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마법의 돌’이 일상을 바꾼다

등록 2004-05-21 00:00 수정 2020-05-03 04:23

사물의 정보를 알려주며 조작을 가능케 하는 RFID… 상품 유통부터 일상생활까지 영향 확대



사물의 정보를 깨알만한 실리콘 안에 담은 RFID. 유통은 물론 일상생활에 혁명을 몰고 올 전망이다. 정보인권 침해의 가능성은 없는가.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고속도로에서 제한속도를 넘나들며 속도감에 빠졌던 자동차도 요금소에서는 어김없이 꼬리를 내려야 한다. 요금소에서 통행증을 내고 거스름돈을 주고받으려면 먼 거리에서 속도를 줄여 교통체증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머지않아 요금소 주변의 지체 행렬이 사라질 전망이다. 무선통신 벤처기업 (주)크레디패스에서 개발한 전자요금징수시스템(ETCS)은 ‘무선주파수인식칩’(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을 이용해 요금소에서 15m 떨어진 차량이 시속 165km로 달려도 통행료를 자동으로 처리한다. 요금소에 있는 RFID 판독기가 차량에 있는 칩의 정보를 감지하고, 요금은 운전자의 계좌에서 자동으로 인출하는 식이다. 이 시스템은 기존의 인식거리가 1, 2m에 지나지 않는 ‘하이패스’를 대신해 국내외에 설치될 전망이다.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의 네트워크

이처럼 다양한 공간에서 모든 사물을 자동화하는 데 RFID가 필수적으로 쓰인다. 이미 RFID는 통행요금 창구와 각종 보안 시스템 그리고 공장이나 상점이 재고를 파악하는 데 널리 쓰이고 있다. RFID 태그와 판독기가 사람을 대신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물건에 소형 칩을 넣어 무선으로 연결하는 것도 가능하다. 수십억개의 무생물을 웹에 연결한다면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사물을 조작하게 된다. 쌀알 크기보다 작은 실리콘으로 만든 RFID 태그에는 신원, 가격, 요리법, 의료기록 등의 정보가 들어간다. 태그에 담긴 정보는 판독기로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침실이나 욕실·계단·가전제품 등에 부착한 판독기로 옷이나 음식 포장지 등에 붙어 있는 태그의 데이터를 파악하는 것이다.

RFID 칩은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더욱 작아지고 있다. 일본 히타치사는 내부 안테나를 사용하는 극소형의 RFID 태그 ‘뮤(μ)칩’을 개발했다. 이 칩은 가로·세로 0.4mm 넓이에 두께는 0.03mm로 128비트(bit)에 이르는 고유의 ‘뮤 ID’ 데이터에 은행 수표나 선물 증서 등의 기밀 사항을 내장한다. 보통 지폐에도 RFID 태그가 부착되면 위·변조를 원천적으로 막고 검은돈의 흐름을 차단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극소형 RFID는 브리티시 에어웨이 같은 항공사의 비행기 수화물표에도 사용될 예정이다. 만일 RFID 태그를 붙여놓은 수화물을 분실하더라도 어디에서든 주인에 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해 빠르게 되찾도록 할 것이다. 그동안 바코드를 사용하던 제약업체도 RFID를 도입할 예정이다. RFID 태그를 의약품 포장에 부착하면 기업들은 약품 생산에서 처분까지 유통 경로를 손쉽게 추적하고 가짜 약품 유통을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RFID 기술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얼마나 바꿀 것인가. 그동안 정보기술은 전산화에서 정보화로 이동했다. 각종 업무에 컴퓨터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정보를 축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수많은 사회 현상을 곧바로 포착해 대응하기가 어렵다.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블루투스(Bluetooth) 근거리 무선망과 스마트 물질, 무선인식 기술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 RFID 기술이 유비쿼터스 환경의 핵심 기술인 셈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하원규 IT정보센터장은 “RFID 기술은 사물들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칩을 라벨처럼 부착하는 것이다. 바코드와 달리 환경이 바뀌더라도 정보를 능동적으로 처리한다. RFID 기술은 고도의 유비쿼터스 환경으로 나아가는 유용한 통로이다”고 말한다.

