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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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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재정부의 구슬땀

등록 2008-03-21 00:00 수정 2020-05-03 04:25

사재기 막는다며 전국 고철·철근 업체 들쑤셔…업계 “가격 폭등은 국내외 시장변화 때문”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지난 3월12일 기획재정부는 고철·철근을 ‘매점매석’ 품목으로 지정·고시하고 정부 합동으로 대대적인 동시 단속에 나섰다. 지식경제부와 국세청 등으로 구성된 ‘정부합동단속반’은 고철·철근 제조·유통업체 명단을 들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철근업체들을 돌아다니면서 매입·매출 전표와 거래명세표를 뒤지고 재고량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다. 단속 기준은 ‘직전 15일간의 평균 재고량이 1년 전 평균 재고량의 1.1배를 초과할 때’(고철), ‘직전 30일간의 평균 재고량이 1년 전 평균 재고량의 1.1배를 초과할 때’(철근)로 정했다. 평균 재고량이 10% 이상 많으면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각 시도에 ‘매점매석 신고센터’도 설치했다. 전국 철근 유통업체 250여 곳에다 지역에 기반을 둔 이른바 ‘나까마’(영세 철근 유통업자)까지 포함해 3천여 사업자가 단속 대상이다.

수입 철근값 몇 달 새 급등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 제7조는 ‘사업자는 폭리를 목적으로 물품을 매점하거나 판매를 기피하는 행위로서, 기획재정부 장관이 물가의 안정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해 매점매석 행위로 지정한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판교새도시 건설현장을 찾아 “최근 생산과 수입이 적절한데도 (철근) 품귀 현상을 빚고 가격이 오르는 것은 매점매석이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철근 가격 급등과 수급 불안은 매점매석 때문이라는 얘기다.

요즘의 철근 사재기 단속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불공단 전봇대 발언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즉, 강만수 경제팀의 첫 번째 ‘현장 실용주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경제팀은 철근 매점매석 단속을 ‘물가 안정 대책’으로 꼽고 있지만, 좀더 들여다보면 철근시장 못지않게 ‘건설현장’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려는 성격도 크다. 임종룡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철근 가격이 급등하고 공급마저 달려 최근 일부 아파트 건설현장의 공사가 중단되는 등 문제가 심각해, 강 장관이 직접 건설현장을 찾아 현황을 파악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경제팀은 3월10일 ‘올해 6% 안팎의 성장’이란 경제운용 계획을 내놓았다. 단기적으로 6% 목표 달성의 관건은 건설 경기 부양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철근 가격 파동이 건설 경기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판단이 이번 단속의 배경으로 작용한 것일까.

대형 철근 유통업체인 ㅅ철강 관계자는 “지금 정부가 가장 걱정하는 건 관급 공사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정부 건설공사의 경우 이미 공사계약이 이뤄졌으나 철근 단가가 폭등하면서 마진이 낮아져 민간 업체들이 공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발주한 대형 건설공사가 차질을 빚게 되면 6% 성장 달성이 어려워질 것으로 보고 강만수 경제팀이 부랴부랴 철근 매점매석 단속이라는 칼을 빼들었다는 얘기다. 특히 국세청이 최근 “철근 매점매석 통보가 들어오면 세무조사를 고려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이번 철근 사재기 단속은 이례적으로 강도 높게 이뤄지고 있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물가 대책이라면 통화량 조절 같은 좀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이명박 경제팀이 매점매석 단속이라는 구시대적 물가 관리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만수 경제팀이 철근시장 불안의 원인으로 매점매석을 꼽고 전국에 흩어진 철근상들을 뒤지고 있지만, 시장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한 중국산 수입철근 유통업체 관계자는 “철근 단가가 계속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사재기를 했던 유통업체들은 2월 안에 과다 보유 물량을 이미 다 털어내고 마진 챙기기를 끝낸 상태”라며 “이런 업체들은 단속반 조사를 여유롭게 받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의 말을 종합하면, 요즘의 철근 가격 폭등은 매점매석보다는 대내외적인 시장환경 변화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국제 철스크랩(고철 덩어리) 가격의 경우 지난해 초 1kg당 평균 300달러 수준이었던 것이 현재 미국· 일본· 러시아산은 490달러까지 폭등했다. 러시아는 경기 호황으로 철스크랩 수출 물량을 제한하고 있고, 일본에서 들여오는 철스크랩은 엔화 강세 때문에 가격이 뛰고, 미국산 철스크랩은 해상수송 운임이 급등하면서 덩달아 값이 뛰고 있다. 국제 철스크랩 가격이 오르면 국내 철스크랩 값도 오르게 마련이다. 국제 가격이 국내 가격보다 훨씬 비싸면 국내 업체들이 철스크랩을 수출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제철업체들도 철스크랩 구입 가격을 올려줘야 한다.

