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파포토의 몰락을 계기로 본 필름회사들의 현주소
동네 중소 사진관들도 속수무책으로 직격탄 맞는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세계 처음으로 엑스레이 필름을 출시했으며(1898), 컬러 사진 인화지를 역시 세계 처음으로 만든(1942) 회사. 세계적인 필름 생산업체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아그파는 세계 사진 역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아그파의 뿌리는 1867년 독일 베를린에 설립된 ‘아닐린 염료 공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0년 전통이다.
국내 시장 위축이 외국보다 빠르다
100년을 웃도는 전통과 자존심도 새 기술 앞에는 무용지물인 듯 아그파포토가 거대한 디지털 물결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고 있다. 아그파포토는 아그파의 소비자영상사업부(카메라 필름 및 인화장비 사업)를 이어받아 지난해 11월 독립한 회사다. 지난 5월27일(현지 시각) 독일 언론이 전한 바, 아그파포토는 독일 쾰른 지방법원에 회생보호 신청서를 제출했다. 경영난으로 더 이상 빚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두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필름·인화장비 사업을 떼낸 ‘아그파’는 벨기에에 본사를 두고 의료 화상정보 저장전송 시스템, 신문사 출력 시스템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독일에 본사를 둔 ‘아그파포토’와는 이제 별개 회사다.)
필름을 쓰지 않는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아그파포토의 몰락은 어느 정도 예견돼온 터였다. 세계 필름 시장에서 두 축을 이루고 있는 일본 후지필름과 미국 코닥도 활로를 뚫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코닥이 주력인 필름사업의 위축으로 금융시장에서 냉대를 받고 있는 게 극명한 예다. 지난 5월 코닥의 회사채 신용등급은 정크본드(투기성 채권) 수준인 BB+(S&P 평가)로 추락했다.
세계사진판촉협회 자료를 보면, 올해 카메라용 필름 판매량은 3억1500만롤(통)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 2000년의 판매량 7억8600만롤에 견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카메라용 필름 시장은 2001년께 꼭대기에 이른 뒤 줄곧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앞으로 추락의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관측된다.
이런 흐름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외국계 필름 생산업체의 한국법인 관계자는 “다른 나라들보다 디지털화가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국내 필름 시장은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후지필름, 한국코닥 등 국내 필름 업계에 따르면 카메라용 필름 시장이 꼭대기에 이른 것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0년대 중·후반이었다. 당시 전체 시장 규모는 7천만~8천만롤 수준으로 국민 1인당 1.5롤 정도를 쓴 것으로 추정됐다. 올해 시장규모는 전성기 때의 15~20% 수준인 1100만~1500만롤 정도로 예상된다. 1인당 소비량은 이제 많아야 0.5롤, 적게는 0.3롤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한 사람이 1통 반을 쓰던 데서 한 가구에서 반통도 쓰지 않게 된 현실에서 필름산업의 어려움은 고스란히 배어난다. 디지털 카메라와 카메라폰의 보급으로 필름 시장은 앞으로도 해마다 40%가량씩 줄어들 것으로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필름산업이 궁지로 내몰리는 반대편에서 디지털 카메라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다. 삼성테크윈 추정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팔린 디지털 카메라는 153만대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카메라 시장은 1997년 3만대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가 2002년 70만대로 필름카메라 판매 규모를 뛰어넘은 뒤 2003년 97만대, 2005년 190만대(예상)로 삼성테크윈은 보고 있다. 세계 디지털 카메라 시장 규모가 2003년 4680만대, 2004년 6240만대, 2005년 7200만대(예상)인 것으로 추정(포토키나 2004)되고 있는 것에 견줘 우리나라의 성장세가 훨씬 빠른 편이다.
국내 업체로는 유일하게 디지털 카메라를 생산하고 있는 삼성테크윈이 올 초 필름 카메라 사업을 완전히 접은 것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지난 1979년부터 카메라 사업을 시작한 삼성테크윈은 2000년 들어 디지털 카메라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뒤 필름 카메라 부문을 차츰 줄여오다가 올 초 중국으로 넘겼다. 소니, 올림푸스, 캐논 등 일본 카메라 업체들도 필름 카메라의 신제품 개발은 중단한 채 사업 비중을 지속적으로 줄여가고 있으며 아예 중단할 것을 검토 중인 곳도 있다고 한다. 국내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선 삼성테크윈과 일본 업체들이 뒤섞여 치열한 먹이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래도 필름은 살아남는다
디지털 카메라의 파죽지세는 필름산업과 짝을 이루는 동네 중소 사진관의 생존에도 위협적이다. 필름산업은 그나마 디지털 카메라 제조, 의료용 필름 등 다른 사업 부문의 비중을 높이며 대응할 수 있지만, 동네 사진관은 속수무책으로 직격탄을 맞고 있다. 증명 사진을 찍으러 오는 것 말고는 사진관을 찾는 이들이 거의 없어진 데 따른 당연한 현상이다. 소규모 사진관으로선 온라인 현상을 위한 장비를 갖추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수억원의 비용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 공덕동 통일사진관의 임만준(65)씨는 “1970년에 이곳에 사진관을 차려 기사 3명을 데리고 일한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내보내고 혼자”라며 “겨우 임대료나 내고 소일거리하는 수준”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임씨를 비롯해 사진가들의 모임인 대한프로사진가협회 회원이 한때 3만명을 웃돌다 지금은 5500명 수준으로 뚝 떨어진 데서도 사진관의 몰락을 엿볼 수 있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이들이나 필름업계에서는 시장의 위축세로 이처럼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에도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시장이 계속 쪼그라들 것으로 예상되긴 해도, 필름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화질에서 앞서는 필름 사진에 애착을 느끼는 마니아층이 있다는 점에서다. 디지털 카메라가 일으킨 폭풍에도 필름의 명맥과 사진가의 꿈은 유지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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