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0일. 오후 5시가 되자 GM대우 부평공장 남문으로 주간 근무를 하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쏟아져나온다. 매일 2~3시간씩 이어지던 잔업이 생산 물량 감소로 없어진 탓이다. 공장 울타리에는 ‘GM대우차 타기 운동’ ‘GM대우차 택시만 이용하자’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큰길 건너에는 해고자 복직과 비정규직 철폐 등을 요구하며 1년 넘게 농성하고 있는 GM대우자동차 비정규직지회의 천막이 보인다. 전날 마이클 그라말디 GM대우차 사장은 “재고 물량을 줄이기 위해 12월에 부평2공장 가동을 근무 일수 기준으로 22일간, 부평1공장은 7일간 각각 중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칼로스’와 ‘젠트라’를 생산하는 조립 1공장에서 일하는 김정현(37·가명)씨는 퇴근 뒤 곧장 남문 근처 삼겹살집에서 소주잔을 들이켰다. GM대우의 정규직이 아니라 사내하청으로 일하는 1차 노무도급 업체 직원인 김씨의 지난달 월급은 95만원. “어제 사장이 정규직들한테는 ‘걱정하지 마라, 같이 간다’고 했다는데, 그러면 거의 비정규직들이 일자리를 잃고 그 자리를 정규직들이 전환 배치되는 것 아니냐”고 그는 푸념했다. 박원생(34·가명)씨는 “내 처지가 형만 해도 바랄 게 없겠다”고 말을 받는다. 중학교 2학년과 6살짜리 아이 둘을 혼자 벌이로 키우는 박씨는 김씨보다 사정이 절박하다. “마누라한텐 (회사 일을) 말도 안 했어요. 어차피 올 것, 미리 걱정시킬 필요는 없잖아요. 솔직히 아직은 2차 (도급업체) 사람들보단 사정이 낫기도 하고.”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까지 번지면서, 국내 산업계에도 11년 전 외환위기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완성차 업계에서는 최근 내수·수출 동반 부진으로 고전하던 쌍용차가 유급 휴직을 발표한 데 이어, GM대우마저 부평공장의 가동 중단을 선언한 상태다. 7년 전 정리해고 관련법 제정 이래 최대 규모인 1750명이 한꺼번에 해고된 옛 대우차의 기억은 아프다. 하지만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파산 문턱에 이른 제너럴모터스(GM) 그룹의 마지막 동아줄로 여겨질 만큼 튼실한 펀더멘털을 보여온 GM대우임을 감안하면, GM대우의 몰락을 선언해버리는 것도 섣부른 일일 것이다.
지금 한국의 자동차 업계에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환란 때 최대의 피해자가 대량실직으로 내몰린 대기업 정규직들이었다면, 현재의 위기가 심화될 때 가장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될 경제 주체들은 누구일까? 해답의 실마리는 대기업과 1·2·3차 납품업체, 대공장 내 정규직과 1·2·3차 사내하청·비정규직으로 엮인 가치사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비정규직을 포함한 ‘총고용’ 유지에 나선다는 방침을 세운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지난 11월 초부터 전국 지부들로부터 현장 현황 보고를 받고 있다. 11월21일 현재 9개 지부 73개 지회(기업별 조합)의 보고가 도착했는데, 대부분 완성차 납품업체인 이들 기업에서 생산 물량이 축소되고, 일부에서는 이미 인적 구조조정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경기·인천 지역 사업장 가운데 GM대우 납품 비중이 높은 곳들은 GM대우의 휴업 일정에 맞춰 조업 단축이나 부분 휴업에 나선다. A사와 B사는 11월 말부터 2009년 1월 초까지 생산직 절반 이상이 휴업에 들어가고, C사는 회사 쪽에서 물량 감소를 이유로 야간근무조를 주간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이 밖에 쌍용차에 카오디오·내비게이션 등을 공급하는 D사는 생산 물량이 절반 가까이 줄었으며,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E사는 건설기계 부문의 물량 축소에 따라 해당 분야 작업 시간의 70~80%를 교육으로 대체할 예정이다.
