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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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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망태들 때문에 억울해요”

등록 2004-08-20 00:00 수정 2020-05-03 04:23

사회적 해악이라 구박받는 알코올의 변명… 적당히 마시면 뇌 기능 좋아지고 관상동맥 질환 감소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금주를 생활화하는 사람에게 나(알코올)를 권하는 이유는 가지각색이겠지요. 심지어 공부하기 전에 술을 마셔야 학습효과가 높다며 술잔을 흔들어대기도 하더군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지만 이유인즉슨 이렇습니다. 나를 지나치게 섭취하면 두뇌세포가 파괴되는 건 아시겠죠. 그런데 알코올은 가장 약하고 느린 두뇌세포를 파괴한다네요. 술을 일정하게 마시면 두뇌세포 가운데 약한 부분의 멍청한 세포를 제거해 두뇌가 전체적으로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이죠. 마치 맹수의 습격을 받는 들소 무리에서 후미의 느린 게 희생당하면 전체적인 이동속도가 빨라지는 것처럼 된다는 겁니다. 만일 나를 수시로 찾으며 찌들어 사는 사람의 항변을 수험생이 귀담아 들었다면 시험장 대신 치료센터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심장마비나 뇌졸중 막는 데 도움

내가 술의 주성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인간들이 술을 마신 이래로 나는 끊임없이 시달려왔어요. 그런데도 나의 유해성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종지부를 찍을 기미를 보이지 않아요. 인체에 악영향을 끼치고 사회적 낭비라며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지요. 그것만이 아니죠. 음주운전이나 알코올 중독 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며 나를 구박하는 것도 오래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니코틴에 버금가는 유해물질이라 여기는 것도 때론 수긍합니다. 더구나 50대 중반은 가벼운 음주조차도 나로 인해 뇌세포가 죽어 뇌 중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학계의 발표를 접하고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지요.

그렇다고 인간들의 무차별적인 공세에 내가 주눅들어 있을 수만은 없지요. 내가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발표도 수두룩하니까요. 간단히 말하면 인간들이 적당한(각 술의 제 잔으로 하루에 두잔가량) 음주를 즐기면 혈관이 막혀서 발생하는 심장마비나 허혈성 뇌졸중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나를 멀리하는 사람들을 현혹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로움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만일 내가 관상동맥 질환을 앓는 사람에게 맥주나 포도주 등에 접근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특히 40살 이상의 남성이나 50살 이상의 여성은 나를 적당히 즐기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아, 여성은 나와 유방암의 연관성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요.

일단 술을 마실 때 내가 인체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아시나요. 그것을 알아야 적당한 음주를 즐길 수 있습니다. 내 위력은 음주량에 따라서 달라지죠. 소주를 반병가량 마시면 대뇌피질 전두엽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사고와 판단이 느슨해집니다. 여기에 한병을 더 마시면 내 활동성이 강화되면서 인체의 평형을 유지하는 소뇌에 영향을 끼쳐 몸이 비틀비틀하겠지요. 그리고 네병가량을 들이부어 내가 왕성하게 활동하면 생명의 중추 구실을 하는 뇌간이 마비되면서 호흡과 심장박동에도 심각한 위협이 나타납니다. 모든 게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죠. 인체의 오작동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나를 분해하는 효소가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기 때문이죠. 또 사람에 따라 내 영향을 받는 부위가 다르기에 취한 행동도 가지각색입니다.

대동맥이 말끔한 간경화 사망자

어떻게든 나를 ‘음해’하려는 목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겠지요. 누가 고주망태가 되도록 많이 마셔대라고 했습니까. 과다한 음주는 나를 두번, 세번 죽이는 것입니다. 나를 제대로 느끼려면 무조건 적당해야 합니다. 적당히 제어를 하면 내가 뇌에 영향을 끼치면서 인체에서 유용하게 쓰인다는 사실도 몸으로 확인할 수 있거든요. 병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내 가치를 발견한 게 100여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알코올 간경화로 사망한 사람을 부검하면서 대동맥이 말끔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노화에 접어들면 혈관 내부에 기름기가 쌓여 누렇게 변하는 죽상경화증(동맥경화)이 생기는데 나를 가까이 한 사람들의 혈관은 무척이나 깨끗했지요. 이것은 내가 동맥벽의 플라크(plaque)를 제거한다는 가설을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플라크가 생기기 전에 과다한 음주로 사망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죠.

