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지시 내리던 개발시대의 리더십을 버리고 직원·주주·고객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경영자들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팬택계열에는 회장이라는 직책이 없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이 최고경영자(CEO)이지만, 그의 직책은 부회장이다. ‘고객’과 또한 ‘직원’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고객과 직원을 ‘회장’으로 모시기 위해 그는 영원히 부회장이다.
박 부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에는 회의 탁자가 없다. 그는 탁자에 앉아 딱딱하게 진행하는 회의보다 원형으로 자연스럽게 배치된 의자에 앉아 격의 없이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직급과 직책에 상관없이 사원도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격의 없는 토론도 진행한다. 그렇게 결론이 날 때까지 토론하는 ‘결론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며 회사의 경쟁력을 높인다. 박 부회장이 주창하는 ‘결론 토론’은 치열하고 집요하게 토의하고 협의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을 찾아내 대안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대리인 비용’ 줄이는 데도 한몫
CEO들이 소통에 나서고 있다. 현장에서 직원과 주주, 고객과 끊임없는 소통을 한다. 교장 선생님의 월요조회처럼 자신의 말만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사라지던 CEO의 시대는 이젠 끝났다. 조직을 관리하고 구성원들에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렸던 CEO들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리더십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 개발시대에는 직원들의 도전의식을 심어줄 리더십이 필요했다.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의 “이봐, 해봤어?”라는 말 한마디가 그같은 리더십을 상징한다. 하지만 비전을 제시한 뒤 “나를 따르라”는 식의 리더십은 이젠 먹혀들지 않는다. 직원과 주주와 고객의 니즈(욕구)가 다원화되고 있어 CEO의 의사결정 역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노부호 서강대 교수(경영학)는 “과거 CEO는 지시하고 통제했으나, 지금의 CEO는 직원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소통을 통해 종업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 그들의 창조성을 개발해야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CEO들은 경영 현안에 대해, 사내 쟁점에 대해, 기업 비전과 장래에 대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CEO들의 리더십 방식이 지시에서 소통으로 세련되게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자주 싱가포르를 찾는다.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이 하나금융의 주요 주주인 까닭이다. 김 회장은 테마섹 고위 임원들을 만날 때 투자 유치에 관한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과 ‘소통’을 한다. 김 회장은 싱가포르의 역사와 문화, 경제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그러다 보면 대주주들은 김 회장을 신뢰하게 되고 자연스레 투자가 이뤄진다. 이 때문에 금융계에선 김 회장이 대주주를 만나고 오면 주식을 사라는 말이 나돈다. 김 회장이 대주주를 만난 뒤 투자를 이끌어내 자연스럽게 주가가 오른다는 얘기다.
CEO의 소통은 이른바 ‘대리인 비용’을 줄이는 데도 한몫한다. 주주가 대리인(CEO)에게 권한을 위임했다고 보면 CEO는 주주의 이익을 충실히 보호해야 함에도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CEO는 자신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또는 계속 연임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에서 얻는 정보를 주주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경영전략을 추진하기도 한다. 그러다 CEO의 잘못된 판단으로 경영 차질이 빚어지면 주가가 떨어져 주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주주는 CEO의 이러한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사외이사를 두거나 CEO에게 막대한 스톡옵션을 주는 등 비용을 들여야 한다. CEO와 주주 사이의 소통은 신뢰를 높여줌으로써 이러한 대리인 비용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조영주 KTF 사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직원들에게 섬김 경영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다. 조 사장은 평소 ‘최고 고객 섬김책임자’(CSO)를 자처한다. 보통 CSO라 하면 최고전략책임자(Chief Strategy Officer)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조 사장은 “CSO는 고객을 섬기는 ‘Chief Servant Officer’로 생각합니다. 우리 고객을 섬기는 동시에 직원들을 섬기는 리더십입니다”라고 말한다.
조 사장은 권위적인 사내 분위기를 싫어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건강한 조직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감성경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직원들과 나누는 대화 내용도 다양한데, 취미와 특기에 대해 묻기도 하고 회사에 근무하면서 어려운 점이 없는지, 기숙사 시설이 괜찮은지, 선후배 관계에서 문제가 뭔지 등 직원들이 불편한 점을 물어보고 또 물어본다.
잘못된 신념은 파국 부를 수도
SK텔레콤에는 CEO와 구성원이 한데 어우러지는 ‘퍼너자이저’(FunErgizer)라는 행사가 있다. 2005년 시작된 이 프로그램에는 매번 김신배 SK텔레콤 사장이 참석한다. 임직원들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고, 때론 김 사장이 직접 공연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임직원들 앞에서 숨겨진 노래 실력을 공개한다. 지난 5월에 열린 퍼너자이저 행사엔 김 사장이 최근 SK텔레콤의 T브랜드 캠페인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되고’ 송을 사장 버전으로 직접 작사해 불렀다. 김 사장은 자주 현장 직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1년에 두 차례 이상 정기적으로 현장을 찾아 회사의 주요 경영 이슈와 구성원 애로사항을 놓고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를 통해 직원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회사의 경영환경과 경영진의 경영철학을 함께 나눈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국제경영학부)는 “예를 들어 70~80년대 건설사 CEO는 공사 기간을 게 하기 위해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재 CEO 역할은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주주와 고객, 직원들이 마음으로 승복하고 따르게 하는 것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다. 소통을 하지 않는 CEO들은 성공신화에 빠지기 쉽다. 특히 잘못된 신념에 확신을 가지면 주주에게는 주가 하락이라는 손실, 직원에게는 회사가 망하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CEO 대통령’을 자처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과의 ‘불통’ 문제로 곤경에 처해있다. CEO들의 새로운 소통 방식을 미처 체득하지 못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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