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싼 현정은과 정몽준의 신경전… 매각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의 행보에 관심 쏠려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누가 현대가(家)의 적통을 이을 것인가?’
현대가의 적자(嫡子)를 둘러싼 물밑 싸움이 거세다. 조만간 인수·합병 시장에 나올 현대건설 때문이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맨손으로 일군 회사라는 상징성에 더해 알짜기업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옛 현대그룹의 부활을 노리는 기업들이 눈독을 들인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포문을 열었다. 3월20일 정주영 회장 7주기 때다. 현 회장은 “현대가의 정통성은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에 있다”고 작심한 듯 말했다. 현 회장이 처음으로 정몽구 회장을 ‘어른’으로 공식 언급한 것이다. 왜일까? 범현대가의 맏이 격인 현대차 그룹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 보인다.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은 “가족 앞에서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현 회장의 발언 자체를 무시하는 말이다. 현대건설을 호락호락하게 인수할 수 있겠느냐는 말로도 읽힌다.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왜 현대건설인가? ‘미운 오리새끼’에서 ‘화려한 백조’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2001년 현대건설은 대북 송금과 비자금 사건으로 산업·외환·우리은행 등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 2001년 워크아웃 직전, 현대건설은 2조9천억원 적자에 4조4천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결국 2003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특검 조사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현재 현대건설은 온전히 다른 기업으로 거듭났다. 시가 총액 9조9천억원(3월26일 종가 기준). 매출액 5조6500억원, 영업이익 3620억원, 종합 시공능력 평가 4위, 해외 건설 매출액 1위. 현대건설의 지난해 성적표다.
인수를 가장 갈망하는 곳이 바로 현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이다. 현대상선의 기획총괄본부를 중심으로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운영한 적도 있다. 김홍인 현대그룹 부장은 “현대건설을 인수해야 대북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사업에 적극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탄이 문제다. 허문욱 삼성증권 연구위원은 “펀더멘털 측면만으로 본 현대건설의 목표 주가는 주당 11만원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건설 인수가는 지분 절반 인수를 전제로 6조∼7조원으로 예상된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할 땐 10조원을 웃돌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현대그룹은 유상증자 등을 통해 약 1조원의 자금을 확보해둔 것으로 알려졌다. 여전히 많이 부족한 상태다. 계열사는 물론 재무적 투자자를 끌어들여 부족한 실탄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의 소송도 현대그룹에 부담이다. 예보는 지난해 현대그룹 경영진이 불법 은행대출로 금융권에 손해를 끼쳤다며 115억원대의 소송을 냈다. 예보 쪽은 “여러 기업을 상대로 이런 소송을 진행시켰고 인수·합병 건과 무관하게 진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현대그룹 쪽은 정몽헌 회장이 사재를 포함해 1조2천억원의 자구책을 내놓는 등 경영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공식적으로 인수 의사를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김문현 현대중공업 상무는 “현대건설 인수를 검토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현대건설 인수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언제라도 인수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현대그룹의 주력사인 현대상선 지분 가운데 25.47%를 현대중공업과 계열사들이 갖고 있다. 현대건설은 현정은 회장의 주력사인 현대상선 지분 8.3%도 보유 중이다.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현대상선 경영권까지 위협할 수 있다.
지난 2003년 범현대가의 좌장 격인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의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하며 현 회장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KCC 편에 섰다. 그래서 현대중공업과 KCC가 연합해 현대건설을 인수한 뒤 현대건설은 KCC가, 현대상선은 현대중공업이 가져간다는 시나리오도 흘러나온다. 현대중공업의 현금 보유액은 10조원에 이르러 실탄도 충분한 편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특혜 논란에 신경을 쓰고 있다. 정몽준 의원은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적극 밀었고 그 공로로 한나라당 최고위원으로 임명됐다.
지난 2월 설 연휴 고 정주영 회장의 육성이 텔레비전 광고를 집중적으로 탔다. 1986년 중앙대에서 특강한 모습을 담은 광고였다. 조선업 진출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기업가 정신을 담았다. 광고주는 현대중공업이다. 현대중공업은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현대의 적통을 잇겠다는 뜻을 담은 이미지광고로 보는 시각이 많다.
맏형 격인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은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분위기다. 우선 엠코라는 별도 건설사까지 만든 상황에서 현대건설 인수가 큰 시너지 효과는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계속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다 중요할 때 적극 개입할 것이라는 얘기다.
현대차는 지난 1월 말, ‘현대’(現代) 표지석을 현대그룹 계동 사옥 앞으로 원상 복구했다. 2002년 현대차가 현대건설로부터 사옥을 사들이면서 치운 것이다. 표지석 뒤에는 현대건설 등 현대그룹 연혁이 죽 나와 있다. ‘1977.1 이명박 사장 취임’도 눈에 띈다.
현 회장은 박근혜, 정 의원은 이명박?
은행 채권단은 현대건설 지분 56.99%를 갖고 있다. 최근 매각 진행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분위기다. 그동안 산업은행은 현대건설을 부도 위기에 빠뜨린 옛 사주에게 다시 경영권을 넘길 수 없다고 밝혀왔다. ‘선 책임문제 해결, 후 매각’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산업은행과 호흡을 맞춰온 우리은행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해춘 우리은행장은 “계속 매각을 미루면 채권단과 현대건설 모두에 안 좋다”고 말했다. 현대건설 채권단 주간사인 외환은행도 “산업은행의 협조가 없더라도 현대건설 매각에 착수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도 산업은행 민영화와 관련해 산업은행이 지분을 갖고 있는 현대건설, 하이닉스, 대우조선해양 등의 매각을 조속히 진행시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얽히고설킨 정치적인 배경은 현대건설 인수를 예측하기 어려운 사차원 방정식으로 만들고 있다. 현 회장 쪽은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중에 현대건설이 매물로 나오길 기대했다. 정 의원의 정적인 노 전 대통령이 재임할 때 인수하는 게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제 상황은 역전됐다. 현 회장의 외삼촌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계열의 좌장 격인 김무성 의원이다. 친박 진영을 진두지휘하는 인물이다. 반면 정 의원은 친이명박 인사로 꼽힌다.
현재 현대건설의 최대 주주는 14.7%를 보유한 산업은행이다. 14.4%를 보유한 우리은행이 2대 주주다. 두 은행 모두 정부가 대주주다.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다. 현대건설 매각과 관련해 이명박 정부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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