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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지갑을 열게 해줘라?

등록 2004-08-27 00:00 수정 2020-05-03 04:23

최근 부상한 ‘부자소비론’ 진단… 불황에도 최상위 고객들 소비는 줄어들지 않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부자들이 돈을 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지난 8월6일 어느 점심식사 자리에서 매고 있는 넥타이가 명품이냐 아니냐가 화젯거리로 등장하자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꺼낸 말이다. 이 부총리의 이른바 ‘골프장 경기부양론’도 부자들의 소비를 살려야 경기가 회복된다는 주장을 바탕에 깔고 있는 만큼 ‘부자소비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현재 건설 중이거나 사업을 준비 중인 250여개 골프장을 빨리 허가해줘야 경기 진작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분배 위주 정책 때문에 움츠러들었다?

반면 청와대 이병완 홍보수석은 “상류층은 내수 진작에 별 도움이 안 되며, 내수 견인을 위해서는 오히려 중산층을 건전하게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부자소비론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연 여윳돈을 가진 부자들이 국내에서 마음껏 소비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부자소비론’은 얼마만큼 정확한 진단이고 또 일리가 있는 것일까?

소비가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견인차인 건 분명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소비의 성장기여율(국민계정 기준)은 70·80년대 중반까지 50% 정도에 머물렀으나 80년대 후반부터 크게 높아져 1988년 이후 2002년까지 64∼66%를 기록했다. 국내총생산(GDP)의 최종 수요 항목(소비·투자·수출) 중 소비의 부가가치 유발계수(최종 수요가 1단위 발생할 때 직·간접적인 파급 과정을 통해 유발된 부가가치 효과)는 2000년 0.79로, 투자(0.65)와 수출(0.63)의 유발계수보다 높다. 투자와 수출에 비해 소비가 경제 성장을 이끄는 현상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이다.

메릴린치는 최근 내놓은 에서 지난해 금융자산 100만달러(12억원) 이상인 한국의 부자는 6만5천명으로, 1년 전에 비해 18%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는 전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증가율이다. 부자들의 상대적 소득이 늘면서 소득 격차도 확대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분기 도시 전 가구 소득5분위배율(상위 20% 계층의 소득/하위 20% 계층의 소득)은 7.28배로 나타났다. 상위 20%의 월평균 소득은 587만2천원인데 하위 20%층은 80만6천원으로 7.28배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대학에서 ‘부자론’을 강의하는 서울여대 한동철 교수(경영학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 중 재산세 납부액 100만원 이상이고 금융자산만 1억원이 넘는 부유층이 약 5%인데 이들이 전체 예금의 50%, 백화점 매출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한 교수는 “월 소득 500만원 이하가 전국 가구의 95%인 반면 월소득 700만원 이상인 부자가 10만명 정도 된다”며 “부자들이 해외에 나가 구매하는 것을 전부 국내에서 산다면 올해 국내 소비는 현재보다 50% 이상 좋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부자들은 다른 부자들한테서 돈을 번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가져갈 몫 중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해 부를 축적한 것”이라며 “일반인들은 부자들이 쓰는 돈을 받아서 생활하기 때문에 부자들이 돈을 써야 경제도 회복된다”고 말했다.

