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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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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누는 섹스는 없나

등록 2002-11-08 00:00 수정 2020-05-03 04:23

로맨틱 코미디 영화 의 옥의 티를 찾는 레즈비언들의 섹시한 수다

유대인 집안의 보수적 가정에서 자라온 제시카(제니퍼 웨스트펠트)는 에서 기자로 일하는 당당한 뉴요커지만, 제 짝을 찾지 못하고 방황 중이다. 소개팅 자리에 애써 나가보지만 늘 낙담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우정 이상의 만남’이라는 제목의 구인광고를 보고 헬렌을 만나게 된다. 갤러리 부관장으로 일하며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기는 헬렌(헤더 예르겐슨)은 믹 재거, 제임스 우즈, 하비 케이틀 유의 ‘섹시어글리’한 남자들을 ‘섭렵’하다가 여자쪽으로 눈을 돌린 참이었다. 이 ‘행동파’ 여성과 ‘생각이 너무 많아 주저주저하는’ 제시카가 만나면서 이들의 삶은 예전과 차원을 달리하는 ‘새 세계’를 만난다. 재기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의 외양을 띠고 줄기차게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개봉 11월8일)는 100만달러짜리 저예산영화답게 초라하게 시작했다. 미국에서 6개 도시 32개 스크린에서 보잘것없이 개봉했으나, 3주가 지나면서 전국 319개 스크린으로 확대 개봉되는 성과를 올렸다. 2001년 로스앤젤레스(LA)필름페스티벌에서는 화제를 일으키며 관객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이성애자는 물론이고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이하 바이)이 자유자재로 등장해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유쾌한 지침을 내려주는 이 영화를 세명의 레즈비언이 보고 수다를 떨었다. 한채윤(가명·30·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부대표, 동성애 전문잡지 편집위원), 조인영(가명·31·동화작가), 이세영(가명·27·회사원)씨. 조인영씨는 레즈비언이 아닌 바이였지만, 과감한 ‘자기 고백’을 통해 얘기의 범위와 수위를 즐겁게 넓혀줬다. 세명이 내놓은 가명은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는 실명처럼 쓰일 만큼 오래된 또 하나의 이름이었다.

성적 문란 또는 혐오감의 흔적들

한채윤(이하 한)=재미있게 봤어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했는데 쉽게 풀어가서. 남자를 찾지 못해 지친 노처녀가 동성애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는 설정이 진부하지만요.

조인영(이하 조)=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인데다 바이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오해를 줄 수 있었는데, 괜찮았아요.

이세영(이하 이)=아트무비처럼 포장돼 있어서 무거운 맘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아주 재미있더라고요. 할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 스타일로 유쾌하게 풀어간 게 잘 한 것 같아요.

조=그래도 이 영화를 레즈비언 영화로 내놓는다면 항의받지 않을까요.

한=페미니즘 영화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조=레즈비언 문제를 떠나서 제시카의 경우, 처음과 달리 나중에는 섹스에 대한 죄의식이 없어지잖아요. 영화 초반에 나오는 교회 장면에서 죄의식에 대한 암시를 줬는데 그것과 대조적이죠.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보면 앞뒤가 쫙 맞아들어가는 영화예요. 버디 무디가 아니냐는 오해를 살 정도로 여성의 연대를 보여주기도 하고.

이=임신한 직장 동료인 아줌마가 제시카의 비밀을 듣고는 궁금해하고 흥분하잖아요. 남편과의 불만족을 이야기하며 자기 혼자서 한다고 말하고. 그런데 레즈비언이 섹스의 한 방편으로 활력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게 제시카의 삶 자체가 될 것 같으니까 빨리 헤어지라고 하는 대목은 충격이었어요. 하긴 내 친구도 나의 커밍아웃에 대해 그냥 받아들이는 쪽과 ‘그러면 안 돼’ 하는 쪽으로 갈라지니까. 술 먹다 보면 양쪽에서 막 싸우기도 해요. 영화 속 아줌마처럼 은근한 포비아(동성애 혐오증이나 공포감)가 더 무서운 것 같아.

한=영화 끝나기 1분 전에 제시카가 옛 남자친구에게 ‘내가 좀더 게이적이지 못해 헤어졌어’라고 말하는 대목은 영화 전체,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치 동성애자는 성욕이 넘치는 사람인데, 난 섹스를 밝히지 않는 사람이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요. 이 장면 전까지는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정신적 교감이나 성적인 부분이 다 중요하다는, 사랑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시각이었는데 말이죠.

이=그게 조금 불쾌하긴 하지만, 전 이 영화가 충분히 레즈비언적인 것 같아요. 헬렌 같은 경우는 자기 표현대로 ‘섹시어글리’한 남자를 찾다가 여자와 만나면서 결국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잖아요. 왜 여자가 더 좋으냐는 질문에 살결도 입술도 부드럽다는 대답도 사실은 맞는 말이고.

