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져 왔던 한진중공업 하청업체들의 2001년 집단파업
지금도 미운 털 박힌 와중에 일부 사장은 ‘먹고 튀기’ 여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구조개혁의 태풍 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원·하청 하도급 문제다. 수십년 동안 굳어진 불공정 관행이지만 ‘힘의 관계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한국 경제 특유의 고질적 불평등이라는 생각도 퍼져 있다. 대기업의 사상 최대 실적이 하청업체를 짜내고 납품 단가를 ‘후려쳐서’ 이룬 것이라는 지적도 이제는 더 이상 ‘신선한’ 분석이 아니다. 하청업체 사장들이 불이익을 우려해 익명을 전제로 끝없이 분통을 터뜨리고, 온갖 토론회가 열렸음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는 이유는 뭘까? 원·하청 문제는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사적 계약’이라는 합법적 외피를 쓰고 있기 때문에 제도를 통해 개혁을 이룬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6월께 ‘하도급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로 하면서 원·하청 하도급이 또다시 이슈로 등장했다.
벌금 2천만원 걸며 단결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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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청 불평등 구조에서 가장 고통받는 쪽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이다. 하청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 등을 내걸고 (소속 하청업체가 아니라) 원청업체를 상대로 파업 투쟁을 벌이는 사례는 간혹 있어왔다. 악덕 하청업체 사장이 납품·도급 단가 중에서 이윤 몫만 키우고 하청 노동자의 임금을 더 쥐어짜는 경우도 있지만, 원청업체가 도급 단가를 올려주지 않는 한 임금 인상 요구는 한계가 빤하다. 그러나 원청업체는 법률적으로 교섭 상대방이 아니고, 그들에게 돌아온 건 번번이 해고 통지였다.
물론 하청업체 사장들도 원·하청 불평등 구조로 인해 고통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하청업체 사장들이 한데 똘똘 뭉쳐 거대한 원청 대기업을 상대로 파업 투쟁을 벌이는 ‘사건’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런데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지난 일이지만 바깥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그러나 의미 있는 저항’이 2001년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에서 일어났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사태는 대략 이렇게 전개됐다. 2001년 여름, 한진중공업에서 도급으로 일하고 있던 하청업체는 30여곳이었다. 업체마다 고용된 하청 노동자는 20∼100명선. 당시 하청 노동자들이 임금 및 도급 단가 인상을 요구하며 잔업을 거부하는 일이 하루이틀씩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가끔 농성도 벌어졌다. 한진중공업은 대도시인 부산에 자리잡고 있다는 지리적 강점을 감안하더라도 현대중공업 등 다른 조선 사업장에 비해 도급 단가가 낮은 편이다. 특히 10여년 동안 도급 단가가 거의 인상되지 않아 하청업체와 하청 노동자들의 감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나서면 따르겠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한진중공업노조 관계자는 “하청 사장들도 임금이 낮으면 선수(노동자)들을 바깥에서 스카우트하기 어렵게 된다”며 “하청업체 사장들이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참다 못해 일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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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하청업체 사장은 “기성(도급 단가)을 10년 넘게 한푼도 올려받지 못했다. 당시 단가로는 업체 운영이 안 될 정도로 어려웠다. 공사비 인상을 계속 요구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진정도 내봤다”며 “그러나 처음부터 무슨 단체행동을 하려고 하청 사장들이 뭉쳤던 건 아니다”고 말했다. 도급 단가 현실화 투쟁은 당시 한진중공업 협력회(하청업체 모임) 회장을 맡고 있던 ㅅ업체 사장의 주도로 이뤄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파업투쟁이나 집단농성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첫 싸움은 잔업을 거부하는 부분파업 형태로 시작됐다. 그래도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청업체 사장들은 급기야 하청 노동자들을 작업장에서 철수시켰다. 1주일가량 파업이 지속됐다.
당시 집단행동에 동참한 하청업체는 30개사 정도. 일부 하청업체는 동조하지 않았지만, 대다수 업체들이 공동행동에 나섰다. 물론 하루, 이틀 그리고 열흘, 싸움이 길어질수록 중간에 이탈하는 업체들도 생겨났다. 하청업체 사장들은 ‘단결’을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서로를 감시하기도 했다. 한진중공업노조 관계자는 “원청회사가 하청 사장들을 따로 따로 만나 교란시키는 각개격파 움직임도 있었는데, 하청 사장들이 서로 이탈을 막기 위해 경남 부곡하와이에 집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갖고 있던 휴대전화를 업체 사장들한테서 다 뺏고, 흩어지지 말자고 결속을 다지기도 했다고 한다.
