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라면·과자 업계의 괘씸한 ‘꼼수’들

밀가루값 떨어지자 ‘비인기 종목 위주로 조금씩 천천히’ 가격 내려…
중량 줄이는 ‘다이어트’도 수시 활용
등록 2010-02-11 15:10 수정 2020-05-03 04:26

2월 들어 라면과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반가운 뉴스가 들렸다. 라면값과 과자값이 줄줄이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을 까들어가보면, 라면·과자 업계의 ‘꼼수’를 엿볼 수 있다.
올릴 때는 팍팍 올리지만 내릴 때는 굼벵이처럼 내린다. 이것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눈속임으로 소비자를 우롱한다. 올릴 때는 잘 팔리는 상품을 팍 올리고, 내릴 때는 덜 팔리는 상품만 내린다. 가격을 올리는 대신 양을 줄이는 수법도 흔히 쓴다.

서민과 어린이가 많이 소비하는 라면·과자를 만드는 업체들은 원가가 오를 땐 재빨리 가격 인상에 나서지만, 반대의 경우엔 최대한 천천히 조금씩 가격을 낮춘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서민과 어린이가 많이 소비하는 라면·과자를 만드는 업체들은 원가가 오를 땐 재빨리 가격 인상에 나서지만, 반대의 경우엔 최대한 천천히 조금씩 가격을 낮춘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라면·제과 업계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상품 가격을 내렸다. CJ제일제당·대한제분·동아원 등 밀가루를 만드는 3곳은 연이어 밀가루 가격을 내렸다. 최근 2년 새 밀가루 가격은 20~30%가량 인하됐다. 이들 3사의 국내 밀가루 시장 점유율은 약 75%에 이른다. 밀가루값은 이렇게 많이 내렸지만, 식품업체들은 가격 인하에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료값 상승 핑계로 잽싸게 값을 올려놓더니 내릴 때는 미적미적한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2년 새 밀가루값 20~30% 떨어졌건만

결국 라면·과자 업계가 손을 들었다. 농심은 2월3일부터 라면값을 최고 50원 내렸다. 라면업계 후발주자인 한국야쿠르트와 오뚜기도 30~50원씩 가격을 인하했다. 제과업계도 마찬가지다. 롯데제과는 2월 중순께 7개 과자 가격을 4~14% 내린다. 크라운-해태제과와 오리온도 일부 과자값을 내렸다. 라면·제과 업체들은 “밀가루 원가 요인을 분석한 뒤 밀가루 양이 많은 상품을 중심으로 가격을 인하했다. 서민생활 안정을 위한 고통 분담 차원”이라고 생색을 냈다.

여기까지는 정유업체들의 수법과 비슷하다. 원유값이 오르면 재빨리 올려 휘발유 판매가를 올리지만, 원유값이 떨어지면 ‘세월아 네월아’ 하다 여론이 끓어오르면 슬쩍 내린다.

하지만 라면·과자 업체들은 또 다른 변칙을 쓴다. 잘 팔리지 않는 제품은 인하 폭을 크게 하고 잘 팔리는 제품은 인하 폭을 낮게 하거나 아예 인하 품목에서 빼버린다. 농심은 매출 비중이 가장 높은 ‘신라면’의 경우 가장 적은 20원을 내리는 데 그쳤다. 오뚜기는 주력 제품인 ‘진라면’ 가격을 인하 제품 가운데 최저 폭인 30원 내렸고 한국야쿠르트는 용기면 시장점유율 1위인 ‘팔도 왕뚜껑’을 인하 대상에서 빼버렸다. 하지만 지난 2008년 3월 밀가루 가격 인상을 핑계로 라면값을 올릴 땐, 신라면·진라면·삼양라면·왕뚜껑 등 주력 제품 값을 가장 먼저 올렸다. 당시 농심은 신라면값을 100원이나 인상했다.

제과업체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롯데제과가 발표한 인하 상품은 이름마저 낯선 비인기 품목이 많다. ‘꼬깔콘’ ‘빼빼로’ ‘빠다코코넛’ ‘제크’ 등 잘 팔리는 과자는 보이지 않는다. ‘초코파이’로만 제과 부문 매출의 반을 거둬들이는 오리온도 이번 인하 품목에서 초코파이를 쏙 뺐다. 크라운-해태제과 역시 ‘맛동산’ ‘오예스’를 가격 인하 품목에서 제외했다. 지난해 초 원자재값 인상으로 꼬깔콘과 빼빼로 가격을 최고 43% 인상한 것과는 영 다른 모습이다. 롯데제과는 지난해 초 꼬깔콘 가격을 700원에서 1천원으로 올렸다.