한=남자는 안 그런가

조=나도 바이라서 다 경험해봤지만 정말 그래요. 물론 남자에게는 또 다른 느낌이 있지만.

이=남자가 여자랑 다른 게 섹스뿐은 아닌 것 같고, 공유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컵을 하나 바라보더라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잖아요.

조=남녀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차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난 남자는 여성스러운 사람이, 여자는 약간 터프한 게 좋아요. 중성적인 매력에 끌리는 편이라고 할까. 남자들과 사귈 때 너무 여성스러워서 그런지 방금 말한 그런 문제를 느껴보지 못했어요. 지금 사귀는 애인은 여자임에도 또 너무 달라요. 난 쇼핑 안 좋아하는데, 그 사람은 무지 좋아하고, 난 서점 가면 좋아하는 데 그 사람은 싫어하고. 그러니까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닌가 하는 거죠.

남녀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차이

한=헬렌이 동거할 여자를 찾는 광고를 내자 레즈비언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다들 섹스하고 싶어서 난리치는 모습으로 나오잖아요. 그 장면에서 키득거리고 웃었지만 보고 나니까 좀 불편하네요.

조=이성애자의 판타지죠.

이=영화를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남자가 좋으면 남자랑, 여자가 좋으면 여자랑 섹스할 수 있는 거고, 굳이 그걸 게이라고, 레즈비언이라고 규정하는 게 싫어요. 이 영화는 섹스에 대해, 그게 대안적이든 아니든 신선하고 가볍게 다뤘다는 점에서 유쾌해요.

조=굉장히 영리한 영화죠. 쉽게 가는 것 같으면서 던질 만한 질문은 다 끄집어내잖아요. 우정과 사랑에 대해서도.

한=예전에는 동성애자를 모조리 살인자·범죄자로 그리니까 비판하고 그랬지만, 영화는 영화 자체로 봐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가 동성애자들로부터 비판받았지만, 그렇게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조=영화에서 성적 갈등이 문제가 돼죠 현실에서도 ‘팬더과’와 ‘햄스터과’가 있잖아요. 팬더는 가장 성욕이 없는 동물이죠, 멸종 위기에 놓일 정도로. 햄스터는 키워보면 알겠지만, 밥 먹고 하고 밥 먹고 또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현실에서 팬더는 팬더끼리, 햄스터는 햄스터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꼭 팬더와 햄스터가 만나거든요. 나만 해도 햄스터과인데 내 짝은 팬더과예요. 어느 정도냐면 섹스에 대한 욕구가 워낙 없어 신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라니까요.

이=섹스 스타일이 달라 헤어졌다고 할 수 있겠죠. 욕구불만이 쌓여서. 그런데 정신적으로는 잘 맞으니까 결국에는 친구처럼 지내잖아요. 내 파트너도 팬더과인데, 인영씨 파트너 정도는 아니에요. 내가 덤비면 같이 할 수밖에 없으니까.

·조=앗, 강간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이=아니 그게 아니라, 단지 수동적이라는 거지.

조=(한숨)그 정도면 팬더도 아냐. 제시카가 자꾸 섹스를 피한다고 헬렌이 한달 만에 헤어지자고 하는 게 전 이해가 안 돼요. 난 얼마나 참고 있는데. 헬렌이 정말 사랑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한=결국은 대화의 문제가 아닐까요. 한달 동안 불만을 전혀 얘기하지 않다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는 것보다는, 제시카가 헬렌을 사랑하지만 섹스에 대한 욕구가 없다면, 헬렌이 다른 곳에 가서 성욕을 풀 수 있도록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대화를 통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거죠. 처음에는 섹스북을 놓고 한 단계씩 밟아가잖아요. 그런데 동거까지 시작해놓고 왜 대화로 못 풀어. 소통의 문제인 거지.

조=어떻게 보면 지겨워진 거지. 우리나라에서 레즈비언의 섹스 문제는 이성애자 부부보다 비중면에서 더 낮은 것 같아요.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남자 고르는 법을 얘기해준 적이 있는데, 30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해온 비결은 섹스에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우리도 쉽지 않았지만 아빠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느냐며. 우리나라 이혼 사유의 70%가 성적 문제에 있잖아요.

소통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이=전형적인 한국 가정에서 부부 사이의 대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적어지잖아요. 그러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결혼한 지 4년 된 친구가 그거 때문에 산다고 하는데, 대화도 없는데 그나마 섹스마저 충족이 안 되면 헤어지게 되는 게 당연해보여요.

