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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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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잡아먹는 ‘슈퍼개미’

등록 2004-10-08 00:00 수정 2020-05-03 04:23

막대한 시세차익 챙기는 증권가 개인투자자들… 인수·합병설에 일반 개미들 번번이 당해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지난 2월7일 금융감독원 공시감독국에는 ‘주식 대량보유(변동) 보고’가 1건 접수됐다. 올해 22살로 신분을 ‘회사원’이라고 밝힌 경규철씨가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는 서울식품 주식 53만7580주를 취득해 10.87%의 지분을 확보했다는 내용이었다. 현행 증권거래법에는 거래소 상장법인 또는 증권업협회 등록법인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하고, 그 뒤 1%포인트 이상 변동할 경우 금감원과 거래소(협회 등록법인의 경우 협회)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서울식품 주식 사고팔아 96억원 챙긴 회사원

초기부터 여러 면에서 의문을 불러일으켰던 경씨의 당시 주식 취득 사실은 증권가에 ‘슈퍼개미’의 출현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슈퍼개미는 일반 개인투자자를 일컫는 ‘개미’에 빗댄 것으로, 상장 또는 등록 기업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않은 거액의 개인투자자를 가리킨다. 외국인·기관투자가가 휩쓰는 주식시장에서 맥을 못 추는 일반 개미와 달리 인수·합병(M&A)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뒤 막대한 시세 차익을 남기는 괴력을 발휘한다는 뜻에서 ‘슈퍼’로 불린다.

경씨가 ‘코알라’ 브랜드의 제빵회사인 서울식품 주식을 사들이던 때 이 회사는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 2001년 156억, 2002년 11억, 2003년 21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하는 등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뚜렷한 실적 개선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경영권을 인수하겠다고 밝힌 것과 달리 속뜻은 단기 차익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통상 인수·합병에 대한 기대감이 일 경우 주가는 오르게 마련이다. 경씨의 아버지가 서울식품의 상무로 일한 바 있다는 점도 의혹을 부풀린 대목이었다. 그럼에도 경씨는 금감원에 보고할 때 인수 목적을 ‘경영권 참여’라고 명시했고, 그 뒤 몇몇 언론매체와 한 인터뷰에서도 이런 뜻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던 경씨는 추석 연휴 직전이던 지난 9월25일 금감원에 주식 대량보유 변동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번엔 주식을 대대적으로 팔아치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보고 내용을 보면, 경씨는 9월22~30일(결제일 기준) 보유 지분 가운데 30만주(지분율 12.36%)를 주당 평균 2만580원씩에 장내 매도한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따라 경씨가 보유한 보통주 주식은 2만4314주(0.99%)로 축소됐고, 지난해 12월16일 장내 매입을 시작해 한때 지분율을 22.41%까지 높이면서 불거졌던 서울식품 인수·합병 논란에는 마침표가 찍혔다. 경씨는 이 와중에서 모두 64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시세 차익을 거뒀다.

증권가에서는 이를 두고 애초부터 경영권 인수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면서도 인수·합병 분위기를 띄워 일반 개인투자자들을 끌어들인 다음 단기 차익을 챙긴 슈퍼개미의 전형이라며 입방아를 찧고 있다.

‘원조’로 불리는 경씨 외에도 슈퍼개미로 통하는 이들은 더러 있다. 디스플레이 부품업체인 코스닥 등록업체 포커스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한 바 있는 임현호(34)씨, 지난 9월24일 상장사인 아이브릿지 주식을 14.4% 확보한 왕경립(52)씨, 역시 상장사인 남한제지를 겨냥해 적대적 인수·합병을 선언한 개인투자자 박주석(40)씨 등이 증권가에서 슈퍼개미로 회자되고 있다.

