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갈’ 문제는 절반 정도 써버렸을 때 나타난다는 석유정점 이론, 정점 여부는 오직 사후적으로만 계산할 수 있는데…
▣ 김명진 과학평론가
유가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들 했던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 고공행진을 계속하다 최근에야 겨우 하향세로 돌아섰다. 한때 배럴당 150달러 선을 넘어섰던 국제유가는 최근 한달 사이 20% 가량 떨어져 석달여 만에 배럴당 110달러대로 내려왔다. 하지만 하향 안정세를 점치는 목소리도 아직은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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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을 지나면 급감은 돌이킬 수 없다
이렇게 유가가 고공행진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미국의 주식시장 침체와 부동산 몰락으로 갈 곳을 잃은 국제 투기자본이 ‘장난을 쳐서’ 생긴 일시적 현상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한 듯하다. 그러나 이에 맞서 좀더 근본적 원인이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결과라는 분석이 전에 없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세계 석유 생산의 정점이 임박했고, 이번 사태는 이를 경고하는 마지막 신호라는 것이다.
사실 ‘석유 생산 정점’(oil peak)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된 지는 제법 됐다. 이는 미국의 지질학자인 킹 허버트가 기초를 닦은 이론으로, 석유 자원의 고갈 문제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틀로 점차 각광을 받아왔다. 정점 이론은 요컨대 석유 ‘고갈’의 문제가 석유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죄다 뽑아썼을 때(말 그대로 ‘고갈’된 시점)가 아니라 석유를 절반 정도 써버렸을 때(석유 생산 ‘정점’) 나타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왜 그럴까? 이 점을 이해하려면 어떤 유정(油井)에서 석유를 채굴하는 과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유정에서 석유를 뽑아내 쓰는 것은 가령 자동차 연료탱크에 든 휘발유를 소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연료탱크에 든 휘발유는 자동차가 달릴 때 균일하게 공급되며 거의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도 이런 추세가 유지된다. 반면 유정에서는 처음 시추를 시작할 때는 유정 내부의 압력이 높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석유가 ‘뿜어져’나오지만, 석유를 뽑아내면서 내부 압력이 낮아지면 물이나 이산화탄소를 주입해 석유를 ‘쥐어짜내야’ 한다.
이 때문에 특정 유정에서 산출되는 석유의 양은 일반적으로 종(鐘) 모양 곡선을 그린다. 시추 초기에는 산출량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다가 점차 속도가 둔화되기 시작해 일정 시점(정확히 석유의 절반을 퍼올렸을 때)이 되면 정점에 도달하고, 이후 산출량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유정이 일단 정점을 지나고 나면 산출량 감소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산출량을 증가 추세로 되돌릴 수 없을뿐더러, 뽑아올리는 석유의 채굴 비용 역시 상승하게 되며 석유의 점성이 높아 질도 떨어진다.
셸 석유회사의 연구소에서 일하던 허버트는 개별 유정 채굴에 적용되는 이러한 원리가 특정 지역의 석유 산출량에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1956년 그는 미국 본토에 있는 48개 주를 대상으로 유정이 새로 발견되는 속도와 석유를 뽑아올리는 속도, 그리고 예상 매장량을 면밀히 검토해 미국의 석유 산출량이 1970년을 전후해 정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허버트의 예측은 놀랍게도 거의 들어맞았고, 우리가 알다시피 1970년대 이후 미국은 석유 순수입국으로 돌아섰다.
오늘날 허버트의 이론을 따르는 석유 정점 이론가들은 이러한 틀을 전세계 석유 산출량에 대해서도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들은 현재 알려진 자료를 토대로 전세계 석유 매장량을 도합 2조 배럴 정도로 추산하는데, 지금까지 뽑아내 사용한 석유의 총량이 대략 1조 배럴에 이르기 때문에 전세계 석유 생산 정점이 조만간 닥칠 것으로 보고 있다.
2010~2015년이냐, 2030년이냐
현재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속한 산유국들이 자국의 정확한 석유 매장량을 숨기고 있어 정점의 도래 시점에 대해서는 이론가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2010~2015년에 정점이 도래할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2005년에 이미 정점을 지났다고 생각하는 이론가들도 있다).
1980년대 이후 전세계 석유 소비량이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음을 감안하면, 정점의 도래는 유가 급등과 정치·경제적 불안정, 더 나아가 전쟁과 같은 파국적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정점 이론가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이론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땅속에 매장된 석유의 총량이 어떤 정해진 값이라는 정점 이론의 전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석유의 매장량은 어떤 시점의 석유 가격과 채굴 기술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가령 석유 가격이 오르면 과거 높은 비용 때문에 채산성이 없어졌던 유정의 채굴이 재개될 수도 있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예전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곳(예컨대 깊은 바다)에 묻힌 석유의 채굴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점 반대론자들은 이런 주장에 입각해 전세계 석유 매장량을 1조 배럴 정도 더 높게 추정하고 있고, 석유 생산 정점은 적어도 2030년 이전에는 도래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점 이론가들의 재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석유가 묻혀 있을 만한 지역에 대한 정밀 탐사가 대부분 끝났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추가로 매장돼 있다는 1조 배럴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냐고 반문한다(이런 힐난 속에는 정점 이론가들이 대부분 석유 회사에서 현장 경험을 쌓은 지질학자들인 반면, 반대쪽 이론가들은 대부분 경제학자들이라는 묘한 대립 구도도 작용하고 있다). 또한 설사 이처럼 ‘근거 없는’ 낙관적 태도를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유가 상승 등으로 인해 과거 경제성이 없었던 유전의 채굴이 이뤄지더라도, 이런 곳에서 석유를 퍼올리려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결국 퍼올리는 순에너지의 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가 급등이라는 ‘마지막 경고’
단일 유정의 산출량과는 달리, 전세계 석유 산출량은 전쟁 등 정치·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산출량 곡선은 깔끔한 종 모양이 아니라 다소 우툴두툴한 모양을 그리게 되고, 따라서 언제 정확히 정점을 지나는지 말하기는 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리고 석유 생산에서 정점이 도래했는지 여부는 오직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에(1970년 미국의 석유 생산 정점 역시 당시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사후에 산출량 자료를 종합해 결론이 내려졌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 알게 되려면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봐야 할 것이다. 아마 그때쯤 되면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유가 상승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답’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에겐 몇 년 기다려보고 그때 가서 답을 알아보자는 식의 사치를 누릴 겨를이 없다. 파국적인 결말을 피하려면 지금 당장 대체에너지, 그중에서도 특히 자동차나 항공기에 필요한 수송연료 대체품의 개발에 나서야 할 터인데, 유가 급등이라는 ‘마지막 경고’를 맞이하는 현재 우리의 대응은 너무나 미온적이다. 과연 우리는 ‘값싼 석유의 종말’이 찾아온 이후의 시대를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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