“부유층 소비가 위축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현대백화점유통정보연구소 김인호 소장은 “고유가 등에 따라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몰라 부자들이 현금을 들고 있는 상황”이라며 “장래 경기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부유층이 소비를 줄이고 움츠리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신세계유통연구소 노은정 소장은 “분배 위주의 정책 등 부유층 소비에 반감을 갖는 분위기 때문에 부자들이 눈치보면서 맘놓고 돈을 못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동철 교수는 “국회에서 ‘좋은 부자상’을 제정해 1만명한테 상을 주거나 언론에서 ‘부자들이 지갑을 열도록 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이고, 대통령도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면서 세금 많이 낸 부자들을 표창하는 방법도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부자들이 돈을 안 쓰는 것인지 아니면 가진 자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지갑을 닫고 있는 것인지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부유층의 소비를 규제하는 법·제도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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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절대적 비중 차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자들이 과연 지갑을 안 열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서울 강남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쪽은 “백화점을 찾는 고객 수는 떨어지는 반면 객단가(1인당 상품 구입액)는 올라가고 있다”며 “중위층 이하 고객은 경기침체로 백화점 소비에서 이탈하고 있지만, 연간 1천만원 이상 구매하는 상위 고객들의 소비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푼두푼 모아 명품을 구입하는 고객들은 이탈하고 있지만 구매액 기준 상위 2.5%에 속하는 SVIP(Special VIP) 고객들의 소비는 계속 늘고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예금자산 등을 합쳐 재산이 10억원 이상 되는 부유층이나 의사·변호사·기업체 임원 등 고위직에게만 발급되는 플래티늄카드의 매출액은 어떨까? 플래티늄 회원이 7만명인 삼성카드쪽은 “60만∼70만명(전체 카드회원의 20%)에 이르는 프리미엄 회원이 카드 매출의 80% 정도를 차지한다”며 “플래티늄 회원은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은데다, 원래 경기변동에 비탄력적인 소비 경향을 보이는 계층이라서 우려할 정도로 플래티늄 카드 매출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국민카드쪽도 “플래티늄카드 회원이 6만5천명 정도인데 매출이 크게 줄어드는 경향은 아직 안 보인다”고 말했다. 전체 카드회원 2500만명 가운데 플래티늄 회원이 13만8천명인 비씨카드의 경우 플래티늄카드 매출액은 지난해 2분기 4065억원에서 올 2분기에 5153억원으로 오히려 더 늘었다. 정부의 분배우선 정책 때문에 부유층이 지갑을 안 열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지만, 백화점이나 플래티늄카드쪽만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론 부유층이 ‘해외’ 소비지출 규모가 늘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부자들의 소비는 경기를 타지 않는데다 실제로 부유층의 국내 소비가 심각할 정도로 감소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다.

특히 경기회복을 위한 ‘소비의 적극적인 역할’이란 점에서 볼 때 부자들의 소비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니다. 지난 1분기에 도시 전가구 소비지출 배율(소득 상위 20% 계층의 소비지출/하위 20% 계층의 소비지출)은 2.93배로 나타났다. 상위 20% 계층의 소비지출(월 336만4천원)이 하위 20% 계층의 소비지출(114만6천원)의 2.93배에 달한 것인데, 비록 상위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지만 소비 규모로 보면 상위 20%의 소비가 전체 소비의 80%에 달하는 건 아니다. 고소득층의 소득이 아무리 늘어나도 비싼 옷을 여러 벌 껴입지 않는 한 부자들의 소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비씨카드의 경우 지난 7월 월평균 총매출액 10조원 중에서 플래티늄카드 고객의 매출액은 1897억원에 그쳤다.

부자들이 돈을 쓰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어떤 계층을 주요 타깃으로 삼고 소비를 진작시킬 것이냐”는 다소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깔려 있다. 최근 경기부양 수단을 놓고 벌어지는 “감세냐, 재정지출 확대냐”는 논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나라당은 감세를 주장하는 반면 열린우리당과 정부는 재정지출 확대로 대응 카드를 내놓고 있는데, 이 논쟁은 부유층을 통해 경기회복을 견인할지 아니면 저소득층의 소비기반 확충을 통해 총수요를 진작시킬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로소득자와 개인사업자의 절반가량이 면세점 이하로 사실상 비과세 대상이라서 감세는 중상위 소득층을 주요 수혜자로 잡는 반면, 정부 재정지출 확대는 저소득층 등 취약 계층에 대한 복지 지출을 늘리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황인성 수석연구원은 “재정지출에 비해 감세는 직접적으로 소비자에게 영향을 미쳐 소비 여력을 증가시켜준다”며 “수차례 감세 정책을 실시한 미국에서는 감세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면서부터 벌써 소비심리가 살아나 경기회복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감세냐 재정지출 확대냐

그러나 국회도서관 박종현 입법정보연구관(금융)은 “감세는 소수 부자들을 중심으로 한 상속세나 소득세 또는 사치성 상품에 대한 특별소비세를 깎아주는 형태가 될 텐데, 감세로 인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 지출은 그만큼 더 줄어들게 된다. 미국에서 소비가 안 줄어든 이유는 감세 효과보다는 부동산 거품이 당초 예상과 달리 빨리 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며 “재정지출 확대를 통해 중산층 이하의 소비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막야줘야 한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부유층한테서 걷는 세금을 더 늘려서 이 재원을 바탕으로 공적 이전지출을 늘려 소득분배를 개선시키고, 이를 통해 저소득층도 돈을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경기 회복을 꾀하는 더 효과적인 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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