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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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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커밍아웃’이 필요했다

소수자인 아이에게로 혹은 더 나은 자신에게로,프로페셔널한 두 여성의 성장 다큐 <너에게 가는 길>
등록 2021-11-24 12:16 수정 2021-11-24 23:23
<너에게 가는 길>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공

<너에게 가는 길>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공

많은 혐오자가 말한다. “네 자식이 동성애자라고 해도 괜찮으냐.” “네 자식이 트랜스젠더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모 된 마음으로는 퀴어(성소수자)인 자식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리는 걸 전제로 한 편협한 물음이다. 혐오자들은 이 질문을 던지며 “자식이 동성애자인 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대답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너에게 가는 길>은 이런 혐오자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영화다. 제목처럼, 이 영화에는 커밍아웃한 자식을 마주했을 때, 자식을 버리거나 외면하는 대신 ‘너에게 가는 길’을 선택한 이들이 등장한다.

촬영 기간 4년, 선택된 주인공

영화의 주인공은 34년차 소방공무원 ‘나비’(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명)와 27년차 항공승무원 ‘비비안’(활동명)이다. 성격도 다르고 캐릭터도 조금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퀴어인 자식을 두었다는 점과,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지하기 위해 성소수자부모모임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활동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촬영은 무려 4년간 이뤄졌다. 변규리 감독은 영화를 찍기 시작했을 때 주인공을 특정하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될 만한 캐릭터를 추려서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선택된 두 인물이 활동가 나비, 그리고 비비안이다.

나비는 ‘딸’인 줄만 알았던 한결이 트랜스젠더라고 커밍아웃했을 때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비는 한결이 여자로 살며 차별을 겪는 게 싫어 남성이 되고 싶어 한다고 오해하고, 한결은 늘 자기편이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상처받는다. 하지만 곧 나비는 자신의 몸과 끊임없이 불화해온 한결의 인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결이 수술로 가슴절제와 자궁적출을 하고, 법적 성별 정정을 하는 과정에서 든든한 지지자가 돼준다.

비비안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그는 아들 예준이 장문의 편지로 커밍아웃하기 전까지는 아들이 게이일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편지를 읽고서도 잘 믿기지 않아 며칠을 울었다. 관심받는 걸 좋아해 사진 찍을 때마다 가만있는 법 없이 몸을 요리조리 움직이던 아들이 사춘기 들어서며 성격이 확 달라지는 걸 보고도 ‘이런 게 사춘기인가보다’라고만 생각했지 뭔가 다른 게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파트너인 지미와 함께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을 시작하면서 비비안은 예준을 더 잘 이해하게 됐을 뿐 아니라 ‘성소수자 부모’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의 나비(활동명·왼쪽)와 비비안(활동명).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의 나비(활동명·왼쪽)와 비비안(활동명). 엣나인필름 제공

“이런 세상에 애들이 산단 말이야?”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 퀴어라는 정체성만큼이나 ‘성소수자 부모’라는 정체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성소수자처럼 성소수자 부모 역시 커밍아웃이 필요하다. 공부해야 하고 나아져야만 조금씩이나마 편해질 수 있다. 자식이 퀴어임을 알게 된 부모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주변에 내 자식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알리거나, 알리지 않거나.

많은 부모가 퀴어 정체성을 자식의 치부로 생각해 감추려 한다. 그것이 자식을 돕는 일이자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비와 비비안은 좀 다르다. 당당하게 내 자식이 퀴어임을 알리고 자신이 성소수자 부모임을 드러낸다. 그렇게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자식들이 살기에 좋은 사회를 만들려 애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퀴어영화인 동시에 프로페셔널한 두 여성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여성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장소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마주한다. 때로 이들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너무나도 가혹한 대우를 받는다.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주인공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혐오자들의 구호와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다. 영화에서 공개하지 못한 장면이 많을 정도로 현장의 풍경은 격하고 참혹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비는 폭력을 서슴지 않는 혐오자들을 보며 오히려 결의를 다진다. “이런 세상에서 애들이 살고 있단 말이야? 부모라도 싸워야지.” 냉담한 현실을 마주하고 한숨 쉬듯 담배를 물기도 한다. 법원에서 성별 정정을 기각당한 뒤 한결과 나비는 말없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법원 판결에 내 삶을 좌지우지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혹하다고 한결은 고백한다.

가끔은 환대를 경험하기도 한다. 비비안은 예준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해 ‘내 게이 아들을 사랑합니다’(I Love My Gay Son)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신나게 거리 한가운데를 누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들과 자신의 존재를 환영하는지 온몸으로 만끽한다.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나비는 “우리 아이가 성별 정정을 마쳤습니다”라고 말하고 모두에게 박수와 축하를 받는다. 거기에서 나비와 한결은 그 어떤 자리에서보다 편안해 보인다.

한 뼘 더 나은 사람으로

이 작품은 자식에게 헌신적인 동시에 용기 있는 활동가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 때문에 가족의 사랑과 선의에 기대지 않고서는 어떤 투쟁을 이어나간다는 게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퀴어가 커밍아웃 뒤 탈가정·탈학교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인정과 사랑은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기에, 영화의 따스함이 누군가에게는 아득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가족과 부모의 사랑만이 전부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매듭짓지 않는다. 주인공 나비는 말한다. “힘든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부모자식 간이라 그게 참 다행이에요. 그렇지만 가족에게 위로받지 못해도 더 다행이에요. 그만큼 더 튼튼해질 거니까. 나의 뿌리는 내가 만드는 거죠.”

<너에게 가는 길>이라는 제목도 여러 방향으로 읽힌다. 퀴어 당사자이자 자식인 한결과 예준에게로 나비와 비비안이 한 발 더 가까워진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식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한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혹은 자식을 통해 수많은 소수자를 이해하게 되어간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이 영화를 본 당신은 이 영화를 보기 전보다 한 뼘 더 나은 사람이 돼 있을 것이다.

천다민 <뉴닉>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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