모든 소매 상점에 RFID 판독기가 설치되면

1970년대 탄도미사일 추적을 위해 개발된 기술로 매우 간단한 원리로 작동한다. ‘파워’가 필요치 않은 태그 안에 전자회로를 심어 멀리 떨어져 있는 판독기에서 에너지를 받아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태그는 실리콘 칩에 단순한 안테나 하나를 붙여 유리나 플라스틱 모듈에 넣은 것으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RFID의 핵심 기능을 맡는다. 초창기에 쓰인 RFID 태그는 13.56MHz 아래의 주파수 영역에서 작동했다. 이들은 인식거리가 1m 이내로 짧아 출입통제나 재고관리에 쓰이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텔레비전의 UHF 대역 주파수(850~950MHz)로 늘어나 인식거리가 길어지면서 물류·유통의 총아로 떠올랐다. 심지어 주파수 대역이 2.4~5GHz로 확장되면서 인식거리가 27m까지 길어지기도 했다.

최근 RFID 기술은 급속히 바코드를 대체할 태세다. 기껏해야 가격정보나 표시하는 바코드와 달리 RFID 태그는 복제가 불가능하고 재활용하거나 다양한 정보를 넣어 암호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고차 구매 과정에서 자동자 생산 공장, 팔린 날짜, 정비나 사고 일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RFID 태그를 넣은 상품들은 진열대에서 빛을 발한다. 매장에서 선반에 있는 RFID 상품은 판매 여부가 수시로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팔린 자리에 곧바로 상품을 채워놓을 수 있다. RFID 태그 정보가 실시간으로 컴퓨터로 전송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직까지 RFID 태그 가격이 바코드보다 훨씬 고가여서 일반 상점에 RFID를 이용한 재고조사 시스템을 구비하기는 힘들다. 대형 할인매장에서 ‘쇼핑카트’가 계산대를 그대로 빠져나오면서 순식간에 정산이 되려면 적잖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

앞으로 5년여 뒤에는 모든 소매 상점에 RFID 판독기가 설치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판독기가 상점의 재고율을 감지해 물류센터에 주문하는 것까지 자동으로 이뤄진다. RFID는 상점의 상품이 움직이는 것까지 감지해 따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설치하지 않아도 절도를 막을 수 있다. 상점의 재고 관리나 자동 계좌 인출 등은 RFID 기술의 초보적인 단계일 뿐이다. 별도의 솔루션 없이도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이 RFID 판독기를 통해 순식간에 이뤄진다. 데이터 마이닝은 데이터들간의 상호관계를 분석해 수요를 창출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소비자의 구매 패턴을 분석해 특정 상품이 어떤 계절에 많이 팔리며 다른 상품을 구매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일본 서점들은 고객이 실제로 책을 구입하기 이전에 선반에서 책을 꺼내보는 빈도와 시간을 추적하는 데 RFID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RFID 기술의 대중화가 요원한 것은 아니다. 라면 봉투에 라면 값에 버금가는 RFID 태그를 붙일 수는 없어도 수만원대의 물건이라면 RFID 태그를 의무적으로 부착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RFID 태그는 자동차 타이어 업계에서 수출의 필수사항으로 떠올랐다. 외국 자동차 업체들은 타이어 리콜을 할 때 제품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타이어 고무에 손가락 크기의 RFID 태그를 부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프랑스 미셰린사는 타이어 RFID 시제품을 출시해 내년부터 RFID 내장형 타이어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에 따라 국내의 현대오토넷과 금호, 한국타이어 등도 연간 15억개씩 생산되는 타이어의 생산과 유통 단계를 낱개 단위로 추적할 수 있는 RFID 태그를 장착하려고 한다. 2년 전 타이어 생산라인에 고주파 RFID 장치를 설치한 한국타이어는 미셰린과 기술제휴를 꾀하고 있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핵심적 역할

