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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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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과학은 ‘남성과학’

등록 2007-04-20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 6년간 보건복지부 연구 중 ‘성인지적 관점’ 고려한 과제 6.1%…성별 구분해야 한다는 기본 의식 세워야 </font>

▣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수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성인지 또는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관점을 공공정책에 도입시키려는 움직임이 여성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이뤄져왔다. 양성평등이나 성차별 배제 대신 성주류화라는 조금 생소한 개념을 사용하는 까닭은 단순한 양적 평등이 아니라 공공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사회문화적 성에 대한 인식이 개입돼야 하고, 제도적으로도 성평등과 성적 특이성에 대한 의식적 배려가 정책 수립과 집행 과정에 부단히 입력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만 반쪽짜리 평등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적 평등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민노당과 박진희 교수의 연구 결과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정책 연구와 수립 과정에서 성인지적 관점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가 동국대 교양교육원 박진희 교수에게 의뢰해서 진행한 ‘국가 연구개발 사업에서의 여성 수요 반영 현황과 개선방안’이 그것이다. 이 연구는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성평등이라는 문제의식의 사각지대에 해당됐던 과학기술 분야도 이제 성주류화라는 인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사뭇 의의가 크다.

흔히 사람들은 과학기술만큼은 성이나 계급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서 비켜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런 생각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기 힘든 신화에 불과하다. ‘과학기술과 성’이라는 주제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기술사회학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과학 연구도 천문학적 연구비가 투여되고 많은 수의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활동이기 때문에, 그 연구 주제나 방향에 따라 혜택을 입는 사회 집단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가장 쉽게 예를 들 수 있는 분야가 의료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보건 관련 연구와 신약 개발 등은 남성들을 대상으로 이뤄져왔고, 임상실험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여성들은 남성들을 척도로 개발된 약을 먹고 남성들을 잣대로 삼아 마련된 처치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남성을 기준으로 삼은 그동안의 관행은 가히 ‘의료 남성주의’라 부를 만한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미 1980년대 말부터 다양한 움직임을 보였다. 미국의 경우 1989년에 국립보건원(NIH)이 임상연구에서 여성과 소수민족들을 연구주제와 피실험자로 포함시키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했고, 이듬해에는 산하에 ‘여성건강연구국’을 설치했다. 이 기관의 설립 목적은 여성들의 건강과 연관된 지식이 남성들에 비해 거의 축적되지 않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성건강연구국이 제기한 원칙은 첫째 기초 연구에서 임상실험 및 적용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성 차이가 다뤄져야 하고, 둘째 효능실험이나 안전실험에 임산부, 소수민족 여성, 그리고 노년층 여성 등을 포함해서 연구의 다양성을 높이는 것이다.

2004년 임상연구에서 57건 중 1건

유럽연합도 그동안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덜 대표되면서 받는 불이익을 해소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지난 1999년에는 ‘여성과 과학 프로그램’을 채택해서 과학기술 연구정책에 성주류화의 관점이 얼마나 반영됐는지 감시하는 ‘젠더 감시체제’를 발족하기까지 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과학기술 연구에 대해 폭넓은 성별 영향평가를 수행해서 많은 사회적 비용이 투여되는 연구사업의 혜택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서 궁극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다.

복지 선진국들이 과학기술 연구에서 그동안 소외됐던 성 영향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 우리의 과학기술에는 아직까지 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미흡하다. 민주노동당 한재각 정책위원은 박진희 교수의 연구보고서를 토대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6년 동안 보건복지부에서 수행한 연구과제 5557건, 연구비 총 7522억원 중에서 성 특이성(gender specific)이나 성별 구분이 가능한 연구는 341개, 269억4천만원으로 전체 과제의 6.1%, 연구비 총액의 3.6%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반면 유럽연합은 2002년에서 2006년까지 진행한 연구개발 사업 중에서 성별 영향평가 대상이 된 303개 과제 중에서 27.4%인 83개 과제가 성인지적 관점에서 연구됐다.

박 교수는 특히 신약 개발의 경우 우리나라의 성 특이성 연구 비율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성차가 중요한 임상연구의 경우에는 2002년 국립병원 임상연구에서 38%에 도달했지만, 보건의료기술이나 신약 개발에서는 1999년 이래 5% 아래를 맴돌고 있으며, 2004년에는 전체 과제 57건 중 단 한 건으로 1.8%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단지 건수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연구에서 성별을 구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박 교수는 “미국의 경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에서 예외 없이 성별·인종별 데이터를 분류해서 수집하는 반면, 우리의 경우에는 임상실험에서 성별 데이터가 거의 축적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가령 노인질환에 대한 연구에서도 ‘고령화에 따른 시각기능 장애’와 같은 주제에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아예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양적인 성장주의라는 유일 가치를 추구해왔고, 이처럼 독점된 가치는 사회 구성원들의 뇌세포에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오로지 성장동력으로만 간주돼온 과학기술은 이러한 현상이 가장 심화된 영역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지금 한가하게 무슨 성주류화냐”라고 개탄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성장은 그동안 제대로 대표되지 못했던 소외된 영역들을 들춰서 우리 사회의 공적 비용으로 이뤄지는 공공연구의 혜택을 골고루 받게 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성주류화 담론이 주요한 까닭은 이러한 양적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제 계량적 지표만으로는 지배집단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성장이나 경쟁력 강화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성주류화 담론은 남성들을 척도로 삼는 양성평등이 가지는 한계를 제기하면서, 의료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주요한 과학기술 개발이 그 대상과 기준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 인종, 노령층, 소수민족, 사회적 약자 등을 ‘존중’하고 고려하는 연구 다양성의 중요한 한 축으로서 그동안 남성, 백인, 화이트칼라, 젊은이, 중산층 등을 기준으로 삼은 연구의 편향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시급한 까닭은 임상연구를 비롯한 기초 데이터의 축적에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성적 편향 바로잡는 대안은

박 교수는 성적 편향을 바로잡기 위한 대안으로 국가 연구개발 사업에 성별 통계 포함을 의무화하고, 연구 지원 심사와 사후 평가에 성별 영향평가를 도입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또한 심사위원과 국가 연구개발 사업 기획 등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여성 참여의 비율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성주류화의 관점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적 평등, 즉 수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양성은 우리 시대의 의제가 됐다. 생물학적 다양성이나 종 다양성이 우리가 후속 세대와 생태계를 위해 지켜내야 할 중요한 자산이라면, 과학기술의 연구 다양성은 우리 삶의 질과 평등한 과학을 위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얻어내야 하는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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