대전·충청권에서도 초과수당이 붙는 연장근무 등을 줄이고 구조조정에 나서는 사례들이 목격된다. 자동차용 모터를 만드는 F사와 독일 차부품 업체의 한국 법인인 G사에서는 사무직들을 구조조정하려는 움직임이 보고됐다. 에어컨 등을 납품하는 업체들 중 H사는 야근자들이 낮 시간에 출근해 공장 청소를 하거나 교육을 받고 있고, 외국계 기업 I사는 11월 작업 물량이 7.5일분에 그쳐 노동자들이 청소 같은 비생산 업무를 하고 있다. 피스톤·실린더 등 엔진 부품을 만드는 J사의 영동공장도 제품 생산을 야간에만 할 뿐, 주간에는 공장 정리만 하고 있다.
대규모 부품사들 임시직 대폭 감축대규모 부품사들이 많은 영남 지역의 사정도 비슷하다. 세계 최대 부품업체의 국내 법인인 K사는 조향·제동·전장 등 분야에서 273명이던 임시직을 최근 170명까지 줄였다. 현대차·GM대우 등에 도어 부품을 공급하는 L사에서는 물량 감소에 따라 생산직을 대상으로 6주간 순환교육을 벌이고 있으며, 이후 구조조정에 들어갈 전망이다. 금속노조 가입 사업장은 아니지만, 생산 물량의 90%를 GM대우에 납품하는 이원솔루텍은 잔업·특근을 폐지해 4억원이던 직원 인건비를 2억7천만원까지 낮췄으며, 에어백 등을 만드는 S&T대우는 생산라인별 순환휴업을 검토하고 있다.
올 초 GM대우를 비롯한 완성차 업체들의 물량 감소가 닥치기 이전에도 국내 자동차 부품·소재 업계는 대-중소기업 간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전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급등에 정부의 환율 상승 정책이 기름을 부으면서, 비싸진 제조원가를 누가 떠안을 것인지를 두고 치열한 힘겨루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GM대우를 비롯한 완성차 업체들의 물량 감소라는 새로운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맞게 되는 부품·소재 중소기업들이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GM대우의 1차 협력업체인 H정밀은 최근까지 비엠금속을 비롯한 6개 주물업체와 납품 단가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주물업체들은 최근 전기료·부자재비 급등에도 불구하고 낮아진 고철 가격을 반영해 주물 단가를 kg당 50원씩 낮췄는데도, H정밀에서 9~10월 납품대금 결제를 해주지 않으면서 추가적인 인하를 부당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주물업체들은 올해 초 수차례 납품 중단이라는 실력 행사를 통해 원재료인 고철의 가격 상승분을 납품 단가에 일부 반영한 바 있다. 또 볼트·너트를 제조하는 파스너 업체들도 최근까지 GM대우 납품업체들과 납품 단가에 원자재 비용을 반영하는 문제로 싸워오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물량 줄이겠다’ ‘단가 깎겠다’며 쥐어짜기만 한다면, 제조업 경쟁력의 뿌리인 중소기업들은 줄도산하고 말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사내하청 노동자 2500명 “생계 걱정”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자동차 업계의 고용불안은 비정규직들에게 가장 먼저, 또 가장 깊게 상처를 남기게 될 전망이다. 쌍용차는 이미 비정규직 협력업체 직원들이 담당하던 부문을 정규직으로 교체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내년 9월 새로운 스포츠실용차(SUV) 모델이 생산될 때까지 휴직을 해야 하며, 복귀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GM대우의 사내하청 노동자는 2500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1차 업체에 소속된 인원은 1400명 안팎이다. 나머지는 생산라인에 투입된 2~3차 도급업체나 청소·경비 용역업체에 속해 있다. 연봉 수준은 1차 업체가 정규직의 50% 수준이고, 2차 업체는 1차 업체의 70% 정도다. 2차 도급업체 직원 신분으로 조립공장에서 일하는 박성엽(48·가명)씨는 “12월부터 내년 3월께까지 무급 휴직 처리를 한다는데, 당장 생계를 이어가는 게 걱정”이라며 “정규직이나 1차 업체들과 달리, 2차 업체에선 벌써부터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고 귀띔했다. 대우일렉 인천공장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던 박씨는 지난해 구조조정을 당한 뒤 노무도급 업체들을 전전하고 있다. 