조=나는 남자한테 성적으로 만족한 적이 없어요. 보통 남자들은 여자가 만족하는지 어떤지 별로 관심이 없어요. 서로 섹스 판타지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 남자는 오래 가야 남성적이라고 느끼는 축이더라고요. 난 별로 좋지도 않은데 몇 시간 동안 자기 혼자 한다니까. 완급조절이나 감성적 터치가 더 중요한데, 그래야 여자는 오르가슴에 오르잖아요.

한=난 7년째 지내는 파트너가 처음이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는 모르겠고. 우린 바빠서, 절대적 시간이 없어서 자주 못하긴 하지만, 만족스러운 편이에요.

이=그러면 불만이 생기지 않아요

한=계속 얘기는 하니까. ‘우리 너무 오래되지 않았니 언제 날잡아야 하지 않겠니’ 하기도 하고, ‘왜 우린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야 하니’ 하면서 충분히 얘기를 하거든요. 섹스에 대해서도 ‘저번에 뭐가 좋았는데 이번에는 이 부분을 보강해보자’는 식으로 노력도 하고요.

이=내 파트너가 섹스를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자보다는 좋아요. 남자랑 잤을 때 피스톤이 별로였어요.

조=남자들은 만족도 못 시켜주면서 계속하자고 하니까 짜증이 나요. 적어도 지금은 그런 짜증은 없죠.

한=남자들이 한번 잔 여자에게 섹스하자고 하는데 거절당하면 그러잖아요. 한번은 했는데 두번은 왜 못하느냐, 사랑이 식었느냐, 다른 사람 생겼느냐…. 이건 초점이 엉뚱한 데 가 있는 거죠. 상대방의 몸 상태부터 살펴야죠. 우리는 ‘저번에 만족을 못했는데 이번에는 가능할까’ 하고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남자들은 만족하지 못하는 몸의 상태를 별로 고려하지 못해요. 여자들은 만족이 안 되면 그 다음에 별로 하고 싶지 않거든. 그렇다면 섹스 토이를 이용해 여자를 만족시켜줄 수도 있는데, 남자는 발기가 죽으면 그냥 침대를 떠나잖아.

조=이성 간에는 억압적인 성적 판타지가 많은 것 같아. 섹스는 이래야 한다는.

이=이를테면 반드시 삽입섹스로 마무리돼야 한다는.

한=성적 판타지와 성욕은 차이가 있는데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오늘 땡긴다’는 성욕이 생기면 파트너에게 요구해서 섹스할 수는 있지만 충족이 안 되는 경우가 많죠.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가고 싶다는 판타지가 있고, 그 판타지가 뭔지를 서로 이해하고 풀어줘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성욕이 생기면 그냥 푸느냐 마느냐만 따지니까.

이=섹스에 대해 남성들이 오히려 자유롭지 못해서 여자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아.

조=거꾸로의 상황도 가능하죠. 성은 이렇다고 정의 내리기가 정말 힘든 것 같아.

한=·이=맞아. 그냥 필이 꽂히는 대로 하면 되는데.

한=제시카는 섹스에 대해 보수적이었다가 섹스북 펴놓고 진도를 하나씩 나가면서 아주 좋아하게 되잖아요. 섹스에서 만족감을 느끼면서 헬렌과의 사이도 좋아지고. 저도 그랬어요. 제시카처럼 성에 대해 보수적이었는데 해보니 세상에 이런 게 있었구나 하면서 너무 좋은 거야. 섹스를 통한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달라지게 하더라고요. 인간에 대해서도.

이=난 내 성 정체성을 어려서부터 느끼다가 대학 졸업할 때 혹시 내가 이성애자는 아닌가 싶어서 남자랑 섹스를 해봤는데 아무 느낌이 없더라고요. 성 정체성의 문제는 섹스가 아니라 삶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왔느냐에 있는 것 같아요.

조=난 이성 사이에만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 굉장히 강해 오래도록 스스로 눈치를 못 챘어요. 3~4살 때 부모님이 섹스하는 걸 봤는데 너무 이상적이고, 좋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7살 때 유치원의 동성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그 친구가 어른들이 하는 놀이를 하자고 해서 옷을 벗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어정쩡하게 있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빨리 옷 입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 적이 있어요.

한=·이=우와, 충격적이다.

관계를 방해하는 억압적 성적 판타지

조=고2 때 여자아이한테 키스를 당해서 한 3개월 사귀었는데 그때 성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처음으로 느꼈어요. 물론 그때는 키스하고 포옹 정도만 했지만. 다른 건 성지식이 없어서 못했고.

