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2일 오전 서울 역삼동 강남파이낸스센터 22층 구글코리아 사무실. 구글코리아의 1분기 실적 발표 기자 간담회 자리였다. 하지만 기자들 가운데 아무도 실적에 관해선 묻지 않았다. 표현의 자유와 실명제 논란에 대한 질문만 이어졌다.
이원진 구글코리아 사장은 유튜브의 실명제 거부 방침에 변화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사장은 “사용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결정이다. 실명제가 사용자나 인터넷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 사장은 “인터넷은 수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었고 그러한 의견들이 부딪칠수록 세상은 좋아진다. 인터넷에서 부딪치는 의견이 100만 개에서 1천만 개로 늘어날 수 있도록 해야지 1만 개로 줄도록 만드는 법을 적용하는 것은 인터넷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라며 인터넷 실명제를 비판했다.
올해 초 개정된 정보통신망법 44조 5항에 따라 지난 4월1일부터 하루 평균 이용자가 10만 명 이상인 인터넷 사이트는 게시판 사용자의 본인 확인을 거쳐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를 어긴 사이트에 시정 명령이나 3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계획이다.
지메일 정보 제공도 ‘명확한 사유’ 전제이에 맞서 구글코리아는 4월9일 유튜브 한국 사이트에서 동영상 업로드(올리기)와 댓글 기능을 폐쇄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실명제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서비스를 제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물론 미국 본사가 운영하고 있는 사이트(youtube.com)로 접속해 ‘한국어 서비스’를 선택하면 게시물을 아무런 제한 없이 올릴 수 있다.
구글코리아는 또 정부나 수사기관이 구글의 전자우편 서비스인 ‘지메일’의 사용자 정보를 요청하더라도 명확한 사유 없이는 거부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정부는 구글코리아에 지메일 이용자 정보를 10여 건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이원진 사장은 “지메일은 (별도의 국내 법인이 없이) 서버가 해외에 있다. 한국 법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즉, 지메일은 한국 검찰이 압수수색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 사장은 “지메일은 전세계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로벌 서비스다. 어느 나라에서나 통할 만한 명확한 이유가 있을 경우 (사용자 정보 제공에) 최대한 협조할 것이나 그 외의 경우 법적 판단보다 도덕적 기준을 따져 정보 제공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문화방송 〈PD수첩〉의 명예훼손 여부를 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PD와 작가들의 포털 사이트 전자우편을 제집 뒤지듯 압수수색했다. 지난해 촛불시위에 참여한 누리꾼들도 전자우편 압수수색을 당했다. 심지어 검찰이 지난해 주경복(59·건국대 교수)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을 수사하면서 수사 대상자 100여 명의 최장 7년치 전자우편을 통째로 압수해 열어봤다고 최근 가 보도했다. 앞서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2008년 상반기 네이버와 다음에서 3306건의 전자우편 압수수색이 이뤄졌다고 밝힌 바 있다. 전자우편 압수수색은 본인에게 통보 없이 이뤄져 국민의 알 권리와 개인의 사생활 보호 문제까지 낳았다.
구글코리아의 거듭된 실명제 거부 방침에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발끈했다. 최 위원장은 4월22일 국회에서 “(실명제 거부가) 너무도 교활한 편법으로 우리의 법률 체계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우리 법 체계를 지극히 지능적으로 이용한 편법이자 탈법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방법의 영업 전략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어 법적·기술적으로 어떻게 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실명제 논란의 득과 실을 주판알로 튕겨보자. 지금까지 최대 굴욕을 당한 쪽은 우리나라 정부다. 일단 직격탄은 청와대가 맞았다. 청와대는 지난 3월27일 이명박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을 유튜브에 업로드하겠다고 밝힌 터였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의 동영상을 한국 국적으로 올리지 못하게 됐다.
이에 대해 청와대 쪽은 “유튜브가 실명제 거부 방침을 밝히기 전부터 이미 ‘한국’이 아니라 ‘월드와이드’(world-wide) 항목을 통해 동영상을 제공해왔다”는 점을 애써 강조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명박 대통령의 국적은 전세계?’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어 “이 대통령이 전세계와 소통하고 싶다면, 비판적 언론 탄압과 인터넷 여론 통제를 즉각 포기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꼬집었다.
실명제 거부 사태는 국제적 망신거리로 번지고 있다. 등은 4월13일(현지시각) 인터넷판에서 유튜브가 한국에서 업로드와 댓글 기능을 폐쇄한 조처를 잇달아 보도했다. 는 ‘구글, 프라이버시 보호 위해 유튜브코리아의 업로드 기능 폐쇄’란 제목의 기사에서 “우리는 표현의 자유와 개방성을 중시하며, 이용자들이 익명성을 원한다면 (익명으로 의사표현을 할) 기회를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루신다 발로 유튜브아시아 대변인의 말을 전했다.
불똥은 국내 포털 사이트로 튀었다. 다른 포털들은 졸지에 ‘통제된 사이트’가 된 것이다. 정부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업체를 놔두고 국내 업체에만 규제를 강요할 경우 ‘역차별 문제’가 생긴다. 일부 포털들은 국내 업체만 규제를 따르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방통위는 필요하다면 구글도 제재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지만 이조차 쉽지 않다. 유튜브가 스스로 게시판 기능을 없앤 이상 실명제 준수 대상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국내 포털에만 쇠몽둥이를 휘두르게 됐다. 지메일은 손도 못 대면서 국내 포털의 전자우편은 수시로 압수수색했다. 국제적인 망신거리를 자초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국내 포털 위축으로 사이버 망명 우려지금까지 승자는 구글이다. 어쨌거나 ‘표현의 자유’를 앞세운 구글의 전략은 누리꾼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구글의 해외 사이트는 규제 일변도의 정책을 피해 해외 사이트로 옮겨가는 이른바 ‘사이버 망명’ 효과도 톡톡히 보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논란이 될 수 있는 동영상이나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는 사용자제작콘텐츠(UCC) 등을 올릴 수 있는 정치적 피난처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누리꾼 사이에선 유튜브는 ‘인터넷 망명처’ 또는 ‘자유의 땅’으로 비쳐지고 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인터넷 여론 재갈 물리기’ 논란에 불을 댕긴 것도 구글이었다.
성동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정책협력팀장은 “정부가 인터넷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은 국경을 넘어서는 서비스인데 이를 국내법으로 규율하려다 보니 여러 혼란이 생긴다. 규제보다 인터넷의 자정 능력을 믿고 자율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는 “표현의 자유와 명예훼손 보호는 모두 다 중요한 가치다. 인터넷 공간에서 이 두 가치는 종종 충돌한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 다른 가치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런 문제는 정부가 직접 개입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포털 업체들은 변호사 등 전문가 위주의 자체 위원회를 꾸려 명예훼손을 방지하고, 정부는 이런 자율적 해법을 존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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