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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의 주식시장 돌진?

등록 2004-04-09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부의 연기금 주식투자 장려는 옳은가… 변동성 많은 한국 증시에선 위험한 모험이란 비판도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3월31일 정부는 55개에 달하는 모든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전면 허용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주식투자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현행 기금관리기본법 조항을 폐지하고, 기금자산운용지침을 위반하지 않는 한 투자 손실의 책임도 묻지 않는 면책조항을 신설하기로 했다. 연기금 운용 담당자가 적극적으로 주식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이다. 현재 각종 연기금에 조성된 여유자금은 190조4천억원으로, 연기금 주식투자는 국민연금·공무원연금·사학연금 등 일부 기금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돼왔다.

정부는 각종 연기금을 주식시장 부양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지난 2001년과 2003년 국회에서도 기금관리기본법을 고쳐 주식투자 전면 허용을 추진했지만 주식투자가 연기금 부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김화동 기획예산처 기금총괄과장은 “만약 국민연금의 목표수익률이 5.5%인데 주식시장에서 6%의 수익을 낼 수 있다면 주식투자 비중을 확대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야 가입자들한테 보험료를 덜 받고도 기금을 운용할 수 있다”며 “하지만 정부가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강요하는 건 아니고 자율적으로 주식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초대형 기관투자자로?

그러나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연기금은 공공적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투기적 주식시장에서 운용돼서는 안 된다”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을 장악해 위험성이 더 높아진 상황에서 연기금 주식투자를 전면화하겠다는 건 가입자들의 노후예탁금을 투기판에 퍼붓는 격”이라고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오건호 박사는 “연기금의 주식투자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해도 주식시장이 안정을 되찾고 변동성이 낮아질 때까지 투자 확대를 자제해야 한다”며 “가입자들이 동의하는 중장기 운용방안이 새로 수립되기 전까지는 주식투자 비중이 현 수준에서 고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연기금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국민연금기금만 보자. 국민연금은 4월1일 현재 137조3천억원을 적립해 117조6천억원(총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적립액 규모가 정부예산보다도 더 큰 단일기금이다. 운용기금 중 금융자산(채권·주식 등) 투자액은 103조6천억원에 달한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위험자산인 주식투자 규모(누적액)를 지난해 7조6천억원에서 올해 약 10조원(운용총액 중 7.8%)으로 늘려 잡았다.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인 채권에는 올해 약 100조원(85%)을 투자할 계획이다. 국민연금은 앞으로도 수십년간 가입자 수가 수혜자 수를 압도하기 때문에 천문학적 규모의 적립금이 쌓이는데, 정부 재정 추계에 따르면 보험료를 15.90%까지 높일 경우 2045년에 적립기금이 무려 1330조원(2000년 불변가격 기준)에 달하게 된다.

정부는 증시 안정을 위해 국민연금기금 주식투자 대폭 확대를 중장기 운용방향으로 이미 정한 상태다. 주식투자 비중을 2012년에 20∼30%까지 늘릴 경우 주식투자 기금은 약 80조∼120조원에 이르게 된다. 4월2일 현재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388조원이므로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초대형 기관투자가로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수백조원에 이르는 국민연금 여유자금을 금고에 넣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국민경제를 고려할 때도 어떤 형태로든 굴려야 한다. 그러나 주식투자 비중을 확대하는 일이 과연 바람직하고 또 불가피한 것일까?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잔액은 2003년에 위탁투자와 직접투자를 합쳐 6조9천억원에 이른다. 지난 1991년부터 주식투자에 나선 이래 5조3천억원의 누적수익(누적수익률 12.73%)을 올렸다. 시장 상황에 따라 대규모 평가손실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손실을 만회하고도 이익을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간의 투자수익률 측면에서 보면 채권에 비해 수익률이 결코 높지 않다. 박재홍 국민연금관리공단 채권팀장은 “과거 수익 흐름을 보면 긴 기간으로 볼 때 10년 이상 장기 채권 투자 수익률이 주식보다 더 높았다”고 말했다. 주식투자의 경우 실제로는 손실을 많이 봤는데 손실 만회를 위해 주가가 오를 때 당장 팔아치우는 행태를 반복했기 때문에 수익률이 높아진 것뿐이다. 이처럼 국민연금기금이 단기 주식투자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기대하듯 기관투자가로서 증시 안정, 성장에는 별다른 역할을 못하는 형편이다.