이들 중 특히 임현호씨는 9월 초 포커스 주식 154만8628주를 주당 141.3원에 매입한 뒤 같은 달 16일부터 22일까지 전량을 주당 270.5원에 팔아치웠다.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2억원가량의 차익을 거둔 셈이다. 임씨 역시 경씨와 마찬가지로 매입 당시엔 경영권 인수 목적이라고 밝혔다가 팔 때는 “정관상 ‘초다수의 결제’를 채택하고 있어 경영권 확보가 불가능해 매도한다”고 밝혀 의구심을 낳았다. 보름도 지나지 않는 동안 인수 목적에 중대한 변화가 왔다는 설명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경영권 인수’에서 돌변?… 일반개미 운다

소문 빠른 증권가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림에도 슈퍼개미의 면면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금감원에 신고한 내용을 뒤져봐도 신분을 ‘회사원’ ‘기타 직위’ 등 막연하게 표현하거나 아예 빈칸으로 비워두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이들이 대체로 투자 업무에 전념하고 있는 개인들이고, 돈을 대는 전주를 뒷배경에 깔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슈퍼개미가 인수·합병 기대감을 부풀린 뒤 단기 차익을 챙기는 뒷면에 일반 개미들의 눈물이 흐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슈퍼개미가 겨냥하는 목표물은 예외 없이 외국인이나 기관투자가에겐 관심 밖인 중소형주, 그 중에서도 실적 부진 등으로 위험도가 높은 종목이다.

슈퍼개미의 돈놀이 행태가 일반 개인투자자들에게는 대단히 불합리하게 여겨질 법한데, 현행 법규상 이를 막을 근거는 없다. 지분을 5% 이상 확보할 때와 이후 1%포인트 이상 변동이 있을 때 신고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인수 당시 ‘경영권 확보’를 목적으로 내걸었다가 이를 바꾸는 것은 원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슈퍼개미는 이런 법적인 맹점을 십분 활용하는 셈이다.

물론, 슈퍼개미의 행태가 시세 조종 혐의와 연결돼 있다는 정황이 뚜렷하면 엄격한 제재를 받는다. 실제 이런 사례가 최근 나오기도 했다. 금감위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9월22일 슈퍼개미 박아무개씨를 시세 조종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것이다. 증선위는 박씨가 8월2일 코스닥 기업인 대진공업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일 당시 사실상 경영에 참여할 뜻이 없었음에도 매매 거래를 유인할 목적으로 보유 목적을 허위로 기재 공시했다는 혐의를 뒀다. 박씨는 36만5천주(5.75%)를 주당 1053원에 샀다가 그날 곧바로 주당 1134원에 팔아치웠다. 뿐만 아니라 인수 목적을 ‘경영 참여’라고 해놓고 곧바로 매도하면서 어처구니없게도 “한국경제 불안감, 중소기업 경영 불확실성”을 사유로 꼽았다. 증권감독 당국으로선 일반 개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허위 공시라는 혐의를 둘 수밖에 없는 행태였다. 그렇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허술한 슈퍼개미의 사례로 여겨진다.

슈퍼개미가 발호하는 근거인 법망의 맹점에 대해선 정부 당국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재정경제부는 지분 5% 이상 확보 및 1%포인트 이상 변동 때 보고·공시하도록 돼 있는 규정에 더해 ‘인수 목적 등 중요한 사항에 변화가 있을 때’도 보고·공시 의무를 지우는 쪽으로 증권거래법을 바꾸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합병 분위기를 띄우다가 느닷없이 지분 확보 목적을 뒤집어 곧바로 지분을 털고 나가는 행태를 되도록 줄여보자는 취지다.

한국 증시의 신뢰도는 어디로

증권가는 이렇게 제도를 보완하더라도 투자자들의 주의 말고는 근원적인 해결책이 없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대우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는 “슈퍼개미가 타깃으로 삼는 기업의 경우 뚜렷한 주인이 없고 유동주식 수가 많은데 기업 내용은 부실한 곳이 많다”며 “중저가 중에서 큰 폭의 수익률을 올린 ‘학습효과’ 때문에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일반 개인들이 많이들 가세한다”고 말했다. 슈퍼개미가 발호하는 뒷면에는 법망 미비 못지않게 편승 매매를 통해 한탕 벌고 싶은 개미들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들의 욕망 앞에서는 잘 정비된 제도적 장치 또한 무기력할 수밖에 없으며, 증시의 건강성과 신뢰도는 자꾸 떨어지게 된다. 한국 증시의 일그러진 단면인 슈퍼개미의 개미 포식을 무위로 돌릴 ‘개미의 지혜로운 자제’는 기대난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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