발레오만도 하청업체의 ‘외로운 반항’도
그래도 작업에 복귀하는 사장들이 생겨났고 급기야 이런 제안까지 나왔다. “우리끼리 돈을 모아서 끝까지 버티는 업체한테 몰아주자.” 그러나 이 구상은 말에 그쳤고 대신 “도중에 이탈하는 업체 사장한테는 벌금조로 2천만원을 물리자”는 다른 제안이 제출됐다. 이에 대해 한 하청업체 사장은 “단합을 위해 돈을 모으자고 했는데 일부 업체는 내고 일부 업체는 안 내기도 했다”며 “벌금 2천만원도 구속력이 없어서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사태는 3∼4일씩 파업·잔업거부·작업장 복귀·부분파업을 왔다갔다 하면서 한달 가까이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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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싸움이 바깥에 잘 알려지지 않은 건 일부 하청업체들이 도중에 복귀한데다 전기공 등 선박 건조에 필요한 핵심 직종은 일을 계속해 작업이 마비되는 사태까지는 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청 사장들의 내부 결속이 흐트러지면서 파업은 깨지고 말았고, 싸움은 별다른 성과 없이 한달여 만에 막을 내렸다. 패배 이후, 싸움을 주도했던 협력업체 사장은 계약이 해지돼 반강제로 보따리를 싸야 했다. 한진중공업노조 관계자는 “당시 사건을 겪은 뒤 지금은 원청업체한테 미운털이 박혀서 ‘쫓겨날까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장들이 많다”고 말했다.
한 하청업체 사장은 “당시 한진중공업 실무자로부터 ‘너희 하청업체 구조조정부터 해라. 그러면 단가 인상을 생각해보겠다. 어떤 업체는 같은 도급액을 줘도 ‘관리’를 잘해서 수지를 맞추는데 당신들은 왜 그러냐?’는 말만 들었다”고 말했다. 하도급에서의 부품 단가 인하(CR·Cost Reduction·)와 유사하게 조선 업종에서 도급 단가 인하에 적용되는 것이 ‘시리즈 팩터’(연속작업에 따른 비용절감 요인)다. 똑같은 일을 2∼3년 이상 하면 자연스럽게 손에 익어 하청 노동자들이 더 빨리 일을 하게 되고, 그만큼 비용이 줄어들어 생산성이 향상되면 이 부분을 원청과 하청업체가 서로 나눠먹는 식이다.
한진중공업에서는 얼마 전 도장 일을 하는 아줌마 노동자들이 임금 체불에 항의해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일을 계약할 때 하청업체 사장이 도급액 중 절반을 선급금으로 받게 되는데 이 돈을 먹고 튀는 사례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도급 단가가 워낙 낮아서 임금을 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다 보니 돈을 받고 튀어버리는 하청 사장들도 있다고 한다. 한진중공업노조 관계자는 “여기 하청업체 사장 30여명 중에서 서너명 빼고는 다 스스로를 ‘거지’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문 닫으면 파산이니까, 겨우 먹고살 정도의 낮은 도급액에도 한숨과 탄식 속에 그냥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경주에 있는 발레오만도(옛 만도기계) 하청업체인 ㅈ사 사장의 2003년 9월 파업투쟁은 ‘외로운, 그러나 성과 있는 저항’에 속하는 사례다. 발레오만도는 주로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1차 밴더(부품 업체)다. 따라서 ㅈ사는 현대자동차로 치면 2차 밴더가 된다. ㅈ사는 발레오만도에서 받는 납품 단가가 10년 넘게 고정돼왔다. 이 회사는 잘나갈 때 종업원이 150명선에 이르렀으나 해마다 되풀이되는 납품 단가 후려치기로 갈수록 수익성이 나빠졌고, 결국 구조조정을 거쳐 현재 남은 종업원은 70여명이다. 2001년에 ㅈ사 사장으로 새로 부임한 이아무개씨는 2003년 9월 납품 단가 인하에 항의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그는 “회사를 인수하고 보니 CR이라는 게 있어서 원청회사가 해마다 단가를 까고 있었다. 인건비와 물가는 오르고 매월 적자가 났다. 납품 단가를 올려달라고 원청업체에 계속 요구했는데 안 들어주더라. 그렇다면 나도 납품 못하겠다고 버텼다”며 “식구들이 굶어죽게 생겼는데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청 노동자들이 가장 힘들다
이 사장은 다른 하청업체들한테 도움을 요청하지도 공동 행동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혼자 싸웠다. 파업이 며칠간 지속되자 현대자동차쪽에서 급히 중재에 나섰다. ㅈ사가 생산을 멈추면 현대자동차 공장까지 머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ㅈ사가 생산하는 부품은 상당한 기술을 요구하는 모터라서 다른 업체에서는 섣불리 만들지 못하고, 경쟁사가 따로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 사장이 발레오만도를 상대로 부딪친 것은 ‘배짱’도 있었지만, 이런 기술적 우위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국 짧은 파업의 결과 신규 아이템(부품)에 대해서는 납품 단가를 올려받을 수 있었다. 이 사장은 “내가 어필하니까 원청회사가 마지못해 올려주긴 했는데 그 뒤 내가 ‘괘씸죄’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발레오만도는 최근 이 부품의 납품선을 이원화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납품처를 다른 회사로 분산함으로써 ㅈ사를 손보겠다는 것이다. 올 것이 온 것일까?
물론 하청 사장들의 반란이 의미 있는 싸움이긴 하지만, 도급·하청 업체 사장들을 무조건 두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저기서 도급·하청업체들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것을 보면 그래도 ‘중간 착취’ 등을 통해 먹을 이윤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원청업체들은 “우리가 납품 단가를 후려쳐도 도급을 맡아 해보겠다는 다른 업체들이 줄을 섰다. 더 낮은 단가를 받고 치고 들어오겠다는 하청업체도 많다”고 말한다. 납품 단가 인하에도 불구하고 하청업체 사장들이 실제로 챙기는 몫이 ‘정상 이윤’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다. 이래저래 원·하청 불평등은 하청 노동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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