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온 직후 “한국 사람들은 노벨문학상 못 타”라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속 대사가 불현듯 화제가 됐다. ‘패스트 라이브즈’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부문 후보에 오른 아시아계 여성 감독 셀린 송의 연극을 국내에서 볼 수 있다. 셀린 송이 미국 뉴욕에서 극작가였을 적 이민 1.5세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작업한 연극 ‘엔들링스’(이래은 연출)가 2025년 5월 국내 초연된다. 한국 만재도에 사는 노년의 해녀들과 한국계 캐나다인 극작가 하영을 중심으로 각자가 속한 지역에서 다양한 정체성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때로는 충돌하며 삶을 형성하는지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의 에스에프(SF) 영화 ‘미키 17’이 여러 차례 개봉 일정을 번복한 끝에 2025년 3월 중 개봉을 확정했다. 얼음으로 덮인 우주 행성 개척에 투입된 복제인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을 원작으로 하며, 극 중 로버트 패틴슨이 일인이역으로 분한다. ‘기생충’ 이후 6년 만에 돌아오는 봉준호의 차기작은 ‘한국 감독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약 2천억원이 투자된 블록버스터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에 질세라 박찬욱 감독도 블랙코미디, 스릴러 영화 ‘어쩔수가없다’로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다. 프랑스·벨기에·스페인 합작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코스타 가브라스 연출)의 리메이크작으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만수(이병헌)가 아내(손예진)와 아이들을 지키고자 재취업에 도전하는 나날을 그린다. 이병헌, 손예진에 더해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유연석 등 다채로운 배우 라인업이 눈에 띈다.
넷플릭스가 첫 한국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한지원 연출)을 선보인다. 2050년을 배경으로 화성 탐사에 나선 우주인 난영과 지구에 사는 뮤지션 제이의 로맨스를 그린 작품인데, 같은 기획사(매니지먼트엠엠엠) 소속 배우인 김태리와 홍경이 각각 난영과 제이의 목소리로 캐스팅됐다. 단편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로 선댄스 영화제를 비롯해 국제 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던 한지원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웹소설이 최초로 실사 영화화된다. 싱숑 작가의 인기 판타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 동명의 영화(김병우 연출)로 관객을 찾아온다. 10년 동안 연재된 소설처럼 멸망해버린 현실에서 유일하게 결말을 아는 김독자(안효섭)가 소설 속 주인공 유중혁(이민호)과 함께 세상을 구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서는 이야기다. 관건은 약 600화 분량에 이르는 웹소설 서사가 어떻게 영화적으로 압축되고 표현될 것인가에 있다.
2월 말 개봉하는 티모테 샬라메 주연의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제임스 맨골드 연출)은 다른 의미의 최초를 연상시킨다. 대중 가수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의 전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는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밥 딜런의 서정적인 노랫말을 부르는 티모테 샬라메를 만나볼 수 있다.
3월에는 일본 싱어송라이터 요네즈 겐시의 첫 내한공연이 기다린다. 요네즈 겐시는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을 보유한 일본 티비에스(TBS) 드라마 ‘언내추럴’의 주제곡 ‘레몬’의 원작자로도 알려졌는데, 이 곡의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현재 8.9억 회에 달한다.
2024년 66년 만의 역사를 뒤로하고 폐업한다는 아쉬운 소식을 알린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은 현재 문화예술공연 시설로 새 단장 중이다. 바로 이곳에서 2025년 8월 영국 런던, 미국 뉴욕, 중국 상하이 등에서 화제를 불러모은 이머시브(관객 참여형) 공연 ‘슬립노모어’(Sleep No More)가 최초로 국내 상륙한다. 다양한 버전으로 연극 및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재구성한 이 작품은 관객이 무대를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를 자유롭게 따라다니며 이야기 속에 참여하는 새로운 장르를 표방한다.
그럼에도 영화의 메카였던 충무로를 더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서는 넷플릭스 드라마 ‘애마’(이해영 연출)가 하반기에 마련돼 있다. 20세기 한국의 대표 성인 영화였던 ‘애마부인’의 촬영 과정을 재해석한 코미디 시대극으로, 코미디 연기의 장인 이하늬와 신예 방효린이 1980년대의 충무로를 배경으로 당시 영화배우들이 누렸던 영광과 그 뒤의 치열한 노력을 보여준다.
2025년에는 속편도 여럿 예정돼 있다. 전작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에 이어 영화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크리스토퍼 매쿼리 연출)이 5월에 개봉한다. 1996년에 스파이 액션 시리즈의 장을 연 뒤 신작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최상급의 수식어를 동원했던 ‘미션 임파서블’은 이번에도 여전히 ‘시리즈 사상 가장 큰 스케일의 액션’을 예고하고 있다. 톰 크루즈는 이 작품을 촬영하면서 스파이 이선 헌트로서의 여정에 공식적으로 마침표를 선언했다.