정말로 나는 인체의 혈관을 깨끗하게 하는 것일까요. 내 자랑 같아서 스스로 말하기엔 부끄럽더군요. 그래서 나는 1970년대부터 미국 카이너 퍼머넌트 의료센터 아서 클래츠키 박사팀에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흡연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나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적당한 음주가 심장마비 위험을 줄인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규명했습니다. 또 음주와 관상동맥 질환에 관련된 각국의 논문 수십편을 분석한 결과, 하루에 나를 섭취하는 분량이 0g에서 25g으로 높아지는 데 따라 관상동맥 질환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지요. 맥주 한캔(355ml)에는 내가 18g가량 있답니다. 이것은 포도주(140cc)나 소주(45cc) 한잔에 들어 있는 것과 비슷한 분량이죠. 소주 두잔을 꽉 채워도 적당한 게 아닙니다.

내가 심혈 관계에 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은 콜레스테롤 수치나 혈전 등에 따른 것이라 하더군요. 적당히 음주를 즐기는 사람들의 혈액에는 심장을 보호하는 고밀도지단백질(HDL) 콜레스테롤 수치가 10~20%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HDL 콜레스테롤이 나쁜 콜레스테롤인 저밀도지단백질(LDL)을 간으로 보내 재순환 혹은 배출되도록 하지요. 이에 따라 혈관에 축적되는 콜레스테롤량이 줄어들어 죽상경화증에 관련된 플라크 형성이 더디게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혈액 응고에 관련된 복잡한 생화학적 연쇄반응을 교란시키기도 합니다. 내가 인체를 누비며 혈액의 부적절한 응고에서 비롯되는 심장 발작을 미리 막아낸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연구자가 나오지 않아 아쉽습니다.

요즘 나는 살맛이 납니다. 이달 초 영국의 과학자들이 최근호에 나를 적당히 섭취하는 사람들이 금주자들보다 인지능력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실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지난 11년 동안 남녀 6천여명을 추적해 일주일에 나를 1g에서 80g까지 섭취한 사람들이 단기 기억력이나 언어구사, 논리전개, 어휘능력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밝혀냈지요. 술을 적당히 마시면 뇌 동맥이 폐쇄될 가능성이 줄어들고 뇌의 혈류량이 증가해 인지능력이 개선되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네요.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게 있더군요. 남자는 최대 240g까지, 여자는 160g까지만 인지능력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남녀가 과도하게 음주를 했을 때, 여자가 남자보다 일찍 인지능력이 떨어질 수 있는 셈이죠.

‘프렌치 패러독스’를 아십니까

혹시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를 기억하나요. 프랑스인의 흡연율이나 비만율, 고혈압 유병률 등이 다른 나라와 차이가 없는데도 심장병에 의한 사망률이 두세배 이상 낮은 걸 두고 하는 말이지요. 이는 적포도주를 습관적으로 마시는 데서 비롯됐다고 추측됩니다. 사실 소주나 맥주, 포도주 등 내가 들어 있는 대부분의 술을 적당히 마시면 관상동맥 질환의 위험이 줄어듭니다. 그런데 특별히 포도주에서의 내가 다른 술에서보다 효능을 발휘한다고 평가받지요. 이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대개 건강한 식습관(과일·채소·생선·올리브유 등 다량 섭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포도주에 다른 이로운 성분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몸에 좋다는 포도주만 해도 적당량을 초과하면 간경화, 췌장염, 퇴행성 신경장애 등을 일으키고 사고나 살인, 자살에 이른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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