로 유로존 재정준칙을 위반한 포르투갈에 대한 제재 조처가 실행되지 않는다면 공동화폐의 신뢰도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점잖게, 그러나 약간은 불쾌한 듯 잘라 말했다. 필자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해 보였다.
그리스, 자구책 이행 전망 비관적어떤 일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경우가 있다. 지난해 말부터 서서히 타올라 이제 전세계 국제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그리스 재정 위기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그리스 재정 위기와 이를 대하는 유로존 국가들의 대응 과정을 보면서, 그전부터 내재했고 이미 제기됐으나 애써 무시해온 유로존의 구조적 문제를 사람들은 분명히 인식하게 됐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유로존의 재정 위기는 해결될 것인가, 과연 유로화는 믿을 만한가?
시작은 유로존의 문제아, 하지만 유로존의 변방이자 GDP 비중이 2%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 그리스에서 시작됐다. 2009년 10월 그리스의 새 정부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제출한 당해 연도 재정적자 전망치가 이전 정부가 밝힌 GDP 대비 3.7%가 아니라 12.7%에 이른다고 발표해 전세계를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은폐와 거짓말로 점철된 그리스 정부의 행태로 국제 금융시장은 크게 동요했다. 문제가 된 2009년 그리스의 재정적자만 해도 이제 와서는 13.6%로 최종 집계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위기의 핵심은 재정적자 국가들이 발행한 국채가 만기 연장이 가능한가, 신규 발행 국채가 시장에서 소화될 수 있는가다.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그리스 국채가 무려 230억유로에 달하고 내년과 후년에 만기가 되는 국채 규모는 270억유로와 300억유로로 추정된다. 그리스가 갚아야 할 대외채무는 총 3092억달러에 이른다.
그리스의 충격은 즉시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제반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한 다른 남유럽 국가로 확산됐다. 남유럽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높은 재정적자와 빠르게 증가하는 국채를 갖고 있다.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보이기도 한다. 포르투갈에서는 정부와 의회의 엇박자가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으며, 스페인은 20%에 가까운 높은 실업률과 부동산 버블의 후유증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국가들의 신용등급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기준으로 볼 때 그리스는 BB+로 투자등급 이하이고 포르투갈도 A-로 유럽중앙은행(ECB)의 적격담보 기준에 간신히 턱걸이하고 있을 뿐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로존 국가들은 무려 7500억유로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1년 국내총생산 규모에 해당하는 엄청난 재정안정 메커니즘 조성에 합의했지만, 앞으로 그리스 사태가 단기간에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재정 위기가 속성상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구책이 원만히 시행될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장은 그리스를 비롯한 문제 국가들의 정부와 국민이 자구책을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국가들은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야 할 형편이지만 당장 재정 건전화 방안만 해도 그리스 국민이 격렬히 반대하고 있다. 자구책은 주로 간접세 인상과 임금 삭감, 연금제도 개악 등 일반 국민의 실생활에 악영향을 미치는 방식인데, 그리스 국민은 위기의 원인이 독일 등 유로 핵심국의 이익 추구와 자국 고소득자의 탈세에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스 국민은 이번 구제금융을 독일·프랑스 등 유로존 주요국의 ‘자국계 은행 지키기’로 본다. 그리스가 외국계 은행에서 차입한 2362억달러의 외채 중 유럽계 은행이 보유한 것이 80%에 이르고 그 대부분을 프랑스와 독일계 은행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 국민의 고혈을 쥐어짜서 이 은행들의 투자 손실을 메워주는 꼴이란 것이다.
경기과열과 제조업 몰락그러면 이런 위기를 부르는 유로존의 구조적 문제점은 무엇인가? 가장 큰 문제점은 경제 체질이 다른 여러 주권국가를 하나의 단일통화로 묶은 데서 오는 근본적 불일치에 있다. 단일금리와 단일통화를 사용함으로써 취약한 국가들의 경기가 과열되면서 경제 체질이 더 약해지는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좀더 쉽게 얘기하자면 상황은 이렇다. 그리스 등 취약국가들은 유로존에 가입함으로써 독일 국민과 같은 유로화를 사용하고 유사한 이자율 수준을 누리게 됐다. 이 이자율은 그리스 같은 상대적 후진국에는 지나치게 낮은 수준이므로 과도한 투자 등 경기과열을 유발하게 된다. 경기과열은 스페인이나 그리스에서 본 바와 같이 부동산 버블로 연결되며, 강한 유로화로 수출제조업은 몰락한다.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가 이어진다. 실제로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은 유로존 가입 이후 10년 동안 GDP의 10%에 달하는 경상수지와 상품수지의 적자를 겪어왔다. 그리스 국민은 갑자기 자신이 부자가 된 것으로 착각했고 금융기관들은 이러한 위험한 부자에게 더 쓰라고 돈을 빌려주는 꼴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지속될 수 없다. 경상수지 적자가 계속되면서 나라 경제는 빚더미에 올라앉고 부동산 버블은 심각한 후유증을 낳게 된다. 2008년 이후 닥친 글로벌 경제위기는 버블 경제에 결정타가 됐다.
격투기에서는 도저히 체급이 맞지 않으면 자기 체급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유로존에서는 이것이 어렵다. 취약국가들이 유로존에서 일단 나가서 자국 경제를 평가절하한 다음 다시 들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유로존에는 탈퇴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 국가가 탈퇴하면 국제 투기자본들이 다른 약체국을 계속 공격할 것이다. 이 경우 유로존은 붕괴할 수 있다.
성장의 불일치는 한 국가 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어느 지역이 발전하지 않고 경제 체질이 약하면 중앙정부가 다양한 투자계획을 세워서 지역개발을 할 수 있고 교부금을 내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유로존의 경우 회원국은 재정정책에 대해서는 각자 자기 나라에 한해서만 권한을 갖고 있기에 다른 나라에 개입하기가 쉽지 않다.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파산 상태지만 캘리포니아 위기가 미국의 위기로 전염되지 않는 것은 캘리포니아가 통화·금융·재정 정책이 완전히 통합된 미합중국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대안은 ‘유럽 합중국’뿐앞으로 남유럽 재정 위기의 해결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문제 국가의 유로존 탈퇴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가시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가 나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나간다면 국제 투기자본은 다른 희생자를 찾을 것이고 유로존 방어 비용은 크게 올라간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아 있다면 비정상적 조처로라도 그리스를 살릴 수밖에 없다. 구제금융 지원 과 채무 재조정, 또는 유럽중앙은행의 국채 인수 등 충격요법도 얘기되고 있다. 어느 방법을 사용하든지 시장의 신뢰는 금이 갔고 유로존의 구조적 문제점이 부각됐다. 한때 달러화의 대안으로 언급된 유로화에 대한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고, 앞으로 몇 년간 달러 패권은 유지·강화될 것이라는 것이 시장의 한결같은 믿음이다.
유로화가 시장의 신뢰를 되찾으려면 재정 부문에 대한 추가 규율 도입 등 유로화 지키기를 위한 경제 통합의 심화 이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즉, 유럽 통합을 더욱 진행시켜 ‘유럽 합중국’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이 제안에 동의할지는 의문이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유로화의 미래는 지극히 불확실하다.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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