유통업체마다 ‘재고 딜레마’

특히 업계는 중소 철근 유통업체마다 ‘재고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의도적으로 매점매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재고를 쌓아둘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얘기다. 무슨 말일까? ㅅ철강 관계자는 “현대제철의 당진 일관제철소 건설현장에 막대한 물량의 철근이 투입되고 있고, 대형 1군 건설업체들과 2군 일부 건설업체들이 맡고 있는 신도시와 혁신도시 대규모 건설현장에 철근이 우선 배정돼 들어가고 있다”며 “거꾸로 지방의 중소 철근 유통업자들은 지역 건설 경기가 죽을 쑤면서 철근 재고를 푸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철근 가격이 워낙 많이 뛰는 바람에 지역 중소 건설회사마다 공사 착공을 미루고 있는데, 이 때문에 과다 보유 물량을 털어내려 해도 재고가 빠지지 않은 채 계속 쌓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대형 철근 유통업체가 제강업체로부터 철근을 받을 때 가격은 1kg당 734원(직경 10mm 기준)이다. 그런데 제강업체가 대형 건설사에 직접 넘겨주는 물량은 1kg당 741원이다. 대형 철근 유통업체들은 1t당 5천원 정도의 마진을 떼고 납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의 군소 철근 유통업체가 대형 유통업체로부터 철근을 넘겨받을 때 가격은 1kg당 750∼760원이다. 제2유통업체로서는 운반 비용을 감안할 때 적어도 1kg당 780∼800원을 받아야 한다. 결국, 소형 철근 유통업체들이 대형 건설회사들에 철근을 납품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형편이다. 지역 건설 경기가 죽어서 납품할 곳이 없고, 가격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대형 건설업체에도 팔 수 없고, 결국 불가피하게 재고가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ㅅ철강 관계자는 “대형 건설회사에 철근을 공급하는 대형 철근 유통업체들은 재고를 쌓아놓은 곳이 거의 없을 것”이라며 “지방 건설사들의 경우 철근 값이 폭등하자 잠깐 참으면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착공을 보류해왔는데, 기다려도 철근 가격이 오히려 더 뛰면서 소형 철근 유통업체마다 재고가 쌓이는 악순환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 철근 수입상은 “3월에 입고된 중국산 철근은 1kg당 730원대(직경 16mm 기준)이고, 4월 중순 인도분 중국산 철근은 매입 가격이 1kg당 795원으로, 국산 철근보다 훨씬 비싸다. 수입 철근도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어서 재고로 쌓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하소연했다.

국내 철근시장은 ‘냄비 뚜껑’ 시장으로, 금방 달아올랐다가 금방 꺼지곤 하는데, 통상 12월이 되면 철근 값이 떨어지곤 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건설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한 탓인지 철근 값은 1∼3월에도 계속 뛰고 있다. ㅅ철강 관계자는 “매점매석 판단 기준을 평균 재고량의 10% 초과로 하든 30% 초과로 하든 관심 없다. 국세청까지 동원하고 있는 판인데 걸면 걸리지 않겠나?”라며 “하치장에 꽉 찬 재고를 뺄 수 없는 형편이어서 ‘아예 문 닫고 도망가버리겠다’고 말하는 업자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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