올릴 땐 인기 품목, 내릴 땐 비인기 품목

여기에 과자업체들은 겉포장은 똑같이 하면서 소리소문 없이 ‘다이어트’를 하는 식으로 소비자를 우롱하기도 한다. 롯데제과는 지난해 2월 말 빼빼로 용량을 33g에서 30g으로 줄였다. 가격은 올리지 않았지만 용량을 줄인 것이어서 사실상 값을 올린 셈이다. 또 ‘후라보노’ 껌과 ‘애니타임 밀크’ ‘하비스트 검은깨’ 등 9개 롯데 과자는 포장은 그대로 둔 채 내용물만 줄었다. 판매가격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내용물을 줄여 적게는 4.7%에서 많게는 17.6%까지 사실상 인상한 효과를 냈다.

과자업체의 가격 인상과 용량 줄이기는 연중 행사처럼 벌어졌다.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밀·콩·옥수수 등 원재료비가 1년 새 50~150%씩 폭등했고 유제품 수입 가격도 크게 올랐다.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고환율 정책(원화약세)은 이같은 가격 인상에 기름을 부었다. 2008년 연초 제과업체들은 원자재 가격 인상을 이유로 제품 가격을 10~20% 줄줄이 올렸다. 당시엔 원재료값 급등을 빌미로 식품업체들이 단기간에 가격을 지나치게 올렸다는 비판을 거세게 받았다.

과자업체들은 두 달 뒤인 3월에는 슬그머니 무게를 줄이는 방식으로 부담을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떠넘겼다. 크라운제과는 ‘쿠크다스’ 가격을 그대로 두는 대신 무게는 304g에서 240g으로 줄였고, ‘딸기산도’ 무게도 408g에서 323g으로 낮췄다. 오리온제과는 ‘다이제 통밀’(150g→140g), ‘초코칩쿠키’(116g→104g) 무게를 줄였다.

과자업계의 용량 줄이기는 국감장까지 번졌다. 이성헌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해 10월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롯데제과는 제과업계 빅4 중에서 나머지 회사 전체를 합친 것보다 영업이익과 순이익 규모가 큰 시장 지배적 사업자”라며 “롯데의 용량 줄이기는 상품 가격을 부당하게 결정하거나 유지·변경하지 못하게 한 공정거래법을 명백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빼빼로의 용량 변천사는 제과업체의 꼼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빼빼로는 1986년 50g으로 나온 뒤 1997년 외환위기 때 40g대로 줄었고, 2000년대 초 원재료값 상승으로 33g으로 가벼워진 뒤 2009년 다시 30g이 됐다. 용량 줄임은 주로 과자의 개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제과업체의 눈속임은 놀랄 만큼 창의적이다. 2007년 ‘롯데샌드 파인애플맛 오리지널’의 네모난 모양이 동그랗게 바뀌었다. 비스킷 외형을 바꾼 것은 디자인 변화만을 노린 게 아니었다. 모양을 바꾸면서 개당 9.3g에서 6.6g으로 줄인 것이다. 결국 112g의 중량이 80g으로 무려 32g이나 줄어들었다.

과자업체들이 이같은 상술은, 소비자가 가격에 민감하기 때문에 편법을 쓴 것이다. 소비자의 가격 저항을 피하고 정부의 물가 감시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중량 못 줄이는 라면업계는 그나마 양반?

라면업체는 제과업체를 따라 할 수 없다. 봉지 라면은 중량(120g)을 줄일 경우, 한 끼 대용이 힘들어져 과자처럼 중량을 줄여 가격을 낮추는 방법을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명 소비자시민모임 부장은 “과자와 라면의 주요 고객은 서민과 어린이, 여성이다.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은 계층들이다. 이들을 상대로 눈속임을 쓰는 것은 기업 윤리에도 어긋난다. 식품업체들이 중량을 줄일 때는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지·안내를 하거나 봉지 크기도 줄여 소비자가 알아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