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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된 아이디어] 100년이 지나도 이명래고약

등록 2005-09-01 00:00 수정 2020-05-03 04:24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잘 낫지 않은 종기엔 이명래, 이명래고약!” 종기(부스럼)는 7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흔한 질병이었다. 기름종이에 싸여 있는 까만 고약을 녹여 환부에 붙이면 종기의 고름은 쏙 빠지고 상처가 아물었다. ‘이명래고약’(李明來膏藥)은 지난 세기에 한국인이 개발한 신약 1호라고 할 수 있다. 몇몇 경쟁 제품이 도전했지만, 종기 치료제의 대명사가 된 이명래고약은 1906년 첫선을 보인 이래 ‘피부병의 만병통치약’으로 군림했다. 내년이면 이명래고약 탄생 100년이 된다.
지금도 “어디서 이명래고약을 살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요즘도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환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일반 환자도 있고, 전국적으로 여러 한의원에서 보내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현재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명래한의원·이명래고약집’을 운영하고 있는 한의사 임재형 원장의 말이다. 환자들이 꾸준히 찾아오면서 한달에 1천만원의 매출을 올릴 때도 있다고 한다. 신약이 속속 개발되면서 과거의 명성은 바래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 사람들이 곪았을 때 고약 이상의 특효약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기업이 판매하는 ‘상품’으로서의 이명래고약은 없어졌다. 대신 이명래고약집에 환자가 찾아오면 임 원장이 직접 진료해 투약하고 있다.

이명래고약은 명래제약(주)과 명래한의원 두 갈래로 전통이 이어져왔다. 이명래 선생의 딸 이용재씨가 1956년에 세운 명래제약은 이명래고약을 기업화·상품화해 국내 제약업계를 주름잡았지만 경영난을 겪다 2002년에 끝내 생산을 중단했다. 반면 명래한의원은 이명래의 사후 사위 이광진씨가 뒤를 잇고 이어 임 원장이 장인의 가업을 계승해 지금까지 맥이 지속되고 있다. 명래한의원에는 ‘본원이 만든 정통 이명래고약은 약국이나 다른 곳에서는 전혀 판매치 않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명래고약은 이명래 선생이 한방의서의 비방을 바탕으로 프랑스 선교사인 드비즈 신부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 명래제약이 제약허가 신고를 낼 때 오행초와 가래나무 등 약의 성분이 일부 공개됐지만, 다양한 약재를 비롯한 제조법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임 원장은 “생약 성분에 열을 가해 약물을 태워서 고약을 추출한다. 당시 이명래 선생이 라틴어로 된 유럽의 약용식물학 책을 드비즈 신부한테 받았는데, 드비즈 신부는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 있을 때 한의학을 배웠고 이명래 선생에게 비법을 전수해줬다. 이명래 선생이 여기에다 민간요법을 더해 고약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명래고약의 비결은 멀쩡한 다른 살은 다치지 않게 하고 살 속에 응고된 고름만 골라 신속히 빼내는, 뿌리는 캐낸다는 뜻의 ‘발근고’(拔根膏)에 있다. 발근고는 소나무 뿌리를 태워서 나오는 기름(송탄류)이 원료인데, 여기에다 약물을 집어넣은 뒤 녹여서 제조한다. 발근고가 수술 칼처럼 종기를 터뜨리고, 고약은 고름을 빨아내 가라앉히는 식이다.

이명래고약 제작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데, 온도 조절이 중요해 보통 180∼250도를 유지해야 차진 고약이 나온다. “이명래고약은 여러 종류가 있어 종기뿐 아니라 화상, 피부병, 관절염, 유선염 등 질병에 따라 다르게 사용합니다. 또 고약은 봄·여름·가을·겨울에 따라 각각 약성이 다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몇몇 한의사들이 시도를 많이 하는데, 이명래고약은 아직 못 만들어요.” 임 원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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