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2일 이후 날치기 정국의 관심은 온통 미디어법에 쏠려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또 다른 법안이 처리된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금융지주회사법이다. 한나라당은 미디어법과 함께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기습 처리했다. 핵심 내용은 산업자본의 은행지주회사 주식 보유 한도를 현행 4%에서 9%로 확대하는 것이다. 또 산업자본이 투자자(유한책임사원)로 참여한 사모투자전문회사(PEF)가 산업자본으로 간주되는 기준도 현재보다 6~8%씩 완화했다. 은행이 아닌 금융지주회사(비은행 금융지주회사)에 대해 비금융회사(일반회사)의 지배를 허용하는 것도 포함됐다. 증권 등 금융투자회사 중심으로 영업하는 금융지주회사의 경우는 금융자회사가 비금융회사를 손자회사로 지배하는 것도 허용됐다.
개정 금융지주회사법은 앞서 국회를 통과한 개정 은행법과 함께 산업자본의 금융 지배를 엄격히 규제하는 금산분리 원칙을 크게 훼손했다. 재벌이 은행을 직접 지배하고, 계열 금융회사를 통해 비금융회사를 지배하는 길을 더욱 넓혔다. 물론 재벌이 은행 지분을 9%로 갖는다고 해서 당장 경영권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추가 완화도 추진할 방침이다. 이번 법 개정이 금산분리 완화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에 심각성이 있다.
정부는 즉시 법률 개정의 효과를 강조한 보도자료도 배포했다. 금융위는 “국내 은행산업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보험·증권 등 비은행 금융산업이 선진화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자화자찬했다. 산업자본의 참여 확대로 은행 민영화와 자본 확충이 더욱 쉬워졌다는 것이다. 보수 언론들도 “은행과 금융산업의 빅뱅을 위한 기폭제가 마련됐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와 경제개혁 운동을 주도해온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비난 성명을 쏟아냈다. 참여연대는 “국가경제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금융지주회사법을 미디어법의 들러리로 전락시켰다”며 맹비난했다. 경실련은 “금산분리라는 글로벌 기준을 파기하고,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의 정책 방향과도 맞지 않으며, 금융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은 금융규제와 감독을 강화하는 추세다. 한 예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17일 발표한 금융개혁안에서 “은행업과 상업을 분리시키는 정책은 재확인되어야 하며,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지주회사그룹에 대한 통합감독을 통해 금융위기 가능성이 줄고, 재벌의 복잡한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으며,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금융그룹의 육성을 도모한다는 정부의 설명은 국민을 속이는 사기극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MB의 금산분리 완화로 인해 가장 주목을 받는 대상은 한국 최대 재벌인 삼성이다. 삼성은 이건희 전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를 시작으로 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 → 다른 계열사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로 이뤄진 후진적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는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삼성 스스로도 지난해 4월 삼성특검 수사가 끝난 뒤 발표한 경영쇄신안을 통해 지배구조 개선을 약속했다. 가장 유력한 대안은 지주회사제로의 전환이다. 지주회사제는 지주회사 → 자회사 → 손자회사로 이어지는 수직적 출자만 허용한다. 따라서 순환출자 구조에 비해 소유 구조가 단순·투명한 것이 최대 장점이다.
삼성은 지난 4월 경영쇄신안 발표 때 “은행업에 진출할 의사가 없다”고 천명했다. 또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도 수십조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부정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데 관건은 삼성전자의 처리다. 현행 지주회사제에서는 상장자회사는 20% 이상의 지분 보유를 의무화하고 있다. 주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삼성전자의 지분 1%를 보유하는 데 1조원 정도가 필요하다.
삼성, 정부·여당 상대 집요한 로비하지만 삼성의 말을 뒤집어보면 이런 부담 없이 지주회사제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실제 삼성은 이를 위해 정부를 상대로 집요한 로비를 벌였다. 금융감독 당국의 관계자는 “정부가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확정하기 직전까지 삼성은 에버랜드-삼성생명으로 이어지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더라도 생명의 자회사인 삼성전자는 지주회사 체제로 편입되지 않도록 법 개정을 해달라고 금융위, 공정위, 한나라당에 로비를 했다”고 털어놨다. 삼성은 이런 요청과 관련해 구체적인 방법도 이미 제시했다. 현행법상 ‘계열사이면서 최대 주주’로 되어 있는 자회사 규정을 ‘계열사이면서 지분이 10% 이상인 최대 주주’로 더 완화해달라는 것이다. 현재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지분을 7.2% 갖고 있는 최대 주주다. 삼성이 에버랜드-생명으로 이어지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경우 전자는 바로 생명의 자회사에 해당한다. 정부의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보험 자회사(삼성생명)가 비금융 손자회사(삼성전자) 보유를 금지하기 때문에, 삼성으로서는 생명이 갖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을 제2주주인 삼성물산의 지분(4%) 밑으로 낮춰야 하는 부담을 피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삼성의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사실상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의 특혜를 달라는 삼성의 요구는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개정된 금융지주회사법과 은행법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자회사 규정을 제외한 나머지는 삼성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했다. 시민단체들은 그 근거로 지난 2005년 삼성 사장단회의에서 논의한 ‘삼성 금융계열사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로드맵’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로드맵 21쪽을 보면 “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가 비금융계열사 지분을 보유할 수 있게 허용되면 그룹 지배권을 유지하면서 지주회사로 전환히 가능하다”고 명시돼 있다. 개정 금융지주회사법은 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공정거래법마저 개악 땐 재벌에 날개삼성의 한 고위 임원은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을 놓고 삼성에 특혜를 준 것처럼 말하는데 어불성설”이라며 “삼성 문제를 풀어준 것이 뭐가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회사 규정이 삼성이 원하는 대로 개정되지 않은 것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이번 법 개정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삼성은 그동안 엄청난 자금력과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한 강력한 로비로 법과 제도를 자기 입맛대로 바꿔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우찬 경제개혁연구소 소장은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전정지 작업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면서 “일단 물꼬가 열린 만큼 삼성의 희망대로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국회에 계류 중인 공정거래법 개정안이다. 핵심 내용은 일반지주회사도 금융자회사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공정위는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이후 지주회사제 그룹들이 다른 일반 그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도한 규제를 받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재벌들의 금융사 보유를 사실상 용인해준다는 우려가 많다. 개정 금융지주회사법과 쌍둥이인 셈이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전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이는 비결 중 하나로는 엄격한 금산분리 원칙을 지켜온 덕이라고 설명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금융과 비금융 부실 간에 차단벽이 쳐져 부실의 전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친기업정책을 내건 MB의 금산분리 완화 내지 폐기가 한국 경제를 위기에 더욱 취약한 체질로 만드는 독이 될 공산이 높다.
곽정수 한겨레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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