일종의 컴퓨터 구실을 하는 RFID 태그가 곳곳에 깔리더라도 능동적 컴퓨팅이 이뤄지지 않으면 효용성은 떨어진다. 사물에 고정된 장치들이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예상해 처리해야만 사람은 다른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마련이다. 이를 위해선 RFID 네트워크가 업무와 일상에 거미줄처럼 깔려 있어야 한다. 판독기와 태그들이 곳곳에 설치돼 있으면 능동적 컴퓨팅에 의해 입출입 현황을 살펴 실내 환경을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다. 상태 감지와 위치 추적은 기본이고 보이지 않는 컴퓨터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노무라종합연구소 동경사무소 한상훈 컨설턴트는 “온갖 사물에 센서가 부착되어 모든 제품이 네트워크로 접속되면, 현재의 시각과 청각이 미치는 범위를 비약적으로 넓히고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오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이라도 RFID 기술에 기반을 둔 자동화 서비스를 체험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 정통부 청사 1층의 유비쿼터스 드림 전시관(U-Dream관)에 가면 RFID 네트워크를 실감할 수 있다. 전자태그(RFID)를 부착한 식료품들이 가득 찬 냉장고는 신선도와 구입날짜 등을 세세히 알려준다. 태그에 더욱 많은 정보를 넣으면 육류의 경우 가축의 품종과 나이, 무게 그리고 의학적인 기록까지 포함할 수 있다. 집안의 냉장고에 있는 물품을 원격지에서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시스템이 진화되면 식료품에 들어 있는 화학·생물학적 병원균을 탐지하는 센서 태그를 냉장고에 부착할 수도 있다. 만일 개인휴대단말기(PDA)가 RFID 태그 판독기로 쓰이면 냉장고에 들어 있는 식료품을 이용한 요리법을 내려받는 등 눈에 띄지 않는 정보를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RFID 기술은 핵심적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RFID 관련 시장은 해마다 20% 이상 급성장하는 추세이다. 지난해 12억달러를 RFID 칩 시장이 2008년 무렵에는 30억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현재 이 시장은 히타치, 필립스, 인터맥, TI(Texas Instruments) 등 해외 반도체 업체들이 국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한세텔레콤, 키스콤, 크래디패스 등에서 RFID 기술을 적용하고 있지만 핵심 기술은 해외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게다가 RFID 관련 기술 표준화와 주파수 분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손발이 묶인 처지다. 중앙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권영빈 교수(컴퓨터 비전)는 “현재 해외에서 제품을 도입하고 있지만 반도체 강국으로서 충분한 기술력을 지녔다. 세계적으로 태동기에 있는 RFID 시장을 선점하려면 산업 경쟁력 차원에서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보인권 문제도 고민해야

언제 어디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능적 환경을 구축하는 데 핵심 수단으로 떠오른 RFID, 그 미래가 꿈의 시대가 될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어쩌면 눈에 보이거나 소프트웨어적으로 확인 가능한 CCTV나 이메일 감시보다 지능적인 감시망이 일상을 살피는 ‘빅 브러더’의 세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정보인권 침해 여부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RFID 태그가 일상에 파고들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서 저주파 RFID 칩 하나를 수입·부착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1500원 안팎인데 해마다 칩 가격이 크게 떨어질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일반 공산품에 RFID 태그가 부착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핵심기술을 해외에 의존하면서 정보인권마저 위협받는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마법의 돌’로 불리는 RFID 기술은 국가 경쟁력과 정보인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전자태그가 나를 노려보네”

