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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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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의 훼절… 표정이 달라졌다

등록 2006-07-27 00:00 수정 2020-05-03 04:24

9년 전 IMF 때 극단적 구조조정 겪었던 장은증권 노동자들의 오늘… 그들의 상처와 희로애락은 한미 FTA 체제의 앞날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한미 FTA와 IMF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몰아닥친 1997년과 1998년. 그때 한국 사회의 지고지선은 ‘구조조정’과 ‘외자유치’였다. 정리해고는 불가피했으며 구조조정을 반대하거나 이와 다른 목소리를 내면 ‘반개혁적’으로 치부됐다. 그렇다면 한미 FTA는 또 어떨까. 정부는 IMF 때처럼 각종 광고를 통해 한미 FTA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자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은증권을 기억하십니까

IMF를 맞은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을 ‘자연재해’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제자본과 국가가 이끄는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1998년의 장은증권 사태. 정부의 몰아붙이기와 언론의 왜곡 보도로 이견을 허락지 않았던 가장 극단적인 ‘구조조정’이었다. 그해 7월4일 각 신문·방송에는 “장은증권 직원들이 고객 예탁금으로 명예퇴직금 잔치를 벌였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노조가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쓰고 명예퇴직금을 받아낸 뒤 금융감독위원회에 업무정지 신청을 냈다는, 이른바 ‘먹튀’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IMF 개혁에 반항하는 대표적인 ‘모럴 해저드’로 지목돼,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다. 장은증권 노조는 회사 회생을 위해 홍콩계 금융기관의 투자를 거의 성사시켰음에도 회사 회생은 무시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중에야 오보로 밝혀졌다. 노조원들은 사직서를 쓰기로 했지만, 곧바로 계약직으로 전환해 회사 회생에 나설 예정이었으며, 업무정지 신청도 경영진 쪽의 단독 행위로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끝내 청산 절차가 진행됐고, 노조위원장 박강우(41)씨는 3억4천만원 손배 가압류에 갇혔으며, 500명의 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슴속에 상처를 키워야 했다.

7월13일 만난 문기성(46)씨는 건강보조식품 네트워크 마케팅업체인 월드웨이(주)의 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회사가 사라진 1998년, 문씨는 38살의 국제영업팀장이었다. “장은증권은 나의 첫 직장이었어요. 그렇게 11년을 파묻은 직장이 사라지는 걸 인정할 수 없었지요. 나는 정말 회사를 살리고 싶었어요. 심지어 명예퇴직금으로 몽땅 주식을 사기까지 했는데….”

회사 청산과 함께 그의 주식은 휴짓조각이 됐다. 그는 대우증권 경력사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1998년 이전과 이후의 시대는 달랐다. 그는 1년짜리 계약직 사원일 뿐이었다. “수천 명의 사원 가운데 매달 최다 실적을 올린 최우수 사원에게 돌아가는 대우증권 베스트클럽에 두 번이나 들었는데도, 끝내 정규직이 되지 못했죠. 인심이 그렇게 사나워진 거예요. 2003년 쌓여가는 스트레스로 급성 췌장염을 앓은 뒤, 회사를 나왔죠.”

금융권은 상시적 구조조정 체제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수없이 직업을 바꿨다. 그들은 새 회사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한때 잘나가는 애널리스트였던 이한진(42)씨도 “떠돌이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대우증권, 일진증권, 겜티브이, 건설회사까지 이씨의 명함은 해마다 바뀌었다. “IMF가 우리를 바꿔놨어요. 장은증권 사태에서 개인의 무력감을 뼛속 깊이 느꼈던 터라 새로운 회사에서 적응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거예요.”

일주일에 3~4번씩 있던 술자리는 없어졌고, 힘들어하는 동료가 보여도 감히 ‘술 한잔 하자’고 말을 떼지 못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동료는 경쟁자가 됐고, 회사는 돈 버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회사에 섣부른 기대를 했다간 상처만 입는다는 걸 노동자들은 이미 체득했기 때문이다. 이한진씨는 “IMF는 폐허 뒤에 한국의 직장에 신자유주의 제국을 건설한 것”이라고 말했다.

IMF로 가장 격변을 치른 곳은 증권사나 은행 같은 금융권이었다. 금융권은 상시적 구조조정 체제로 바뀌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외환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김병국(가명·39)씨는 1998년 6월 처음으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체감했다고 했다. “전체 은행원 연수가 있었는데, 당시 퇴출 대상으로 선정된 은행 사람들의 자리가 빈 거예요. 그때 처음 깨달았지요. 나도 잘릴 수 있구나. 상상해본 적도 없었는데.”

김씨는 그 이후 동료와 선배와 작별 인사를 하면서 9년째 살고 있다. 평생 처음 인사고과 통지도 받았다. A·B·C·D 등급이 적힌 통지표가 집으로 배달됐다. D등급을 받은 노동자는 ‘알아서 나가라’는 소리였다. 김씨는 “A등급을 받았다”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D등급을 받고 안절부절못하던 퇴직한 선배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런 뒤 명예퇴직은 연례행사처럼 이뤄졌다. 1998년 1월 1157명, 10월 1426명, 199년 3월 193명, 2000년 11월 373명, 그리고 2004년 473명까지. IMF 이후 모두 3500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

“IMF가 우리 때문에 온 건가요? 왜 노동자가 책임을 져야 하죠? 마치 내 정체성을 상실한 것 같아요. 이젠 상사에게 찍혔다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 휴일 근무도 나서서 하게 되고, 주말에도 영업을 뛰어야 하는 분위기죠.”

