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일하고 더 배우고 똑같이 받는 변화의 현장…유한킴벌리 외에 식품공장이나 치과병원도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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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근무시간은 줄고 월급은 그대로 받는데, 회사는 회사대로 성장하며 사회 전체적으로는 고용이 늘어나는’ 환상적인 윈윈(상생)이 과연 가능할까?
현실에선 도무지 있기 어려울 듯한 이 실험적 모델이 이미 몇몇 기업에 채택돼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제조업에 이어 병원 같은 서비스 업체로도 옮아가고 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UIC시카고치과병원(원장 김영훈)은 한국노동연구원 부설 뉴 패러다임 센터(소장 신봉호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의 도움을 얻어 지난 7월부터 시작한 ‘뉴 패러다임’(새로운 경영 틀) 개발 작업을 12월3일 마무리짓고 이달 중 6명의 신입 직원을 더 뽑는 대로 시행에 들어갈 계획이다. 뉴 패러다임은 근무제 변경과 평생학습 체제를 적절히 섞어 생산성 향상과 일자리 창출을 꾀하는 경영 체제로, 문국현 사장의 유한킴벌리 모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뉴 패러다임에 따라 UIC치과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외형적인 변화는 직원들의 근무 방식이다. 현재 오전, 오후팀으로 나눠 2교대로 일터에 투입되고 있는 20명 안팎의 직원이 바뀌는 체제에서는 3주일을 한 사이클로 삼는 3교대제에 따라 근무하게 된다. 대신 평일을 기준으로 할 때 병원 문을 여는 시간은 현행 ‘오전 8시~오후 8시’에서 ‘오전 8시~오후 10시’로 늘어난다.
치위생사(간호사) 김소영씨의 예를 보자. 현재 김씨는 오전팀이면 오전 8시~오후 6시까지 일하고 오후팀일 경우 오전 10시~오후 8시까지 일하고 있다. 바뀌는 체제에서는 조금 복잡하다. 첫 번째 주 월·화요일은 오전 8시~오후 8시까지 일하고 수요일에는 오전 8~11시까지 교육을 받는다. 수요일 오후와 목·금요일은 휴무이며 토·일요일에는 오전 8시~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 다음 월·화요일은 다시 휴무, 수요일에는 오전 8~11시까지 다시 교육을 받고, 이날 오후부터 업무에 들어가 목·금요일에는 전주와 시간대를 약간 바꿔 근무를 하게 된다. 그 뒤 다시 이틀 휴무 뒤 근무하는 방식을 이어가게 된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틀 일하고 이틀 쉬는 것을 기본으로 삼되 수요일 오전은 늘 교육, 오후에는 휴무와 근무를 번갈아 하는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21일 중 12일을 일하고 7.5일을 쉬며, 교육시간은 1.5일이다. 평균 주당 근로시간이 현행 60시간(교육시간 포함)에서 42시간으로 크게 줄어드는 셈이다.
회사(병원) 처지에서는 어떨까? 진료 시간이 크게 늘어 일반 제조업체로 치면 가동률 상승 효과를 거두게 된다. 지금은 1일 10.5시간, 연 310일을 진료를 하는 데 견줘 바뀌는 체제에서는 1일 14시간, 연 363일 진료 서비스를 한다. 회사가 떠안는 부담은 3교대제를 채택하기 위해 더 뽑게 되는 직원 6명의 인건비다. 회사쪽은 인건비가 30%가량 늘어나는 반면, 매출과 이익은 그 이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김영훈 원장은 “물론 진료 일수가 늘어난다고 환자 수가 정비례해서 늘어난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중요한 건 지금 체제를 직원들이 힘들어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시간에 쫓기는 피곤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더라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고 병원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뉴 패러다임 컨설팅을 받으면서 직원들이 제안을 적극적으로 하고, 지금 하는 일에 프라이드(자부심)를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컨설팅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소영씨는 “기술 개발이 빠른 치과 업무에서는 새로 배워야 할 게 많은데, 시간에 쫓겨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며 “앞으로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심 중”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1인당 교육시간 5~6배
UIC치과의 성과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법한데, 똑같은 모델을 채택해 이미 결실을 거둔 예도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월 뉴 패러다임 센터에서 맨 처음 컨설팅을 받아 7월부터 뉴 패러다임을 채택한 (주)풀무원이 대표적이다.