완성차에 납품하는 부품·소재 업체들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모터 제조업체 M사는 현재 일감이 줄어든 정규직들을 비정규직 사원들이 맡고 있는 박스포장 작업으로 전환 배치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규직 노조, 비정규직 해고 막아야”당장은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고용불안에 대한 안전판처럼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2~3년 이상 장기화될 것으로 예견되는 상황에서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 10% 선이던 제조업 비정규직 비율이 지금 20~30% 수준으로 늘었다지만, 결국은 정규직도 구조조정의 예외가 되기 힘들다는 것이 노동문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노동연구원의 은수미 연구위원은 “한국 기업들은 1998년의 경기 악화 때 고용조정을 해봤을 뿐, 임금이나 노동시간 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본 경험이 없다”면서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일자리 정리에 나서면서 내년 실업자 수도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암울한 노동시장 상황을 극복할 해법은 뭘까. 은 연구위원은 “정규직 노동조합은 자신들은 물론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조정을 막아내고 일자리를 나눌 방법을 찾아야 하며, 정부도 실업자·취업준비생 등 취약계층에 대한 긴급한 실업 대책과 중·장기 고용대책을 함께 세워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국내 자동차업계 경영 현황
<font size="3"><font color="#006699">판매 부진에 엔화 부품값 ‘타격’</font></font>
국내 자동차 업계에 ‘빨간불’이 켜진 것은 GM대우 탓만은 아니다. 현대기아, GM대우, 르노삼성, 쌍용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지난 10월 26만5천여 대를 세계 시장에 내다팔아, 전년 동기 대비 4.5% 감소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올해 1~10월 누적 수출량도 전년 동기 대비 3.6% 줄었다.
일단 GM대우의 위기는 모기업 GM의 영향이 크다. 2002년 설립된 GM대우는 2005년 당기순익 655억원을 달성하며 흑자 전환을 이룬 뒤 2006년과 2007년 각각 5900억원과 540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2005년 7조5천억원이던 매출액도 지난해 12조원을 웃돌았다. GM대우 부평공장은 그동안 생산 물량의 대부분을 GM 계열인 시보레 브랜드 등으로 수출해왔다. 하지만 최근 미국·유럽 시장에서 판매가 급감하자, 알짜 사업장이던 부평공장까지 휴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일본 닛산에서 핵심 부품 일부를 수입하는 르노삼성차도 판매 부진에 더해 엔화 상승에 따른 수익성 악화까지 겹치며 시름하고 있다. 최근에는 르노삼성이 잔업 중단과 생산 조절에 들어가는 바람에, 부산 일대 르노삼성차 납품 부품업체들의 공장 가동률도 50% 이하로 떨어진 상황이다. SUV가 주력이라 경유를 비롯한 유가 상승에 직격탄을 맞았던 쌍용차는 지난 10월부터 평택공장 잉여 인력 350여 명에 대한 유급 휴직을 실시하고 있다. 세계 5대 완성차 업체로 국내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는 현대기아차도 속사정이 편하지 않다. 지난 3분기 내수는 9.9% 줄었고, 소폭 증가한 수출도 소형차 위주여서 영업이익은 감소하는 추세다.
전세계 자동차 판매가 내년엔 5% 정도 줄어들 전망이어서, 완성차 업계에 드리워진 그늘은 점점 더 짙어지는 분위기다. GM대우의 임시 휴업도 자칫 2~3개월을 넘는 장기 휴업까지 치달을 수 있다. GM 생산직 노동자들의 반응은 공장별로 다소 온도차를 보인다. 경차 마티즈를 만드는 창원공장, 준중형차 라세티를 만드는 군산공장, 소형차 젠트라를 생산하는 부평1공장 쪽보다는 중형차 토스카와 SUV인 윈스톰을 생산하는 부평2공장 쪽에서 불안감이 더 심하다.
자동차 업계의 긴축과 비상경영은 협력사들을 포함한 실물경제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게 된다. 전문가들은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10억원 상당의 자동차를 생산할 경우, 전·후방 산업 연관 효과로 25억원 이상의 부가가치를 올리는 것으로 추정한다. 자동차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는 경제활동 인구도 120만 명이나 된다. GM대우만 치더라도 협력업체 수가 직접 부품·소재를 공급하는 1차 납품업체 300여 곳을 포함해 총 1만여 곳에 이른다. 자칫 자동차 업계의 부진이 장기화될 경우 일자리 창출과 이에 따른 경기 회복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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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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