상시적 구조조정 체제로 변한 은행가에선 “올가을에 명예퇴직이 있다더라”는 등의 소문이 연중 떠돈다. 우량은행과 중소은행을 가리지 않는다. 김보헌 금융노조 외환은행지부 전문위원은 “1인당 순이익 등 생산성 지표를 높이기 위해 우량은행조차 명예퇴직을 일상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2조2410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한 국민은행만 해도 2200명의 명예퇴직을 실시했다. 이를 거부한 160여 명은 16개 지역으로 전보돼 영업 업무를 맡겼다. 구조조정은 일상적 대세가 됐고,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노조는 쟁의행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다.

월급 아닌 ‘생애임금’을 따지기 시작하다

비정규직도 급증했다. 인건비가 높은 정규직을 줄이고 그 자리에 비정규직을 채워넣은 것이다. 최근 들어 비정규직은 콜센터나 총무 업무 외에도 창구 및 대출·외환 업무 등 전문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2001년 비정규직 비율은 24%였고, 2004년에는 29%로 뛰어올랐다. 2005년 전국금융노조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금융노조 산하 기관 14만여 명의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은 4만1천여 명이다. 은행에 일하는 사람 3명 중 1명은 비정규직인 셈이다.

한 달 140만원을 받고 서울의 한 대형은행에서 창구 업무를 보고 있는 성은미(가명·42)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분리돼 있다”고 말했다. 동일한 노동을 하면 동일한 임금을 받는 게 상식이겠지만,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달리 상여금이 없고 학자금이나 주택자금 지원도 안 된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식 시장자본주의가 한국 금융권에 자리잡기 시작한 탓이다. IMF를 계기로 뻗쳐온 미국식 시장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극적으로는 해고를, 일상적으로는 경쟁 체제를 내면화시켰다. 장은증권 노동자들이 겪었던 거대한 힘의 작용에 대한 공포는 노동자들을 무한경쟁에 뛰어들게 만든다. 실업에의 공포와 생존본능이 양의 방향으로 결합하면 ‘새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성공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철저한 낙오자가 된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정경심 실장은 IMF 이전과 이후의 상담소를 찾아오는 노동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IMF라는 사회적 경험으로 경제적 공포가 내면화된 거죠. 그래서 빨리 돈 벌어서 나가야겠다는 사람이 많죠.”

주눅이 든 노동자들은 이제 ‘월급’이 아닌 ‘생애임금’을 따지기 시작한다. 일생 동안 벌 수 있는 생애임금을 목표치로 정하고 ‘벌 수 있을 때 미리 벌어두자’는 개념이 일반화된 것이다. 대공장 생산직에서는 ‘돈이 되는’ 잔업과 특근을 타 부서에 나눠주는 전통도 없어졌다.

순수한 노동자 의식은 난도질당하고…

장은 사태 때 노조위원장으로 회사 살리기에 헌신했던 박강우씨는 지금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간부로 일한다. 이한진씨는 7년여의 ‘낭인’ 생활을 접고 동료인 박씨 옆에 돌아와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박씨는 “IMF로 미국의 투기자본이 한국 시장을 열었다면, FTA는 금융 시스템 전체를 미국식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은증권 노동자들의 맏형 격인 문기성씨는 이를 ‘진정성의 훼절’이라고 표현했다. “회사를 열망했고, 국가금융의 첨병으로 자부하며 일했던” 순수한 노동자 의식이 돈의 논리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자본의 무한한 이익과 노동자의 무한한 희생에 기초하고 있다. IMF 9년 금융 노동자들의 희로애락은 FTA 체제의 앞날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규직은 낙타의 바늘구멍”

올 상반기 정규직 전환자는 8천 명 중 70명뿐

[인터뷰_ 권혜영 금융노조 비정규직지부 위원장]

은행은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 작업장의 미래를 보여주는 곳이다. 한국의 은행들은 지난해 당기순이익이 13조6374억원으로 어느 거대산업 못지않지만, 비정규직 비율은 29%에 이르고 대리 미만 직급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비율은 1 대 1에 가깝다. 노동자의 희생에 기반을 둔 수익구조인 셈이다. 권혜영(42) 금융노조 비정규직지부 위원장에게 은행의 비정규직 실태를 들어봤다.



비정규직이 얼마나 많아졌나.
=예전에 은행의 비정규직이라면 전화교환원 정도였다. 지금은 업무를 구분하지 않고 비정규직을 쓰고 있다. 1년 계약직에서 3개월 계약직, 파트타이머까지 다양하다. 은행들은 2000년 이후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비정규직 채용을 늘리고 있다.
비정규직이 받는 차별이라면.
=정규직에 비해 급여가 30~40% 수준이다. 산별 협상을 통해 2003년부터 정규직 임금인상률의 두 배의 인상률을 비정규직에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임금 격차는 계속 벌어진다. 워낙 받는 액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재계약도 안심할 수 없다.
은행들은 정기적으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 은행에 그런 제도가 있지만, 혜택을 받는 이는 극소수다. 정규직이 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국민은행을 보라. 올해 상반기에 8천 명의 비정규직 가운데 정규직이 된 사람은 70명뿐이었다. 진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줄이려 한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정규직 심사를 통해 노동자를 통제하는 데 악용될 소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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