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비정규직의 미래가 걸린 싸움

등록 2007-07-13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랜드는 기업들이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지난 7월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을 적용대상으로 비정규직 법안(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에 들어갔다. 비정규직 관련 법은 내년 7월1일부터는 100인 이상 사업장에, 2009년 7월1일부터는 모든 사업장에 적용된다. 시행 첫날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내 홈에버 매장은 일부 점포를 빼고 사실상 영업이 중단됐다. 이랜드 그룹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 500여 명이 이곳 월드컵점을 점거한 채 농성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농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매장 계산대와 식품 코너 등에서 일하는 기혼여성들로, 한여름에도 찬기가 올라오는 매장 바닥에 종이 박스를 몇 개 깔아놓고 아무렇게나 엎드려 밤을 새우고 있다. 7월5일 아침, 이들은 금싸라기 같은 하루 일당이 아까워 조바심을 내면서 파업 6일째, 고단한 하루를 또다시 맞고 있었다.

교대로 집안일 챙기며 농성

이들은 회사 쪽에 비정규직의 계약 해지 중단, 해고된 조합원들의 복직, 비정규직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전날 오후 1층 마트 내부로 진입한 뒤 계산대를 막고 집단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 쪽이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규정한 비정규직 법안을 회피하기 위해 계약직 노동자들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그 자리를 외주·용역으로 채우고 있다”며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이랜드는 홈에버, 2001아울렛, 뉴코아 등 3개의 유통 부문 브랜드를 갖고 있으며 전국에 5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수도권의 여러 홈에버 매장에 근무하는 이랜드 노동자들은 매출액이 가장 많은 월드컵점에 한데 모여 농성을 벌이고 있다. 대부분 기혼여성들이라서 농성 중에도 교대로 돌아가며 집안일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비정규직 법안이 ‘보호법’이냐 ‘악법’이냐를 둘러싸고 지루한 공방이 지속됐는데 법이 실제로 시행되면서 사업장마다 계약 해지가 잇따르고 있다. 이랜드는 비정규 관련 법안이 시행되기 바로 전날, 뉴코아에서만 300명의 비정규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했고, 홈에버에서도 지금까지 무려 500여 명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쫓겼다.

이랜드는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투쟁의 상징이 되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랜드의 1천 명 비정규직 집단해고와 외주화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비정규직 잔혹사”라고 규정하고 “이랜드가 성실한 교섭에 나서지 않으면 전국 조직을 동원해 이랜드 유통매장을 점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랜드 싸움에 860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선포했다. 사실 이랜드는 이미 우리나라 비정규직 싸움의 상징적 사업장이나 다름없었다. 이랜드노조는 비정규직이란 말조차 아직 낯설었던 2000∼2001년 265일 동안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장기파업을 벌인 바 있다. 당시에도 ‘2001아울렛’ 전산실 점거 사태가 벌어졌고, 노조는 이때 ‘이미 채용된 2년 경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모든 비정규직의 3년 경과 정규직화’를 얻어냈다.

이남신 이랜드노조 수석부위원장은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홈에버와 뉴코아 등에서 해고된 비정규직이 900여 명에 달한다”며 “뉴코아 매장은 2년 이상 정규직화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시정을 피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용역·파견으로 외주화하고 있고, 반면 홈에버는 워낙 계약직이 많아서 상당수를 계약 해지하고 일부는 직무급제를 앞세워 정규직과 비정규직 직군을 별도로 분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산대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일하고 있는데,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시정 규정을 피하기 위해 회사가 갑자기 직무급을 내놓았다는 얘기다.

