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주도 ‘전력정책 합의회의’ 개최의 의미… 공신력있는 시민참여모형으로 사회공론화 이룬다
▣ 김동광/ 과학저술가 · 고려대 강사
최근 과학기술의 시민참여를 위한 중요한 시도가 진행 중이다. 지난 6월4일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합의회의’가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주최로 시작됐다. 지난해 우리 사회는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을 벌였지만,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면서도 깊은 갈등과 불신만 낳은 채 실질적인 성과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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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를 표방하면서도 전력정책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채 일방적으로 핵폐기물 처리장을 지정하고 강행하는 무리수를 둔 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즉, 장기적인 에너지원으로 원자력을 계속 사용할지에 대해 먼저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핵폐기물 처리장을 둘러싼 갈등은 해결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열리는 합의회의는 늦은 감이 있지만 그동안 제대로 거치지 않았던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 과정을 복구하는 의미를 갖는 셈이다.
유전자 · 생명복제 이어 세 번째 전국규모
합의회의는 덴마크에서 1980년대 후반에 처음 시행된 이후 많은 나라에서 실시되었다. 한마디로 합의회의는 과학을 주제로 한 시민 법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과학과 관련된 의사 결정은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활발해진 환경운동을 필두로 과학기술이라는 주제에도 일반 시민들의 견해가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에게만 맡기기에는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규정력이 너무 강해졌고, 양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복잡해진 사정을 반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지난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유전자 조작 식품과 생명복제를 주제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주최로 합의회의가 열렸다. 그 뒤 서울대학교에서 2003년 10월에 ‘s-카드’라는 전자학생증 발급 문제를 놓고 소규모 학내 합의회의를 열기도 했지만, 전국적인 수준의 합의회의로는 이번이 세 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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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 사회는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를 둘러싸고 극한적인 갈등과 대립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안면도, 굴업도 등에서 보여주었던 일방적인 지정과 밀어붙이기라는 구태의연한 대응으로 일관했고,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겪어보지 못한 시민사회는 합의를 도출하기는커녕 특정 지역에 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할 것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의 틀에 갇혀 숙의(熟議)의 여지를 얻지 못했다. 따라서 이번 합의회의는 핵폐기물 처리장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를 결정하기 앞서 우리 전력정책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고 그 속에서 원자력 발전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의 근본적인 논의를 공론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사회적 관심이 높은 주제를 다루는 탓인지 이번 전력정책 합의회의에는 모두 176명이나 되는 신청자들이 몰렸고, 조정위원회가 그 중에서 18명의 남녀 패널을 선발했다. 과거 두 차례의 합의회의 신청률이 3 대 1 정도였던 데 비해 이번 합의회의에서 경쟁률이 10 대 1로 늘어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우리 시민들의 태도가 더욱 적극적이 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합의회의는 대개 공고를 통해 자발적인 신청자들 중에서 연령, 성(性), 지역, 직업 등을 고려해서 최대한 보통 시민을 대표할 수 있는 15~20명의 시민 패널을 선발한다. 합의회의가 의회와 같은 국가기관에 의해 치러지는 나라에서는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다양한 계층과 지역의 지원자들을 모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세 차례의 합의회의가 모두 민간단체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홍보에 상당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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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회의가 지금까지 개발된 과학기술 시민참여의 가장 공신력 있는 모형으로 정착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상당한 대표성을 획득한 시민 패널들에게 해당 주제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보와 진지한 숙의가 가능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의회의는 사회적 숙의 과정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 패널은 선발된 뒤 두 차례 이상의 예비 모임을 통해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이때 이해를 돕기 위해 초빙되는 전문가들은 한쪽 입장에 치우치지 않도록 찬반 동수로 같은 시간 동안 시민 패널들에게 견해를 피력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시민 패널들은 전문가 패널들에게 할 주요 질문을 뽑는다.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는 것이다. 전문가 패널은 본회의에서 시민 패널이 한 물음에 답변하고, 이 과정에서 시민 패널과 전문가 패널이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 중 하나가 시민 패널 중에서 처음에 품었던 견해가 바뀌는 이른바 ‘선호(選好)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토론과 숙의를 통해 견해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합의가 가능할 수 있는 기반이다. 이번에 시민 패널로 참가한 한 가정주부는 지난 7월24일에 열린 예비회의에서 “의견이 다른 사람과 집단들이 함께 논의하는 과정이 합리적인 대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패널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따라서 합의회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민 패널들이 외부로부터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은 정보와 전문가 견해를 제공받아 자신들의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판단을 내리는 일련의 과정이 보장돼야 한다. 이번 합의회의의 경우, 과거와 달리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포함하기 때문에 행사 진행 담당자들은 혹시라도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시민 패널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렇다면 합의회의가 실제 정책 수립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의회나 정부에서 직접 합의회의를 마련하는 유럽에서는 합의회의 결과가 정책 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외국은 의회 · 정부 주도로 정책 직접 반영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민간단체들이 주도하는 경우 직접적인 효과를 내지는 못한다. 물론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유전자 조작 식품 관련 합의회의 뒤, 우리나라에서도 유전자 조작 식품 여부를 표기하는 표시제가 원칙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생명복제 합의회의 뒤에는 배아복제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활성화되면서 지난해 말 생명윤리기본법이 제정됐다.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합의회의를 통해 시민 패널들이 의제를 설정하고 토론을 벌이는 과정에서 해당 주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효과가 크다는 점이다. 전문가가 아닌 시민 패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일반 시민들에게 훨씬 다가가기 쉽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참여하는 과학자들도 자신의 연구 분야가 내포하는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이번에 실시되는 전력정책 합의회의도 시민 패널의 결정이 어떻게 내려지는지보다 공론화와 사회적 학습이라는 측면에서 이후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는 데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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