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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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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기계적인 처리

등록 2005-04-14 00:00 수정 2020-05-03 04:24

안락사 논란을 통해 본 우리 사회 죽음의 의미…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인식을 버려야

▣ 김동광/ 고려대 강사·과학사회학

전세계적으로 안락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미국의 테리 시아보가 지난 3월30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1990년에 심장발작을 일으켜서 뇌손상을 입은 뒤, 시아보는 15년 동안이나 식물인간 상태를 유지했다. 그동안 남편인 마이클 시아보는 아내가 생전에 인공적인 방법으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영양분을 공급하는 급식관 제거를 여러 차례 법원에 요청했고, 실제로 두 차례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급식관이 제거됐다가 다시 삽입되기도 했다. 지난 3월18일에 세 번째로 급식관이 제거됐고, 13일 만에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했다.

우리 사회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

안락사(安樂死)를 뜻하는 ‘euthanasia’의 희랍어 어원이 ‘쉬운 죽음’(easy death)인 까닭에 일부 학자들은 안락사라는 말보다는 안이사(安易死)가 적절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번 시아보의 경우를 보더라도 결국 급식관을 제거해서 굶어죽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결코 즐거운(樂) 죽음은 아니었던 셈이다. 안락사는 당사자의 의사(意思)를 기준으로 크게 자발적인 것과 비자발적인 것으로 나뉘며, 시행자의 관점에서 다시 적극적인 안락사와 소극적인 안락사로 구분된다. 적극적인 안락사는 의사나 간호사가 의도적으로 환자에게 치사 약품을 주입하는 것이며, 소극적인 안락사는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유지시키는 장치를 타인이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적극적인 안락사는 불법이며 살인으로 규정된다. 얼마 전에 미국의 한 의사가 자신의 소신으로 적극적 안락사를 시행했다는 이유로 처벌된 사례도 있었다. 이번에 남편과 친부모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진 구체적인 지점은 과연 당사자가 안락사를 자발적으로 원했는지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었고, 윤리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과연 자발적·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할 것인지 여부였다.

여기에서 자발적·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할 것인지 여부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을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왜 안락사 문제가 이따금 불거져나오고, 정치가·윤리학자·종교인 등이 한바탕 논쟁을 벌이고 입법을 위한 움직임이 고개를 들다가 다시 사그라지는 현상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지, 다시 말해 그 밑에 깔려 있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항공기 추락과 같은 대량사망이나 사건사고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죽음이란 개인의 문제라는 생각이 통용되기 때문이다. 출생이나 성장, 교육 등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인 반면, 나이를 먹고 병들어 죽는 또 다른 과정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다.

최근 노령화 사회에 대한 담론이 증가하면서 노인층과 노화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높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노화의 자연스러운 연장에 해당하는 죽음은 여전히 개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치부되고 있다. 정책이나 법률의 유무를 사회적 관심사의 투영이라고 볼 때, 출생이나 교육에 대해서는 숱한 정책이 뒤따르고, 심지어는 결혼에 대해서까지 간통죄와 같은 규정을 두지만, 죽음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말해 죽음에 관한 한 사회는 손을 놓고 있고, 사람들은 결국 혼자 죽음과 맞닥뜨려야 한다.

더욱 근본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삶과 대척적인 관계로 인식한다. 따라서 죽음의 문제는 가능한 한 회피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사람들은 부고를 접하면 의례적으로 병원의 영안실을 찾고 한시바삐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장례식장에서 형식적인 인사가 오고 간 뒤, 사람들은 불행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은 데 안도하면서 다시 죽음을 까맣게 잊는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영어에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는 ‘mortal’은 죽을 운명을 타고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비정상적이고 일탈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과거에 죽음은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친밀한 무엇으로 간주됐다. 동네 어귀에는 으레 장의사가 있었고, 장례는 당연히 집에서 치렀고, 시신은 고인이 생활하던 터전인 안방의 윗목에 모셨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운명을 앞두면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 가까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싶어했다. 병원이든 길이든 밖에서 숨을 거두는 것은 객사로 치부됐다.

그러나 언젠부턴가 병원의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시됐고, 자택에서 운명해도 병원의 영안실로 옮기는 현상이 벌어졌고, 이제는 시신을 집으로 들이지 않는 관례가 굳어졌다. 병원에서도 영안실은 가급적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진 곳으로 격리된다.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시신은 영안실의 차가운 냉동고에 격리되고 사람들은 고인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쿠블러 로스는 이러한 현대 산업사회의 기계적이고 비인도적인 죽음 처리방식이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해서 유교 전통의 동아시아 국가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우리 사회는 죽음을 존중하기보다는 처리해야 할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안락사가 논의되는 지점

사망학으로 유명한 대만의 푸웨이쉰(傅偉勳)은 인간이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고 죽음은 마지막 성장이라고 말했지만, 실상 우리에게 죽음은 느닷없이 그리고 너무도 당황스럽게 다가온다. 아무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을 떠올리거나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죽음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푸웨이쉰 교수도 임파선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죽음, 마지막 성장>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안락사를 둘러싼 윤리적 논쟁이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하고 대부분 한바탕의 소란으로 끝나고 마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가 죽음을 다루는 기본적 방식이 ‘죽음의 기계적 처리’에 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락사 논쟁 역시 죽음 처리방식을 둘러싼 또 다른 논란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안락사뿐 아니라 뇌사 등 죽음을 둘러싼 윤리적 논의들이 대부분 현대 산업사회의 메커니즘에서 마지막 종말처리를 담당하는 경향이 있다. 푸웨이쉰은 삶의 품위뿐 아니라 ‘죽음의 품위’와 ‘죽음의 존엄’이 중요하며 적극적으로 추구돼야 한다고 말했지만, 우리의 윤리 논의는 지극히 소극적이고 수세적이다. 안락사 논의는 우리 사회에서 윤리의 지위와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자살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 최근 한 여배우의 자살 사건 이후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자살이 급증해 급기야는 보도 통제까지 해야 하는 심각한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살은 종교를 비롯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오로지 죄악시될 뿐이다. 그 밖에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관심이나 배려도 주어지지 않는다. 자살이 미화되는 맥락은 자살이 죄악시되는 것과 동일하다. 또한 자살에 관한 한 사회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음을 철저히 개인의 문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은 우리 사회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서 빚어지는 딜레마의 전형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우리 사회는 삶의 문제에 전념하기에도 여유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곧 삶과 생명을 다루는 방식이기도 하다. 죽음이 낯설고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미 온전한 삶이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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