20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오는 작품도 있다. 연초에 공개되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는 스톱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 명가 ‘아드만 스튜디오’의 대표작인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2023년, 작품 제작용 점토 재고가 부족하다는 루머로 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적이 있으나, 곧 새로운 공급업체를 확보했다는 희소식과 함께 앞으로도 작품의 지속가능한 제작이 가능함을 알렸다.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 ‘위키드’를 실사화한 영화 ‘위키드’(존 추 연출)의 속편 ‘위키드: 포 굿’(존 추 연출) 또한 연말에 돌아올 예정이다. 그 기다림이 지루하다면, 뮤지컬 ‘위키드’ 오리지널팀 내한공연으로 달랠 수도 있겠다. 뮤지컬 ‘위키드’는 올여름 약 13년 만의 내한공연을 예정하고 있다.
2024년 12월31일 개봉한 영화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김성제 연출)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 희망을 품고 지구 반대편 콜롬비아 보고타로 이민 간 소년 국희(송중기)의 생존기를 그린다. 스크린 바깥의 세계에서, 민생경제 살리기는 여전히 주요한 정치적 과제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파산 같은 단어들이 일상을 잠식했던 약 30년 전 소시민의 모습은 현재 미디어에서 부지런히 재현되는 중이다.
2025년에는 1997년 외환위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 두 편의 드라마가 나란히 공개된다. 티브이엔(tvN) 드라마 ‘태풍상사’(이나정 연출)는 외환위기 속에서 아버지가 남긴 중소기업 ‘태풍상사’를 지키기 위한 청년 사장 강태풍(이준호)의 고군분투를,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넉오프’(박현석 연출)는 평범한 회사원 김성준(김수현)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면서 짝퉁 시장의 제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한편, 2020년대 초 개미투자자의 성행 전후로 비트코인에 몰입하는 직장인들의 심리를 실감 나게 묘사했던 장류진 작가의 소설 ‘달까지 가자’가 문화방송(MBC)에서 드라마(오다영 연출)로 만들어진다. 이 드라마는 불안정한 고용 환경, 직장 내 부조리, 늘어나는 가계 빚으로 빈곤을 겪는 동시대 청년들의 삶을 조명하는 오피스물이다.
공동체적 애도라는 과제 앞에 선 동료 시민은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드라마와 영화를 바라보게 될 수밖에 없다. 2024년 12월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조명가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의 사연을 사려 깊게 살펴보았고, 2024년 4분기에 개봉한 영화 ‘룸 넥스트 도어’(페드로 알모도바르 연출)는 ‘잘 죽을 권리’에 대해 질문을 건넸다. 죽음이 삶으로부터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감각 속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2025년에도 부지런히 공개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조영민 연출)은 10대부터 30대가 되기까지 서로를 가장 좋아하는 동시에 가장 미워했던 두 친구의 이야기로, 드라마 작가가 된 40대 은중(김고은) 앞에 성공한 영화제작자 상연(박지현)이 나타나 말기암에 걸린 자신의 존엄사를 위한 동행을 부탁하게 된다.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우리 영화’(이정흠 연출)는 한때 촉망받는 신예였으나 ‘소포모어 징크스’(성공적인 첫 작품에 비해 이후 활동이 부진한 경우)를 겪는 영화감독 이제하(남궁민)와 더 늦기 전에 인생의 주연으로 살고자 하는 시한부 배우 이다음(전여빈)의 이야기를 다룬다. 2020년 제73회 칸 영화제에 초청됐으나 코로나19로 인해 개봉이 무한히 미뤄졌던 영화 ‘행복의 나라로’(임상수 연출) 또한 같은 테마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탈옥수와 난치병 환자의 마지막 시간을 그린 로드무비로, ‘파묘’의 최민식, ‘헤어질 결심’의 박해일, ‘미나리’의 윤여정 등이 출연한다.
죽음 그 너머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게 하는 작품도 있다.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김석윤 연출)은 죽음을 맞이한 80대 주인공 해숙(김혜자)이 사랑하는 사람을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현생 초월 로맨스’를 보여준다.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합을 맞췄던 김혜자, 한지민 배우와 김석윤 감독, 이남규 극본가가 재회한다는 점에서도 기대를 모은다. 제55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이 작품으로 대상을 받은 김혜자 배우가 전했던 말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오늘을 사세요, 눈이 부시게!”
서해인 ‘콘텐츠 로그’ 발행인·‘작업자의 사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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