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오랜만에 웃었다. 10월30일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한-미 재계회의에서다. 이 자리에서 윌리엄 로즈 씨티그룹 부회장은 “한국은 강만수 장관 같은 노련한 장관을 둬서 행운”이라고 말했다.
이날 아침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한-미 통화 스와프 협정을 발표했다. 원화를 담보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최대 300억달러를 내년 4월 말까지 한국은행에 빌려주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코스피 지수는 115.75(11.95%) 급등해 1084.72로 장을 마감했다. 원-달러 환율은 115원 떨어진 1250원에 마쳤다. 이번 협정은 날로 거세지던 ‘강만수 장관 사퇴론’도 한방에 날렸다.
재정부는 한-미 통화 스와프 협정에 대해 “재정부의 기획, 한은의 실무 협상으로 나온 결과”라고 설명했다. 신제윤 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은 강 장관은 9월19일 자신에게 통화 스와프 협정 추진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국제 금융시장에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칠 때였다. 당시 금융 위기로 선진국들마저 달러난을 호소하자 미국은 주요 국가들과 통화 스와프를 확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해선 소극적이었다. 원화가 달러와 교환할 만한 국제통화가 아닌데다 한국의 신용등급도 선진국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0월12일 워싱턴에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와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가 열렸다. 강 장관은 기조연설에서 선진 7개국(G7)에 포함되지 않은 신흥시장 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선진국 사이에 이뤄지는 통화 스와프 대상에 신흥시장 국가가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장관은 다음날 뉴욕에서 로버트 루빈 전 미 재무장관과 빌 로즈 씨티그룹 부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며 통화 스와프를 요청했다고 한다.
미 전 재무·씨티 부회장에 호소일부에선 미국에 대한 강 장관의 압박이 통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강 장관은 IMF 연차총회에서 ‘리버스 스필오버’(역전이 현상) 논리를 폈다. 우리나라가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 보유 중인 미 국채를 팔 수밖에 없게 돼 선진국들이 공조해 금융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반감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10월30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회의 직전 “강 장관이 미국에 가서 얘기를 잘한 것 같다”며 공을 치하했다.
그러나 ‘압박론’은 이번 협정이 미국의 네 번째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정부로선 펄쩍 뛸 일이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번 협정을 두고 “미국산 쇠고기 추가 협상, 미 지명위원회의 독도 영유권 표기 원상회복, 워싱턴 다자간회의인 G20 참여에 이은 부시 대통령의 네 번째 선물이라 해도 괜찮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정부가 강 장관에게 너무 힘을 실어주자, 한은은 “밥상을 차리니 저쪽에서 숟가락을 얹으려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협상 결과를 놓고 한은 쪽 설명은 사뭇 다르다. 재정부가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강 장관이 안면이 있는 이곳저곳의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 부탁받은 사람들은 그냥 호의적인 발언, 즉 립서비스 정도의 말을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권자들이 아니었다. 재정부는 그걸 갖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했다고 떠들고 있다”고 말했다.
한은은 이번 협상 파트너가 우리나라의 재정부 격인 미국 재무부가 아니라 미국의 중앙은행인 FRB라는 점도 강조한다. 한은 관계자는 “강 장관이 로즈 부회장을 만나 부탁해 성사됐다고 하는데 말이 되나? 그 말대로라면 미국의 FRB가 로비에 놀아났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 쪽에서도 기분 나빠할 것”이라며 쏘아붙였다. 한은은 또 극비리에 진행되던 협상 내용을 재정부가 사전에 흘렀다며 불쾌해하고 있다.
민주당은 정부가 성급히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현 민주당 부대변인은 10월30일 “마치 개선장군을 대하듯 ‘강만수 경제팀 사수’를 외치는 이 대통령과 일부 한나라당 인사들의 발언을 듣고 있노라면 1997년이 자꾸 연상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강 장관이 아무리 소금회 멤버이고 대통령과 26년간 우정을 지켜온 친구 사이라고 해도 대한민국의 경제를 두 번씩이나 볼모로 삼게 놔둘 수는 없다”며 거듭 강 장관 경질을 촉구했다.
여하튼 진퇴의 위기에 내몰렸던 강 장관은 이번 협정으로 당분간 숨을 돌리게 됐다. 협정 타결 며칠 전인 10월26일 은 ‘한국 경제장관, 원화 약세와 씨름… 상황은 더 악화’라는 기사에서 이 대통령과 강 장관을 ‘리·만브러더스’(LeeMan Brothers)라고 지칭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기사는 ‘한국에서 유행하는 조크’라고 덧붙였지만, 이런 신조어를 소개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 경제 사령탑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조·중·동으로 불리는 보수 신문 가운데 도 강만수 경제팀의 리더십을 거론하며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여러 차례 보도했다.
한은 “밥상 차려 놓으니 숟가락 얹어”은 10월13일치 제730호 표지이야기 ‘누가 감히 강만수에게 돌을 던지랴’에서 강 장관을 ‘돈키호테’에 빗대 그가 왜 고환율과 747 공약(연평균 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7대 경제 강국)에 집착하는지를 드러내 보였다. 또 이 대통령과 강 장관은 ‘소금회’(소망교회 금융인 선교회) 인연으로 쉽게 결별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기사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포털에도 오른 그 기사에 따라붙은 1200여 개의 댓글은 칭찬 일색이었다. 강 장관이 국민에게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 장관은 10월28일 국회 기획재정위 전체회의에서 “미움의 매는 사람을 분발시키는 사랑의 채찍과 달리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파멸한다고 배웠다”며 자신을 비판한 언론과 시민단체, 야당에 대해 한마디 했다.
한 독자가 의 강 장관 기사 가운데 압권이었다며 한 대목을 전자우편으로 보내왔다. “이명박 대통령도 (소금회) 멤버였다. 99년부터 두 사람은 급속하게 친해졌다. 동병상련의 심정 때문이었다. 강 장관은 IMF로 옷을 벗었을 때였다. 이 대통령은 당시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힘들 때 친구가 오래가는 법이다. …‘임면권’을 따지기 좋아하는 대통령만 위기 대처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면 그만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강 장관의 외교적 레토릭이 새삼스럽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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