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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저녁, 롯데의 수상한 몸놀림

등록 2008-01-11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신격호 회장이 4개 계열사에 주식 증여…2세에게 편법 승계했다는 의혹 일어</font>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롯데그룹은 ‘사회적 노출’을 꺼리는 기업문화로 유명하다. 공개적인 이벤트는 거의 하지 않는다. 기업설명회(IR)를 하는 모습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경제 담당 기자들이 취재하기에 가장 힘든 그룹 첫 순위로 꼽는 데가 롯데다.

언론에서 롯데가 대대적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주로 총수 가문을 둘러싼 스캔들이 터질 때다. 부동산 실명제 실시를 앞둔 1996년 6월 신격호 그룹 회장과 막내동생 신준호 당시 그룹 부회장(현 롯데우유 회장) 사이의 서울 양평동 롯데제과 부지를 둘러싼 갈등의 법정 비화, 이에 앞선 1960년대 초 신 회장과 둘째 남동생 신춘호(현 농심그룹 회장)씨 사이의 부동산 소유권 다툼이 그런 예다.

창업 1세대 체제, 폐쇄적 경영문화

폐쇄적 경영문화의 대명사 격인 롯데가 2008년 새해 벽두에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그룹 총수가 얽힌 편법 증여 의혹 때문이다. 사단은 지난해 12월31일 신격호 회장이 금융감독원에 낸 공시에서 비롯됐다. 신 회장은 당시 공시에서 롯데미도파, 롯데브랑제리, 롯데알미늄, 롯데후레쉬델리카 4개 계열사에 롯데제과와 롯데칠성 등 다른 계열사 주식 일부를 증여했다고 밝혔다. 신 회장이 증여한 주식의 평가액은 약 2천억원에 이른다.

전체 금액의 45%를 증여세로 내도록 돼 있는 현행법에 따를 경우 증여를 받은 롯데미도파 등은 약 900억원을 증여세로 내야 하지만, ‘구멍’이 있다. 예컨대 1716억원어치를 증여받은 롯데미도파는 국세청 과세 기준으로 지난해 말까지 약 1700억원의 누적 결손을 낸 법인이어서 증여세 면제 대상이다. 문제는 롯데미도파의 최대주주가 롯데쇼핑이고, 롯데쇼핑의 대주주는 신 회장의 아들인 신동빈 그룹 부회장이라는 데 있다. 결손 기업을 중간에 끼워 자식한테 편법 증여를 했다는 시비를 불러일으킨 빌미였다. 또다른 증여 대상인 롯데브랑제리, 롯데알미늄의 최대주주 역시 롯데쇼핑이며, 롯데후레쉬델리카의 최대주주는 신 회장의 막내딸 신유미씨다. 문제의 공시는 사회적 감시의 눈길이 다른 이슈로 쏠려 있는 어수선한 연말 저녁에 이뤄져 ‘올빼미 공시’라는 빈축 어린 유행어를 낳았다.

롯데는 편법 의혹을 받은 이번 증여 사건에 앞서 비슷한 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롯데쇼핑은 지난해 12월 (주)시네마통상과 (주)유원실업에 특혜성 부당 지원을 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았다. 시네마통상은 신 회장의 장녀 신영자씨, 유원실업은 신유미씨가 주요 주주로 있다는 점에서 총수 일가 쪽으로 회사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은 “재벌 내부에서도 이제는 정당하게 세금을 내고 승계하자는 분위기가 나오는 시대적 변화를 고려할 때 롯데 총수 가문의 행태는 시대 흐름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라며 “롯데만의 독특한 지분 구조나 재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롯데의 폐쇄적 문화와 연결되는 특이한 점 하나가 국내 재벌 중 드물게 ‘창업 1세대 체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1948년 일본에서 ‘껌’ 사업을 시작해 1967년 국내 사업 기반인 롯데제과를 설립한 뒤 오늘의 롯데그룹을 일군 신격호 회장은 지금도 여전히 현역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등 국내 유수 재벌이 3세로 넘어갔거나 넘어가고 있는 중임을 감안할 때 희귀한 사례다.