단협 피해가는 ‘369’ 비정규직 체제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전문적 지식·기술의 활용이 필요한 경우 등 일부 예외 사유를 제외하고) 2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근로계약 반복·갱신 등의 경우에는 그 계속 근로한 총기간이 2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기간제 근로자를 사용할 수 있고, 2년을 초과하여 사용하는 경우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2년’ 규정은 법 시행 후 근로계약이 체결·갱신되거나 기존 근로계약 기간을 연장하는 경우부터 적용한다. 즉, 7월1일 이전의 근로 기간은 2년에 포함되지 않으며, 기간제 근로자의 2년 규정 기산점은 7월1일부터가 아니라, 7월1일 이후 근로계약이 새로 체결·갱신·연장되는 시점부터가 된다. 이랜드의 경우 유통 부문 매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3천여 명 중에서 1100여 명이 2년 이상 근무하고 있는 비정규직으로 알려진다.

7월5일 홈에버 농성장에서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 정아무개(41·여)씨는 “현재 농성 중인 사람들 외에 수백 명의 비정규직이 법안 시행을 코앞에 두고 계약이 해지됐다”면서 “회사가 우리에게 공식으로 고용계약 해지를 통보한 건 아직 아니지만 계약 해지가 잇따르면서 농성에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또 “이랜드 노사 단체협약에 ‘18개월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계약을 해지할 수 없도록’ 돼 있다”며 “회사는 석 달마다 계약을 갱신하고 있는데 9개월째 되어 다시 계약서를 쓸 때 8개월짜리로 써서 17개월이 되면 계약이 끝나도록 하는 방식으로 단협을 피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랜드에서는 이른바 ‘369’ 비정규직 체제, 즉 3개월 단위로 계약을 맺되 두 차례 계약 기간을 갱신해 총 9개월을 사용한 뒤에 계약을 해지하는 방식을 통해 비정규직을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노동조합은 회사가 퇴직금 지급 의무를 피하려고 1년 미만인 9개월짜리 계약 기간을 고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랜드는 정규직이 나간 자리 대부분을 9개월짜리 비정규직으로 채워왔다.

농성 중인 노동자들은 애초 비정규직 법안 시행에 따른 정규직화 기대가 높았으나, 막상 법안이 시행되면서 오히려 계약 해지가 잇따르자 비정규직 법안이 고용 불안만 더욱 키웠다고 허탈해했다. 농성 조합원 오아무개(48·여)씨는 “법안이 시행되기 전에 회사가 지방 매장에서 서울 매장으로, 서울 매장에서 지방 매장으로 멋대로 발령을 내는 식으로 사실상 스스로 그만두게 만들고 있다”며 “뉴코아뿐만 아니라 홈에버에서도 외주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걱정했다. 이랜드는 전직 이랜드 출신 임원들을 중심으로 ‘뷰티풀휴먼’이라는 인력회사를 설립해 이랜드 계열사 노동자들을 외주화, 즉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김아무개(41·여)씨는 “해고 통지가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말하면서 회사가 사실상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있다”며 “비정규 법안이 우리를 대량 해고로 내몰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회사 쪽이 조합원은 일이 힘든 계산대 근무로 보내고 비조합원은 상대적으로 편한 쇼핑몰 등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노동조합 탈퇴를 반강제적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비정규직 법안 시행에 따라 노동조합의 정규직화 및 차별 시정 요구가 거세질 것으로 보고 사전에 이를 봉쇄하려 한다는 것이다.

“못하면 관두라는 식”

농성장에서 만난 어느 여성 노동자는 “유통매장 비정규직은 명절에도 일하기 때문에 시댁과 등지고 사는 노동자들”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남아무개(44·여)씨는 “계산대 한자리에 서서 4시간 넘게 바코드를 찍다 보면 어깨가 다 나간다. 차라리 파업하는 게 더 낫다”며 “최근에 회사가 비정규직 4명을 한꺼번에 가전 계산대로 올려 보냈는데 교육도 없이 그냥 올라가라고 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매니저들한테 배우라면서…. 결국 못하면 관두라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이랜드 파업 사태는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 노동을 규율할 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마음껏 비정규직을 사용해온 기업들이 이제 법안 시행 이후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다. 노동계가 이랜드 파업을 비정규직의 미래가 걸린 싸움으로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