침체돼도 빠져나오기 어려워

사실 주식시장이 가라앉으면 언제나 은행·보험·증권·투신 등 기관투자가와 큰손들로부터 “연기금 주식투자 비중을 늘려라”는 요구가 터져나왔고, 정부가 연기금 운용주체들의 팔을 비틀어 막대한 규모의 연기금을 주식시장에 쏟아부었다. 주식시장이 비틀거릴 때 구원투수로 동원된 셈이다. 하지만 주식투자 편입 비율이 높아져도 주식시장을 떠받치는 데는 항상 실패했다. 주식시장이 조금 오른다 싶으면 연기금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되팔고 나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오건호 박사는 “앞으로 주식투자 비중이 지금보다 더 높아질 경우 연기금의 덩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한번 주식시장에 들어가면 시장이 침체될 때 손절매도 못하고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계속 끌려들어가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초대형 기관투자가인 연기금마저 주식시장에서 빠져나오면 금융시장이 급속히 대혼란에 빠질 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국민 경제를 고려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국민경제고 뭐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외국 투기자본만 주식시장에서 팔고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결국 국민연금의 여윳돈이 많다고 해서 이 기금을 경제정책 도구로 끌어들일 경우 뒷세대가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나아가 한국 증시는 소규모 개방시장이라서 전 세계에서 변동성이 가장 큰 시장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민간 증권사도 고도의 헤징기법과 전략적 투자 배분을 통해 투자 위험을 줄이려 하지만 날고 긴다는 사람들도 손실을 보는 판이다. 이처럼 국내외 경기변동에 따라 크게 출렁이는 주식시장에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국민의 노후생활 쌈짓돈을 들이붓는 건 ‘위험한 모험’이다.

정부는 또 미국의 최대 연기금 펀드인 캘퍼스(캘리포니아공무원퇴직연금)의 경우 전체 자산(2003년 말 현재 약 1600억달러·약 190조원)의 65%가량을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면서 우리도 연기금 주식투자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캘퍼스의 주식투자 규모는 뉴욕증권거래소의 어마어마한 시가총액(2003년 말 10조8천억달러·약 1경2690조원)에 비하면 비중이 극히 미미하다. 캘퍼스는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작아서 시장이 추락할 때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막대한 규모의 국민연금기금이 안전자산인 채권투자에 지나치게 쏠려 있어서 특정 투자자의 독식에 따른 채권시장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며 “채권을 줄이고 주식투자 비중을 더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국내 채권시장은 지난 3월 현재 약 620조원(발행잔고 기준)에 이른다. 현재 국내 채권에 투자된 국민연금기금은 88조8천억원(채권시장의 13.8%)에 달한다. 국민연금관리공단 박 팀장은 “국민연금기금이 채권 유통시장보다는 발행시장 중심으로 투자하고, 특정 채권에 쏠리지 않게 중립적으로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채권시장 금리가 확 오르거나 빠지는 등 시장금리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기금의 성격 · 역할 고민은 없고…

주목할 대목은 정부가 “이대로 가다가는 국민연금 재정이 바닥난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퍼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재정 고갈 불안을 부추겨 ‘더 내고 덜 받아야 국민연금이 생존할 수 있다’거나 ‘주식시장에 투자해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교육, 학습시키는 것이다. 진주산업대 송원근 교수(산업경제학과)는 “연금기금을 지역·기업 금융에 공공적으로 어떻게 활용할지,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더 강화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등 기금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고민은 없고, 정부 안에서 무조건 연기금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만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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