총수 가문을 꼭대기에 둔 소유·지배 구조에서도 국내 재벌 일반과는 차이를 보인다. 롯데그룹 전체 계열사의 평균 총수 가문 지분율은 10%를 웃돈다. 국내 상위 재벌들의 총수 가문 지분율이 대체로 3% 안팎에 지나지 않아 ‘쥐꼬리 지분’으로 그룹을 쥐락펴락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계열사 지분까지 포함하면 롯데 총수 가문의 그룹 장악력은 매우 강한 편이다. 이는 인수·합병(M&A)을 통한 급격한 확장을 피하고 보수적인 경영을 해온 데 따른 것이었다.

더 중요한 또 한 가지 특징은 소유·지배 구조의 유난스런 불투명성이다. 롯데그룹 계열사 43개 가운데 상장회사는 7개뿐이다. 이 때문에 바깥에서 그룹의 속내용을 들여다보기는 매우 어렵다. 롯데그룹 소유·지배 구도는 출발점부터 불투명한 막에 싸여 있다. 소유·지배 구조의 핵심 고리인 총수 가문과 일본 롯데 등 해외 계열사들 사이의 지분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이같은 불투명한 소유 구조가 사회적인 소통 부재라는 폐쇄적인 문화를 낳고, 바뀐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편법 증여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면 무리한 해석일까?

창업자 신 회장의 나이는 올해로 86살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경영을 더 하겠다”고 늘 말해온 신 회장이지만, 2세로 승계하는 일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연배다. 지난해 말부터 싹을 보이고 있는 총수 가문을 둘러싼 잡음은 이런 사정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룹의 권력 이양을 앞두고서 창업자의 지분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를 시도하는 양상은 국내 재벌들에서 드물지 않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롯데의 경우 창업자인 신격호 회장에게서 자녀들한테 지분을 넘겨주는 사전 작업이 덜 돼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비교적 늦게 창업자 세대에서 후세로 물려주는 일에 나서 자질구레한 방법들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강화된 세법 및 사회적 감시망과 충돌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롯데그룹의 대표적인 두 계열사로 꼽히는 롯데제과와 롯데쇼핑의 지분 구조를 보면, 총수 가문의 고민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롯데쇼핑의 경우 신 회장의 장·차남인 신동주 일본 롯데 부사장과 신동빈 그룹 부회장이 각각 14.6%인 데 견줘 신 회장은 1.2%다. 승계가 사실상 완료된 상태이다. 반면, 롯데제과는 여전히 신 회장이 13.2%로 최대주주다. 신동주·동빈 형제는 각각 3.5%, 4.9%의 지분을 갖고 있다. 법규에 따른 세금을 다 물고 지분을 넘겨주려다간 그룹 전체에 대한 총수 가문의 장악력이 크게 떨어질 것이란 걱정을 할 법한 상황이다.

롯데그룹 쪽은 편법 증여 의혹을 낳은 이번 증여 사건에 대해 “롯데미도파 등 재무구조가 취약한 계열사의 재무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편법 의혹은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다. 맞는 말일까?

무상 출연 할 만큼 급박한 상황?

롯데그룹에서는 지난 2000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신 회장이 지금 같은 방식으로 계열사들의 재무구조 개선을 지원했다. 당시에는 세금을 피해갔다. 외환위기의 여파가 남아 있을 때여서 별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때와 좀 다르다. 총수의 무상 출연이 없으면 해당 계열사들이 재무구조를 개선할 수 없을 만큼 급박한 상황에 빠져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2003년 12월 개정된 상속·증여세법 41조에 따라 결손 법인과 특수관계인의 무상 또는 헐값 거래로 특정인이 이익을 볼 경우 증여로 보아 세금을 매기도록 돼 있다. 총수 가문이 세금을 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자칫 명분도 실리도 잃을 수 있는 국면이다. 국세청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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