[2011년 ‘RFID 사회’의 우울한 시나리오]
20년 전(1991년) 제록스사의 팔로알토연구소(PARC)에 근무하던 마크 와이저는 과학 종합지 에 기고한 글에서 유비쿼터스 컴퓨팅에 관한 놀라운 예측을 내놓았다. 당시만 해도 그가 예고한 “인간을 기계적인 환경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환경에 적응하는 컴퓨터는 숲 속을 걷는 것처럼 우리를 신선하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드물었다. ‘어디에나 벌어지는, 어디서나 존재하는’이란 뜻을 지닌 유비쿼터스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를 보낸 뒤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정보기술이 우리의 생활을 바꿔놓은 것은 말 그대로 ‘일상의 혁명’이었다. RFID에 의한 일상의 혁명이 우리에게 편리함만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쌀 한톨 정도 크기의 RFID 태그가 공장에서 상품까지 재고를 파악해주는 데 쓰일 때만 해도 그것이 불러올 파장을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대형 할인점에서 쇼핑 카트에 물건을 잔뜩 싣고 계산대를 빠져나온 뒤 곧바로 PDA로 결제 내역을 확인하는 편리함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마포대교가 완공을 앞두고 RFID 태그로 구조물의 안전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에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전근대적 사고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 교단에서 RFID 칩이 성서의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사탄의 징표’라고 주장했지만 신기술의 장밋빛 미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상생활에서 RFID 기술을 실감하게 된 것은 대형 할인매장에 전자태그가 도입되면서부터다. 2003년 미국의 월마트가 100대 납품업자에게 납품 상자와 운송 팔레트에 고주파 태그를 부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진열대의 재고 상황을 인력을 투입하지 않고도 손쉽게 파악하려는 것으로, 물건이 모자라는 것을 컴퓨터가 감지하면 자동으로 생산자에게 주문하는 것까지 가능했다. 기업들은 인건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영리한 진열대’를 앞다퉈 도입했다. 이로 인해 RFID 기술이 노사간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업주들이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력감축을 꾀했기에 노동자들은 차츰 일자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할인매장 관리자로 일하던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부당해고라며 법적으로 맞섰지만 법원은 신기술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일자리를 잃은 뒤 나는 ‘안티 RFID’ 활동가로 나서게 됐다. RFID 태그와 판독기가 보이지 않는 곳에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의 움직임은 촘촘한 감시망에 추적당하고 있었다. 예컨대 백화점에서 RFID 태그가 달린 옷가지를 하나 사면 색깔과 치수, 스타일, 가격 등의 정보가 카드사나 백화점의 고객 관련 데이터베이스에 고스란히 저장되는 것은 예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 최대의 생활용품 기업 질레트사가 자체적으로 RFID 태그를 부착한 면도기 수백만개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태그 상품 열풍이 몰아쳤다. 일부 기업에서는 옷가지에 달린 태그와 달리 제품 깊숙한 곳에 태그를 암암리에 부착해 소비자들의 반발을 샀다. 소비자들이 구매 뒤 포장제를 버려도 태그 정보를 판독하려 했던 것이다.
RFID 기술을 이용한 범죄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RFID 범죄는 제품을 구입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았다. 주로 명품족들이 범죄의 대상이었다. 범죄자들은 매장 밖에서 태그를 추적할 수 없다는 제조업체의 발표를 비웃기라도 하듯 특단의 기술로 판독기를 해킹해 소비자를 추적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세무 당국은 RFID 태그가 달린 고가의 제품을 구입한 고객을 추적해 세금을 추징한다는 황당한 발표도 있었다. 그제야 태그 판독기의 기록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법으로 규정했다. 그것도 있으나마나 했다. 태그에 입력하는 정보 내용을 규제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서 태그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애당초 RFID의 기술적인 문제는 상용화 초기부터 제기됐다. 태그와 판독기가 정조준돼야 판독기의 안테나 코일들이 신호를 제대로 주고받는다. 그런데 RFID 태그와 판독기 제조업체들이 표준화를 둘러싸고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에 돌입하면서 ‘영리한 계산대’는 혼란을 겪었다. 제조사들은 서로 다른 주파수에서 작동하는 태그를 내놓으며 하나의 판독기로 읽어들이기를 기대했지만 태그에서 판독기로 보내는 데이터 전송 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다양한 태그가 각 제품에 부착되고 있다. 게다가 식료품점에서 카트를 그냥 밀고 나오면 계산되지 않는 상품도 있다. 100원짜리 물건에 20~30원이나 하는 태그를 부착하는 것은 낭비가 아닌가. 앞으로 몇년은 지나야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에 RFID 태그가 부착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나를 비롯한 안티 RFID 단체 회원들은 줄기차게 기술적 결함을 지적했다. 2008년에 RFID 태그 가격이 50원 아래로 떨어져 상용화되면서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일반 소비재에 부착하는 RFID 태그의 경우 계산대를 지나면 기능이 멈추게 할 것을 요구했다. 물건이 팔리면 태그에 입력된 정보가 삭제되도록 스위치를 추가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RFID 태그 제조업체들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태그 정보를 지속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면 바코드와 다를 게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예컨대 식료품에 부착한 태그에 입력된 정보를 없애면 유통기한이 지나더라도 경고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지폐에 삽입된 태그가 기능을 못하면 폐지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컴퓨터망은 우리에게 또 다른 골칫거리를 안겨주었다. 유비쿼터스 컴퓨팅에 관련된 모든 기술에는 프라이버시 침해 같은 사회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RFID 기술의 가능성을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안티 RFID 활동가인 나로서도 지능적 컴퓨팅 환경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RFID를 통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RFID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보인권이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구체적 공포라는 것을 확인하는 나날이다. 빅 브러더가 우리를 노려보는 것을 알면서도 뾰족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안티 RFID 축제에 가는 오늘도 우리는 빅 브러더의 지시를 받는 요원을 색출하기 위해 RFID 판독기로 회원 신분을 확인해야 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