충북 음성에 있는 풀무원의 제3두부공장은 컨설팅 결과에 따라 3조3교대제에서 4조3교대로 바꿨다. 전체 근로자들이 3개조로 나뉘어져 매일 8시간씩 공장을 돌리던 데서 ‘5일 야근 → 2일 휴무 → 5일 중근 → 1일 휴무 → 1일 교육 → 5일 조근 → 1일 휴무’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따라 근로자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임금 감축 없이 56시간에서 44.8시간으로 줄었다. 회사 처지에서는 교대제 변경으로 근로자가 15명에서 20명으로 늘어 인건비는 33억원에서 43억원으로 늘어나는 부담을 안는 대신, 두부 생산량은 30%가량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 조를 더 고용하는 바람에 인건비는 늘었지만, 공장을 세우는 일이 없어진 데서 비롯된 결과다. 여기에 1인당 연간 교육시간이 현행 24시간에서 144시간으로 5~6배 껑충 늘어나 앞으로 생산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풀무원 음성공장의 노호준(27)씨는 “예전 3조3교대 때보다 근무시간은 줄었어도 급여는 내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육시간이 늘어 현장에서는 좋아들 한다”고 말했다. 노씨는 “1년치 근무계획이 제시되기 때문에 미리미리 계획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풀무원은 음성공장의 사례를 회사 전체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인환 음성공장 생산팀장은 “회사로선 불리한 선택이 아니냐는 외부 시각이 있는데, 경영진의 시야에 따라 다르다”며 “이제는 직원들이 회사와 기업 이념에 열광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경북 문경에 있는 대명화학(대표 박오진)도 뉴 패러다임 센터의 컨설팅을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파우치 랩 등을 생산하는 대명화학은 2조2교대(6일 12시간, 일요 휴무)에서 3조2교대(연속 근무)로 바꾼 뒤 압출 실적을 월 460t에서 585t(27%)으로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근로자 수가 38명에서 54명으로 42% 늘어난 데 견줘선 작은 폭의 증가인데, 전에는 없던 근로자 교육시간을 확보함에 따라 질적 개선을 기대하고 있다. 근로자의 과로를 줄이고, 회사의 성장세도 어느 정도 확보하면서 사회 전체로는 고용을 창출한 전형적인 사례로 꼽을 만하다.
재계는 반신반의 분위기
뉴 패러다임에 대해 재계 전반적으로는 아직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교대제 사업장 또는 장치산업에서나 채택할 수 있는 제한적인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화점, 할인마트 같은 교대제 사업장은 전체의 10~20%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교대제 사업장이라고 하더라도 열악한 경영 환경에 빠져 있는 곳은 수용하기 어렵다. 신규 채용에 대한 부담을 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제약 조건 탓에 널리 확산되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경영자총협회 김동욱 경제조사팀장)
이에 대해 신봉호 소장은 “뉴 패러다임의 핵심은 근무제를 바꾸는 게 아니라, 학습 기업을 만들자는 것”이라며 “교대제 사업장이 아니더라도 예비 인력을 늘려 근로자들에게 학습과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뉴 패러다임 확산을 위한 정책 개발 및 제도 개선을 위한 대통령 자문 ‘사람입국 신경쟁력특위’(위원장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의 장영철 위원(경희대 경영학부 교수)도 “2교대냐 3교대냐 하는 것보다 작업 방식을 어떻게 효율화하느냐가 키포인트(핵심)”라고 말했다. “뉴 패러다임은 50시간에 하던 일을 40시간에 하고, 남는 시간에 직원들이 자기 계발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지친 몸을 쉬도록 하고, 교육을 시켜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유한킴벌리처럼 시장지배적 사업장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이라는 시각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유한킴벌리가 근무시간을 줄이고 인력을 늘리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 것은 시장점유율 추락으로 위기에 빠진 1993년이었다. 유한킴벌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니다. 경영 역량과 글로벌 시야를 갖고 있는 기업에는 모두 적용될 수 있다.”