한=난 책만 읽는 교육자 집안에서 커서 성에 대해 눈뜰 틈이 없었고, 섹스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틈이 전혀 없었어요. 대학 졸업할 때까지 사랑하는 이랑 어떻게 스킨십을 나눠야 하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다가 키스와 약간의 스킨십만으로도 너무 좋다는 걸 알았죠. 그때 삽입섹스는 아예 생각도 못했어요. 그 이상은 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좋기도 했고. 그런데 그때의 느낌과 나중에 해본 삽입섹스의 느낌은 큰 차이가 없었어요.

이=첫 키스를 고등학교 때 했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게 오르가슴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한=‘친한 친구와 키스해본 적 있습니까’라는 카피가 영화 포스터에 있던데 이건 어이가 없는 말이에요. 이성애자의 머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카피죠. 친구끼리 키스할 이유가 어디에 있죠. 우정의 키스는 할 수 있지만.

조=그렇죠. 성적인 모험을 어떻게 친구랑 해.

한=그 카피는 ‘당신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관계가 나중에 사랑하는 관계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죠.

누가 친구와 성적 모험을 한다는 말인가

이=반대로 볼 수도 있죠. 동성애 관계가 우정의 관계로 바뀌어버리는.

조=아무튼 레즈비언 입장에서는 친구랑 절대로 키스하지 않잖아요.

이=동성애자는 모든 사람을 성의 대상으로 본다는 편견이 담겨 있어요.

한=어제 한 대학에 특강을 나갔는데 진짜 황당한 질문을 받았어요. 만약 집에 불이 난다면 동성애자인 당신은 엄마와 아빠 중 누굴 먼저 구할 거냐.

조=·이=세상에나.

한=그 상황과 동성애자가 도대체 무슨 관계라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조=근데 바이는 더 심하잖아. 거의 성도착자 수준으로 보잖아요. 난잡하게 노는 것들로. 동성애자도 바이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고.

이=동성애자는 바이가 어느 순간 사회적 안정을 위해 결혼을 선택할 거라는 것에 비판을 하는 것이고, 이성애자는 이놈하고도 저놈하고도 한다는 시각이니까 완전히 다르죠.

한=이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동성애자든, 바이든, 이성애자이든 그런 지칭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사람들이 ‘동성과 지내는 너희는 뭐니’라고 질문을 던지니까 가장 알아듣기 쉽게 동성애자라는 말을 선택한 것뿐이지.

조=난 동성도 이성도 다 되는데 동성을 일부러 죽이고 살다가 어느 순간부터 양쪽 다 살려도 되겠다는 인식의 전환을 이룬 거고.

한=나 자신이 남성과 절대로 섹스할 수 없다고 정의하지는 않아요. 어제 특강 이야기로 돌아가서,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느냐는 질문이 나왔기에 아직 사랑할 만한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더니 이해를 못하더군요. ‘그럼, 남자를 만나면 다시 이성애자가 되는 거구나’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더군요.

조=그런데 현실적으로 여자와 평생 살아가는 게 보통 문제는 아니에요. 엄마는 계속 시집가라고 하지, 네가 직장을 다녀봐야 얼마나 다닐 수 있느냐며 생존을 위해 결혼을 재촉하잖아요. 이 사회는 나이가 들수록 여성을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려요.

이=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에게 적당히 빌붙어 사는 존재로 만들죠. 여성이 남성만큼 월급을 받고 비슷한 대우를 받으면 지금처럼 섣불리 결혼에 뛰어들지 않을 거예요.

조=아주 심각해요. 나는 내 선택이고 아직 비참하지는 않으니까 감수하는 거죠.

이=오늘도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요. ‘빨리 선보라’며 ‘엄마가 능력 있을 때 시집가야지’ 하는 거예요. 아마 내가 대학 교수 정도가 되면 이렇게 결혼하라고 재촉하지는 않을 거야. 경제적 능력이 없을수록 결혼에 대한 압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어요.

조=그렇죠. 결혼으로 한건 하라고, 엄마가 자꾸 부추기잖아.

결혼 스트레스 없는 그날을 꿈꾼다

한=여성이 경제적 약자인데 그런 약자끼리 결합하려니까 정말 어렵죠. 그런 면에서 게이들은 우리랑 또 달라.

조=레즈비언으로 버티다가 경제적 능력이 안 되니까 마흔에 결혼하는 경우를 봤어요.

이=마흔까지 가지 않더라도 돈에 대한 쪼들림 때문에 결혼하는 레즈비언이 많아요. 재미있는 건 동성끼리는 경제적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 등이 중요하지 않잖아요. 눈만 맞으면 되니까.

조=그렇죠. 직업이나 학력에서 차이가 큰 커플이 많잖아요. 대화만 되면 되니까.

한=재미있는 게 레즈비언한테는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같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죠. 가난하기 때문에 못 사귀겠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고. 아무튼 레즈비언 스트레스 1위는 주변에서 결혼하라는 것이에요.

정리=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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