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이 환헤지 수단으로 판매… 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막대한 환차손, 정부는 기업에 책임 떠넘겨
▣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유니폼을 생산해 연간 60억원어치를 수출하는 중소기업 A사의 김아무개 사장은 지난 3월 거래은행 지점장으로부터 환헤지(환율변동 대비) 상품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국내외 경제 여건상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상승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환율 하락에 따른 손실을 대비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무슨 상품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김 사장은 “가입 의사가 있으니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십시오”라는 문구가 인쇄된 ‘의향서’에 서명을 하고 은행에 제출했다.
의향서 서명 2주만에 날벼락
의향서를 낸 지 2주가 지난 뒤 김 사장은 은행으로부터 갑자기 환율 관련 손실이 발생했으니 대금을 입금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 환헤지 상품이 환율 상승 때는 오히려 큰 손실을 끼칠 수 있는 위험성 등을 설명하는 10쪽짜리 계약서도 그제야 날아왔다. 김 사장은 은행에 전화를 걸어 “왜 계약서를 늦게 보냈느냐, 위험 사유는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했지만, 담당자는 “외환거래에선 거래의향서가 곧 계약서를 의미한다”면서 “환율 상승에 따른 손실금 1500만원을 빨리 상환하라”고 독촉할 따름이었다.
김 사장에게 ‘황당한’ 손실을 안겨준 환헤지 상품의 이름은 ‘키코’(KIKO·Knock In Knock Out)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4월 키코를 판매한 은행들을 두고 “투기세력보다 더 나쁜 세력은 지식을 악용해서 선량한 시장참가자를 오도하고 그걸 통해 돈을 버는 ‘에스(S)기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키코 사태가 불거진 지 넉 달이 지난 지금, A사 사장은 자신이 부당하다고 믿는 거래를 무효로 하거나 손실액을 줄일 수 있었을까. 정답은 ‘아니올시다’다. 김 사장은 “처음엔 정부가 은행들의 잘못이라고 비판하더니, 요즘은 중소기업들이 투기를 했으니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면서 “지인들에게 자금을 빌리고 종업원 수를 줄이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제 수억원으로 불어난 손실금을 감당하기 힘들어 폐업을 해야 할 판”이라고 호소했다.
시중은행들이 중소기업들에 환헤지 수단의 하나로 판매한 키코는 기업이 지정한 환율에 달러를 팔 수 있도록 하는 옵션거래 상품이다. 환율이 일정 구간 안에서 움직일 경우엔 기업들이 환헤지 혜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환율이 하한선 아래(knock-out)로 떨어질 경우엔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되고, 상한선 위(knock-in)로 치솟을 때는 오히려 기업들이 막대한 환차손을 입게 된다.
상반기 산업계와 금융계에 논란을 부른 키코 사태를 둘러싼 책임공방이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된 것은 7월24일. 공정거래위원회는 그동안 코너에 몰렸던 은행들의 손을 들어줬다. 키코에 대한 불공정 약관 심사에서 “약관법을 적용해 불공정한 것으로 판단하기 곤란하다”며 종결처리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공정위는 그 근거로 환율은 외환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환율이 계속 떨어지던 지난해 말까지는 키코 계약을 한 상당수 중소기업들이 환차익을 봤다는 점을 들었다. 또 금융 선진국에서 판매되는 통화옵션 상품의 일종이라는 점도 주요한 판단 근거로 삼았다.
금융감독원은 한술 더 떴다. 금감원은 이달 초 발표한 ‘키코 거래 현황과 대책’ 자료에서 “환율이 올라 수출에서 환차익을 본 기업들이 이 점은 무시한 채, 키코 거래의 손실만을 따지고 있다”고 책임을 기업 쪽에 떠넘겼다. 환차익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피해를 본 기업은 계약 금액이 수출대금을 넘기는 ‘투기적’ 거래를 한 경우뿐이라는 식의 주장도 폈다. 금감원은 6월 말 현재(환율 1046원) 키코 거래손익(전체 519개사)은 수출대금 환차익을 감안할 경우 2조1950원 평가이익이 발생했으며, 중소기업 68개사의 경우에만 2533억원의 평가손실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중소기업계는 금감원의 논리에 분통을 터뜨린다. 중소기업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환율이 오르면서 석유류와 철강·구리를 비롯한 각종 원자재 비용이 함께 치솟은 것은 왜 빼놓느냐”면서 “환율에 따른 기업들의 손익은 금감원이 주장하듯 도식적으로만 바라봐선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유압 실린더를 연간 120억원 규모로 수출하는 한 중소기업의 사장은 “바이어들이 요즘처럼 환율이 치솟으면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해온다”며 “공무원들이 탁상공론만 벌이지 말고 기업을 찾아와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호소했다.
문제는 키코 논란이 불거진 지 넉 달이 지났지만, 피해 중소기업들의 어려움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회사 규모가 작은 업체들의 경우엔 김 사장처럼 파산 위기를 맞는 사례도 나타난다. 키코 거래의 위험성을 중소기업들에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불완전 판매, 대출이나 신용등급 조정 등과 연계한 불공정한 판촉 행위 등 은행들의 부당 행위에 대한 논란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중소 전자업체 B사의 자금팀장은 “계약환율의 상한선을 넘으면 2배수로 매도해야 하는 조건을 설명하면서, 은행 지점 관계자가 ‘가격 조건을 최선으로 짜기 위해 의미 없는 구조를 갖다놓은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녹취한 자료를 바탕으로 손해배상 소송 등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석유화학 제품을 만드는 C사의 사장은 “지난해 11월 통화옵션 상품 약정 당시 자본잠식 상태였지만, 거래은행에서 우리 회사의 신용등급을 B+로 올려 계약을 체결했다”면서 “몇 달 뒤 어음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약정 신청을 했더니 신용이 C등급이라 불가하다고 하더라”고 주장했다.
경제의 금융화 현상이 불러온 그늘
키코 사태는 복잡한 파생옵션 상품이 늘어나고, 기업에서도 생산활동과 관련 없는 금융 관련 손익 비중이 갈수록 증가하는 ‘경제의 금융화’ 현상이 불러온 그늘의 하나라는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한 국책은행 금융트레이링공학 센터 관계자는 “키코 같은 상품은 외환위기 이후 수출은 급증했지만 영업이익률은 낮았던 조선업종 대기업 등이 수익 증대와 환헤지를 위해 이용하던 상품”이라며 “2005년께 환율 급락으로 녹아웃이 발생하면서 환헤지 기능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한 대기업들이 외면하게 되자, 외환거래에 어두운 중소·중견기업들이 그 빈자리를 메운 형국”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키코 사태에서 우리 기업들과 은행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뭘까. 이필상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은행은 위험이 큰 파생상품을 만들어 팔았고, 중소기업은 상품의 본질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용했고, 정부는 위험도 높은 파생상품을 허용한데다 인위적인 고환율 정책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모두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면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중소기업들이 쓰러지는 사태가 온다는 것인데, 기업대출로 먹고사는 은행들이 도덕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지원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진모 SK증권 연구원은 “업계에서는 2000년대 들어 한국이 세계적인 파생금융 상품의 테스트 시장이 되고 있다고들 말한다”면서 “키코의 경우에도 손실과 이익의 상한선을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상품을 설계하는 게 어렵지 않은 만큼, 파생상품을 출시할 때도 상생의 지혜를 갖춰 공멸을 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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