실제, 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기업은 차츰 늘어나는 분위기다. 이미 채택해 적용하고 있거나 할 예정인 풀무원, 대명화학, UIC치과에 이어 국민은행, 대구의 (주)삼보, 경기도 평택의 굿모닝병원, 대전에 본사를 둔 (주)동양강철이 뉴 패러다임 센터와 계약(MOU)을 맺어 컨설팅을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농업기반공사, 경상남도청을 비롯한 공공 부문에서도 뉴 패러다임을 채택하기 위해 컨설팅을 받는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의 벽을 넘으려면…
장영철 위원은 재계 전반의 분위기가 아직은 뜨뜻미지근한 데 대해 “경영자들이 (뉴 패러다임을) 노조 친화적, 근로자 친화적 모델로 여기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또 경영진의 역량 부족에 따른 자신감 상실도 이유로 꼽혔다. “뉴 패러다임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최고경영자의 시장 개척 능력이 뒷받침돼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경영자에 부담이 되는 모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뉴 패러다임의 뿌리인 유한킴벌리의 윤리경영, 투명경영을 받아들이려면 경영 철학과 가치관을 바꿔야 하는데, 이를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장 위원은 진단이다.
장영철 위원은 “어떤 기업이든 이제 임금으로 승부를 내려는 마인드로는 중국의 벽을 넘을 수 없다”며 “인건비가 늘더라도 디자인, 기술력 같은 무형 자산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엄혹한 시절을 맞아 곳곳에서 인력 감축 칼바람이 불고 있는 시절이어서 뉴 패러다임은 반사적으로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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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패러다임의 뿌리는 문국현(55) 유한킴벌리 사장이다. 문 사장은 예비조 편성과 평생학습 시스템으로 요약되는 ‘Y-K모델’(유한킴벌리 생산방식)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이형모 사장 등과 함께 2002년 6월 ‘뉴 패러다임 포럼’ 준비 모임을 처음으로 연 데 이어 1년 만인 지난해 11월 포럼을 창립했다.
문 사장은 지난해 12월 청와대 정책실의 주선으로 노무현 대통령에게 뉴 패러다임을 직접 설명하는 기회를 얻었다. 뉴 패러다임 운동에 급속도로 탄력이 붙은 게 이때부터였다. 당시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봉호 정책조정비서관의 주선으로 문 사장의 특강을 들은 노 대통령은 “이런 보고를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며 “당장 실시하라”고 힘을 실어줬다.
문 사장의 노력과 청와대의 뜻이 합쳐지면서 추진력을 얻은 뉴 패러다임 운동은 올 3월 들어 한국노동연구원 부설 뉴 패러다임 센터(소장 신봉호)의 개설로 이어졌다. 뉴 패러다임 시범사업을 벌이는 센터와 함께, 뉴 패러다임 정책개발 및 제도 개선을 위한 대통령 자문 ‘사람입국 신경쟁력특위’(위원장 문국현)도 이때 꾸려질 예정이었다가 대통령 탄핵 사태 때문에 5월로 미뤄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특위 위원은 이형모 사장, 신봉호 소장, 장영철 경희대 교수, 김장호 한국직업능력개발원장,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이다.
뉴 패러다임 센터는 컨설팅을 희망하는 기업들로부터 전화, 인터넷, 방문을 통한 신청을 받아 △최고 경영층의 혁신 의지 △노사 협력관계 △일자리 창출 효과 등을 기준으로 심사를 벌인 뒤 무료로 컨설팅을 지원한다. 교대조 실시 기업이 2~3교대조를 3~4교대조로 늘리면서 신규 인력을 추가로 고용하면 1명당 월 60만원의 지원금을 1년간 지급하는 등 자금 지원도 이뤄진다. 대신 해당 기업에선 3~4명의 인력을 태스크포스(TF)팀에 배치해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뉴 패러다임 센터와 사람입국 신경쟁력특위는 민간 조직인 뉴 패러다임 포럼과 함께 뉴 패러다임 재단을 만들어 세계적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의 이름을 딴 혁신상을 수여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뉴 패러다임의 모범 사례를 발굴해 여러 기업들의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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